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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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역대 국왕
7대 차대왕 고수성8대 신대왕 고백고9대 고국천왕 고남무
시호신대왕(新大王)
고(高)
백고(伯固) / 백구(伯句)
생몰년도음력89년 ~ 179년 12월 (91세)
재위기간음력165년 10월 ~ 179년 12월 (14년 2개월)

고구려의 제8대 .

1 소개

태조대왕차대왕의 관계에 대해선 기록마다 차이가 있는데, 그 탓인지 신대왕 역시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기록마다 다르게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태조대왕과 차대왕의 동생으로, 범엽의 《후한서》에는 차대왕의 아들로,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는 태조대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정설은 없는 듯. 일단 한국백과사전 등에선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태조대왕과 차대왕의 동생라는 설을 먼저 기술하고서 나머지 2개의 설도 같이 언급하는 편이다. 기록된 시기를 생각해보자면 《후한서》 쪽이 더 신빙성이 높다는 의견이 있으나, 딱히 그렇지도 않다. 그런 경우라면 차대왕을 몰아내고 그 아들인 신대왕을 옹립하는 부분에 대한 해석이 말이 안 된다. 게다가 태조왕-차대왕 관계도 분명하지 않으니, 맥락상으로는 사실 삼국지의 태조왕계 쪽이 더 깔끔한 편. 삼국지에선 고국천왕이 나오지 않는 오류가 있으나, 그렇다고 후한서가 더 옳다고 보기엔 정황이 어긋나 있다.

일단, 현재로선 차대왕이든 신대왕이든, 계루부 지파 내의 "형"관직을 차지하던 유력자들이었고 이것이 혈연관계로 정리되었다는 설명도 있다.[1]

2 쿠데타, 그리고 재위

삼국사기에 따르면 차대왕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시간을 때우자 폭정을 열심히 하긴 했었다 명림답부쿠데타를 일으켜 차대왕을 죽이고 아들(혹은 동생)인 백고를 왕위에 올리니, 이가 신대왕이다.

삼국유사 왕력에 '을사년(165) 국조왕(태조왕)의 나이가 109세였는데, 형제 두 왕(태조왕&차대왕)이 모두 신대왕에게 시해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뭐지

사실 《삼국사기》에 적혀있는 차대왕 본기에는 백성들에 대한 왕의 실정이 단 한 줄도 적혀있지 않다. 그런데 김부식은 열전에서 명림답부가 차대왕이 실정을 했기에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적었다.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긴 하나 《삼국사기》에는 열전으로 역사의 내용을 더 판단하기 쉬운 사항이 좀 많다. 대표적인 예가 김유신 열전.[2]

차대왕 때에는 폭정을 피해 산골로 숨어 살았다가 명립답부가 안심시키고 왕위에 올렸다 한다. 아무래도 아버지(혹은 형, 혹은 삼촌인) 차대왕에게 미움을 산듯하다. 왕위에 오른 나이가 삼국사기에서 77세로 나오며 형인 차대왕처럼 고령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3 내정

신대왕의 정치의 대부분은 국상에 오른 명림답부가 처리했다. 명림답부가 죽은 이후의 고구려는 신대왕의 친정체제로 돌입했으나 기록에는 특별한 정치적인 치적이 없는 것으로 나와있다. 그래도 당시 고구려의 좌보와 우보를 합쳐 최고 관직인 국상을 만든 걸 보면 후대에 끼친 영향이 아예 없는 건 아닌 듯.

명립답부를 매우 신뢰했으며 그가 워낙에 명재상이라 신대왕의 치세는 대체로 평안했던 것으로 사서는 기록한다, 답부가 죽은 이후 그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붕어하였고 이후 둘째 아들 남무(고국천왕)에게 왕위가 돌아갔다.

기록이 남겨진 아들이 다섯명이나 되고, 그중에 두명이 왕이 되었다. 다만 장자계승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 두차례나 골육상쟁이 있었던건 좀 안습. 아들 다섯의 이름이 장남부터 발기拔奇, 남무男武(고국천왕), 발기發岐, 연우(산상왕), 계수다. 뭔가 이름을 한국어로 읽으면 거시기 하다. 게다가 죄다 왕위 계승 탈락..

4 삼국사기 기록

一年冬十月 신대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대사면을 행하고 명림답부국상으로 삼다.
三年秋九月 시조 사당에 제사를 지내다.
三年冬十月 졸본에서 돌아오다.
四年 현도에 속하기를 청하다.
五年 현도태수 공손탁을 도와 부산적을 정벌하다.
八年冬十一月 명립답부의 계책으로 후한의 군대를 물리치다.
十二年春一月 신하들이 태자 책립을 건의하다.
十二年春三月 남무를 태자로 삼다.
十四年冬十月 일식이 일어나다.
十五年秋九月 국상 명림답부가 죽다.
十五年冬十二月 신대왕이 붕어하다

  1. 동북아역사재단의 초기 고구려 정치사 참조
  2. 그런데 김유신 열전은 양은 풍부한데 대신에 소설이 많아서 가지치기를 많이 해야 한다. 다 김유신의 후손이 남긴 행장이 바탕이라서 생긴 문제이다.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료가 사라지고 조선사를 후대에 저술하는데, 사료가 원균의 후손이 지은 행장이라면 내용은 어떻게 될까. 김유신은 원균만큼 막장은 아니지만 워낙에 고전소설의 분위기가 강해서 엄격한 사료비판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