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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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이름밥 말리
BOB MARLEY
분야음악
입성날짜2001년 2월 6일
위치7080 Hollywood Blvd.

1 개요

Robert Nesta "Bob" Marley, OM[1] 1945년 2월 6일 생 ~ 1981년 5월 11일

자메이카 출신 음악가. 역대 최고의 레게 스타로 불린다.

2

영국군 장교[2]였던 중년의 백인 아버지와 10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메이카 트렌치타운의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밥 말리는 버니 웨일러, 피터 토시와 함께 16세에 가수로서 정식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드리프터즈, 임프레션즈, 샘 쿡, 컨트리 가수 짐 리브스와 당시 자메이카의 토속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62년에 그는 Wailing Rudeboys로 알려진 Teenagers와 함께 첫번째 음반인 "Judge Not"을 발표했다. 이후, 팀명으로 웨일러스(Wailers)를 채택하고 정치적인 내용을 담은 평범하지 않은 곡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어 자메이카에 서서히 퍼지고 있던 'SKA'비트 음악을 시도했고, 그래서 "rude boy music"으로 불리기도 했다.

1966년에 밥 말리는 리타 앤더슨과 결혼하여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갔다가 자메이카로 돌아온다.

이 때에 자메이카에서 급속히 성장한 라스타파리아니즘[3]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SKA, Rude Boy music과 더욱 발전한 형태인 "rock steady"로 그의 곡들은 더욱 갈고 다듬어졌다. 그러나 1973년 이전까지는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가 Island Record에서 그의 첫 음반을 만들 기회를 얻게 되었고 그 결과, "Stir It Up"과 Peter Tosh의 "Stop That Train"이 포함된 "Catch a Fire"를 발표하여 전세계인들에게 처음으로 레게를 소개하게 되었다.

1974년 웨일러스 멤버와 결별하고 I-Threes(그의 아내 리타가 포함된 여성보컬트리오)를 조직한 후, 발표되자마자 레게의 클래식이 돼버린 "No Woman, No Cry""Lively Up Yourself"가 수록된 아주 뛰어난 명반, "Natty Dread"를 발표했다. 1974년 당시 밥 말리 곡 중의 하나인 "I Shot the Sheriff"는 에릭 클랩튼이 리메이크하기도 했는데 그 곡은 팝 싱글 1위을 차지하기도 했다. 또한 이를 기반으로 한 Strictly Business라는 넘버가 EPMD에 의해 발표되기도 하였고, 이 노래의 가사는 나는 전설이다 2007년판 영화에서도 가끔 언급된다. 70년대 말, 밥 말리는 "Rastaman Vibrations"와 "Exodus"가 미국시장에서 약진하고 있을 때 또한 "Exodus", "Waiting in Vain", "Jamming" 그리고 "Is This Love"등 전세계적으로 히트한 트랙을 갖게 되었다.

그는 평소에 축구를 무척 즐겨 했는데 1977년 말리와 웨일러스(Marley and Wailers)의 유럽투어 때 프랑스 기자들과 함께 축구시합을 했다. 경기중에 그는 발에 부상을 입었고,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그의 몸에 있던 암세포를 발견했다. 암치료를 거부한 그는 건강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1978년에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을 비롯한 광범위한 지역을 투어 했다. 뉴욕에서의 공연을 기념하기 위하여 실황을 담은 "Babylon by Bus"를 발매했고, 뉴욕공연은 레게 역사상 가장 파워풀한 라이브공연으로 기록되었다. 같은 해 자메이카 킹스톤에서 평화를 위한 콘서트와 보스턴에서 흑인자유투사를 위한 자선공연을 가졌다. 그러나 무리한 투어일정은 그의 건강에 엄청난 악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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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의 음악생애 후반에는 노래를 통해 정치적인 메시지를 표하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 1978년 4월 22일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1세가 자메이카에 방문 12주년 기념 콘서트로 'One Love Peace Concert'를 열었는데, 이 콘서트의 마지막에 말리는 당시 자메이카의 총리였던 마이클 맨리(노동당)와 에드워드 시가 국민당 총수와 삼자악수를 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당시 자메이카 정계는 정치깡패들이 정적에게 거리낌없이 총을 갈겨대던 시절인데다 말리가 공연하던 때에 자메이카 총선이 얼마 앞둔 시점이기도 했다. 전쟁보다는 평화를 원했던 말리의 뜻이 공연에 그대로 표출됐던 셈.[4] 이후 1979년 "Survival"을 통해서 이전과 달리 그의 정치적인 색채를 공격적으로 표현했다.

1980년 다시 투어에 나선 그는 뉴욕의 센트럴 파크를 조깅하다가 쓰러졌다. 은 그의 뇌와 폐 그리고 심장에까지 퍼져 있었고 8달 후 사망했다.

3 기타

아들로 지기 말리, 스테판 말리[5], 데미안 말리, 줄리앙 말리, 카이마니 말리, 로한 말리[6]가 있다.

그의 가족들이 중심이 되어 밥 말리의 이름을 딴 'The House of Marley'라는 이어폰/헤드폰을 출시했다. 수준급의 음질과 친환경 소재(목재, 직물, 재활용 알루미늄 등)[7], 구입 시 수익금 중 일부 사회단체(1Love.org)에 환원운동을 하는 것이 이 브랜드의 특징.

그런데 이상하게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연기획자들 중에는 아직도 밥 말리가 생존해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공연 기획할 때 밥 말리 출연 섭외를 시도하기도 한다.

2012년 8월 2일 그의 생애를 담은 영화 '말리'가 개봉되었다. 다큐멘터리 영화로 IMDB 평점 7점 후반대로 준수한 평가를 받고 있다.

스눕독이 사실 이 분의 환생이라 카더라
  1. Order of Merit(자메이카의 명예 훈장)
  2. 밥 말리가 태어났던 때는 자메이카는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시절이었다.
  3. Rastafari Movement. 성서를 다르게 해석하여 예수를 흑인으로 보고 동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1세(1892∼1975)를 재림한 그리스도로 섬기는 신앙운동. 이름은 하일레 셀라시에의 본명인 '라스 타파리 마콘넨(Ras Tafari Makonnen)'에서 유래했다. 자메이카의 흑인들이 고향인 아프리카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신앙화된 것으로써 현재 아프리카의 많은 이들이 믿고 있기도 하다.
  4. 그리고 말리의 장례식에서 맨리와 시가는 다시 손을 맞잡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5. 2016년에 스컬&하하의 Love Inside라는그의 아들 stepen marley 곡에 참여했다
  6. 여담으로 로한 말리는 마이애미 대학(University of Miami)의 풋볼팀인 허리케인스에서 라인배커로 뛰었다. 그 당시 같이 뛰었던 선수 중에 유명한 이로 NFL 전설적인 라인배커인 레이 루이스(전 볼티모어 레이븐스)와 이후 프로레슬러·영화배우로 전향한 드웨인 존슨(더 락)이 있다. 힙합·R&B 가수인 로린 힐과는 1996년부터 사실혼 관계(라지만 본처가 있는 상황에서 다른 살림을 차렸다고 볼 수 있음)로 슬하에 아이 다섯이 있었으나 나중에 갈라섰다. 그리고 현재는 사업가로서 활동하고 있는데 아버지의 별명인 'Tuff Gong'이라는 의류브랜드를 비롯 커피 등 여러 사업을 펼치고 있다.
  7. 일반적인 이어폰/헤드폰과 달리 케이블 부분이 패브릭으로 처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