《高麗史》
1 소개
조선 건국후 조선왕조는 태조 때부터 동양 왕조국가의 전례대로 전(前) 왕조의 정사(正史)를 편찬하기 시작했는데, 세종 대에 와서야 《고려사》가 완성되었다. 구성은 세가(世家) 46권[1], 지(志) 39권, 표(表) 2권, 열전(列傳) 50권,[2] 목록 2권 총 139권. 축약판으로 《고려사절요》가 있는데 때때로 《고려사》에 없는 기사가 《고려사절요》에는 보이는 경우도 있어서 서로 참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2 역사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는 고려시대 역사의 편찬을 명했고 이에 정도전이 고려실록, 민지의 편년강목(編年綱目), 이제현의 사략(史略), 이색과 이인복의 금경록(金鏡錄)을 모아 37권의 고려국사(高麗國史)와 진고려국사전(進高麗國史箋)을 편찬하였고, 정총이 고려국사서(高麗國史序)를 편찬했다. 이 때의 작업들은 역사가의 독창적인 저술이라기보단 고려 말 찬술된 역사서들을 모아 편집하는, 일종의 자료집 편찬에 가까웠다.
하지만 조선 개국공신들의 주관이 개입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태종 이방원이 올바르게 개수를 명하여 1414년~1416년에 하륜이 한번 개수하였다. 이후 세종대왕이 고려국사의 공민왕 이후 기사 서술에 조선 측의 잘못이 있음을 지적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올바르게 쓰라는 이실직서(以實直書)의 원칙을 천명하였고 이에 1419년 9월에 유관(柳觀)과 변계량(卞季良)이 다시 한번 개수하였다. 이후 1423년 유관과 윤회(尹淮)가 고려의 왕실 용어나 참칭(僭稱)의 개서[3]에 대하여 고려가 당시 썼던 용어를 그대로 직서(直敍)하도록 하여 제3차 개수 작업을 거쳤다.
그 후 1438년~1442년 사이에 신개(申槩)와 권제(權踶)가 4번째로 개수하여 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이라 이름하였다. 이 때 소략한 내용과 고려시대 개칭된 용어를 보충하였다. 그러나 세종이 교정 과정에서 아직 역사기술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문제점을 제기하여 반포가 중지되었다. 1446년 세종은 또다시 김종서(金宗瑞), 정인지(鄭麟趾), 이선제(李先齊) 등에게 개찬을 명했다. 1451년(문종 원년) 8월에 완성되었다.
세종때 일단 완성되었으나, 세종은 이 책이 조선왕조의 개창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나치게 고려왕조를 깎아내렸다고 판단, 김종서등에게 새로 편찬하게 했다. 결국 문종때 완성되었다. 하도 세종대왕에게 빠꾸를 먹어서 아마 세종이 더 오래 살았더라면 편찬기간도 더 길어졌을 것이라는 농담도 있다. 그만큼 세종이 신경을 각별히 쓴 책 중 하나.
3 크고 아름다운 사(史)서
조선왕조실록과 비교되다보니 그렇지《고려사》도 상당히 방대하고 상세한 편에 속하는 사서다. 오죽하면 너무 내용이 많다고 축약본인 고려사절요가 따로 나왔겠는가. 총 139권 75책, 글자 수 336만 9623자로 거대국가였던 중국의 역대 사서들인 25사들과 비교해봐도 분량이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든다. 25사 내에서도 고려사보다 권수가 많은 사서는 명사, 원사, 송사, 구-신당서 뿐이고, 그 중 송사와 원사는 각각 약 200만자, 130만 6천자로 글자수는 오히려 고려사가 더 많다. 대륙 25사 전부를 다 합쳐서 3999권, 3996만 6383자로 글자수로 따지면 중국이 자랑하는 25사 전체의 1/10 정도 크기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은 25사 전부 합친거보다 더 많다... 다만 고려가 어지간한 중국의 왕조국가들보다 오래 지속되었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고려실록[4]이 유실되고 고려의 서적이 많이 남지 않은 것은 참 아쉽지만... 조선왕조실록이 1967권이다. 무려 10배 이상 차이나는 셈.
《고려사》는 고려 역사에 접근할 때 가장 중요한 자료이긴 하지만,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당대 기록이 아니라 후대에 편찬된 자료라는 한계점이 있다. 때문에 《고려사》를 연구할 때에는 《고려도경》 같은 당대의 기록이나, 《고려사절요》, 중국 사서 등의 다른 역사서를 통해 교차검증하는 게 중요하다. 사료 이외에도 금석문, 남아있는 고려의 서적, 조선시대에 고려의 풍습을 다룬 책[5] 같은 것 들을 참조해야 한다. 다만 고려사는 철저하게 원 사료를 충실하게 재구성한, 즉 원전 자료를 편집하는 방식으로 편찬되었다는 점에는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고려시대 묘지명 자료가 실제로 고려사 열전의 내용에 그대로 반영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편찬의 방향을 둘러싼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원 사료의 일부가 취사선택되는 경우는 있었으나, 찬술자가 스스로 문장을 만들어 내용을 보충하지 않은 점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특히 조선 초기 역사가의 사론이 전혀 실려 있지 않은 점도 이 책이 사실을 충실하게 모은 자료집으로서의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의 흔적이다.
《고려사절요》도 그렇지만 혜종부터 목종까지 사료가 많이 부실한 편이다. 고려의 기틀을 세운 성종이 그나마 낫지만...이는 여요전쟁 당시 개경 함락으로 사료를 많이 날려먹은 탓에서 기인한다.
2015년에 영국에서 고려사 필사본 전질 풀셋트가 하나 발견되었다.관련 기사 중국 청나라의 금석문 학자들이 조선 사신들에게 매달려 얻은 후 죽어라 연구하던 것이었다고. 여덟 상자 되는 분량을 빌려다가 집에 있던 소장본과 대조하는 데만 108일이 걸렸다고 한다.
4 한국어 번역
북한에서는 1962년에서 1966년에 걸쳐 사회과학원 고전연구실이 세가 4책, 지·표 3책, 열전 4책 등 모두 11책으로 번역서를 내놓았다. 이를 '아름출판사'와 '신서원'에서 《북역 고려사》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다.
한국에서는 동아대학교 고전연구소가 1960년 《고려사》 번역을 시작해 1965년에서 1973년에 걸쳐 《역주 고려사(譯註高麗史)》라는 제목으로, 색인 1책을 포함하여 총 11책으로 펴냈다.[6]
한편 2000년대에 들어서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고려사》역주사업단에서 《고려사》를 재번역했다. 동아대는 2001년 9월부터 재번역 사업을 시작해 2006년 11월에 열전(列傳) 9책, 2008년 8월에 세가(世家) 12책, 2010년 2월에 지(志) 7책을 간행하고 2011년 10월 색인 2책을 간행함으로써 총 30책으로 《고려사》 번역을 완성했다. 이 번역본은 네이버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아래 항목 참고.
5 인터넷에서 보기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고려사 - 한문 원문
네이버 국역 고려사 - 한국어 번역, 한문 원문 및 원서 스캔 이미지
《고려사》는 고려시대 연구의 중심이 되고 있는데, 2012년까진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인터넷에서 무료로 보기가 쉽지 않았다. 국사편찬위원회 DB에서는 원문을 무료로 볼 수 있지만 국역이 안돼 있었고, KRpia에서는 기관 회원에게 국역본을 공개하긴 했는데 유료였다. 뭐 KRpia의 경우 대부분의 대학교나 지역도서관 회원이라면 무료로 제공했기 때문에, 번거롭지만 절차만 거치면 집에서도 원격접속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2012년 12월 26일 부터 네이버에서 삼국사기 등과 마찬가지로 국역 《고려사》 서비스를 실시했다! 오오 네이버 오오.. 언제든지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원문과 번역본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위의 링크를 참조.- ↑ 제후국의 예로써 왕의 기록이 본기(本紀)가 아닌 세가(世家)로 수록. 고려는 외왕내제 국가였지만 이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보기에 참람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 ↑ 우왕과 창왕을 세가가 아닌 열전, 그것도 반역전에 넣은 것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세가는 51권, 열전은 45권이다.
- ↑ 고려의 외왕내제적 요소와 용어들을 제후국의 법도에 맞게 고쳐 서술했다.
- ↑ 조선이 개국한 이후 한양의 춘추관에 보관하고 있던 중,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이 불타면서 소실되었다. 고려왕조실록이란 단어는 그래서 틀린 단어이다.
- ↑ 용재총화,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같은 조선시대 책에서도 고려시대의 야사나 지리, 풍습 등을 다루는 경우가 있다. 특히 개성을 다룬 지리지 같은 경우, 개성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고려의 유풍이 많이 남았었기에 많이 참조하는듯.
- ↑ 아래의 번역도 그렇고 이 책의 번역에 동아대학교가 주도적인 것은...국내에 남아있는 여러 판본들 중 완질본 중에서는 동아대학교 소장 판본이 상태가 제일 양호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