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dth=50 고구려의 역대 국왕 | ||||
9대 고국천왕 고남무 | ← | 10대 산상왕 고연우 | → | 11대 동천왕 고우위거 |
시호 | 산상왕(山上王) | |
성 | 고(高) | |
휘 | 연우(延優) / 이이모(伊夷模)[1] / 위궁(位宮)[2] | |
생몰년도 | 음력 | ?[3] ~ 227년 5월 |
재위기간 | 음력 | 197년 5월 ~ 227년 5월 (30년) |
1 왕위싸움의 승자가 되다
신대왕의 넷째 아들. 형인 고국천왕이 자식없이 죽자 동생인 고연우가 형수인 왕후 우씨의 지지를 받아 산상왕으로 즉위하였다. 더불어 산상왕은 형수(!)인 왕후 우씨를 부인으로 맞이하는 이미 사라진 풍속인 '형사취수제'를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산상왕의 형 발기(發岐)[4]가 거세하며 거세게 반발하여[5] 소노부(消奴部) 세력을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켰고 왕궁을 포위했으나... 따르는 자가 없어서 망했어요.[6]
결국 발기는 요동으로 도망쳐 당시 요동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던 공손씨(公孫氏)의 군대까지 끌어들여 당시 수도를 공격하였으나 산상왕은 동생 계수(罽須)를 시켜 이를 물리쳤고... 계수는 "아무리 밉다고 한나라를 끌어들이다니 부끄러운 줄 아셔야죠!"라며 형을 질타했다.[7] 결국 꿈도 희망도 없게 된 발기는 자살하였다.[8] 셋째 발기는 수도를 공격하는데는 성공했으나 계수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도주하다 자살했다.]
2 내정
198년에 국내성 바깥쪽에 위치한 산성인 환도성(丸都城)을 쌓았다. 203년에는 국상 을파소(乙巴素)가 죽어 고우루(高優婁)를 후임 국상으로 삼았다.[9] 이 즈음 관노부(灌奴部) 주통촌(酒桶村) 출신의 후궁을 맞아들였고[10], 소후에게서 동천왕을 보았다. 이 때문에 왕후 우씨에게 동천왕은 계속 갈굼을 받게 되는데...
환도성을 쌓은 10년 뒤인 209년에는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고는 하나 이를 부인하는 견해도 있다. 217년에는 후한의 평주(平州)의 하요(夏瑤)가 1천여 가(家)를 거느리고 투항하였다, 산상왕은 책성(柵城)에 이들을 안치하였다. 227년에 사망하니 산상릉(山上陵)에 장사지냈고, 그 이름을 따서 산상왕이라고 불렀다.
여담으로 산상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처자식이 이미 있었으나 즉위과정에서 일어난 난리통에 형인 발기가 처자식을 모두 죽여버리는 바람에 동천왕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었다.[11]
3 삼국사기 기록
一年夏五月 산상왕이 즉위하다
一年秋九月 발기를 왕의 예로 장사지내고 우씨를 왕후로 삼다
二年春二月 환도성을 쌓다
二年夏四月 사면을 단행하다
三年秋九月 사냥을 하다
七年春三月 아들을 갖기를 원하다
七年秋八月 국상 을파소가 죽다
十二年冬十一月 주통촌의 여자와 관계를 맺다
十三年春三月 주통촌의 여자가 아들을 임신하다
十三年秋九月 주통촌의 여자의 아들 이름을 교체라 하다
十三年冬十月 환도로 천도하다
十七年春一月 교체를 태자를 삼다
二十一年秋八月 한인들이 투항해오다
二十一年冬十月 천둥과 지진이 일어나고 혜성이 나타나다
二十三年春二月 일식이 일어나다
二十四年夏四月 이상한 새가 왕궁에 모여들다
二十八年春二月 왕손이 태어나다
三十一年夏五月 산상왕이 붕어하다
- ↑ 하지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는 고국천왕의 다른 이름이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를 따른 것. 하지만 진수의 《정사 삼국지》는 신대왕의 후계를 산상왕으로 본다.
- ↑ 《삼국사기》의 기록. 그런데 이건 또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는 동천왕의 이름으로 나오는데, 동천왕의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 ↑ 아버지 신대왕이 태어난때와 자신이 죽을때의 나이차이가 140여년이 난다. 그렇다면 위에 형이 발기, 고국천왕, 발기 이렇게 있다치고 아버지 신대왕이 늦게 장가를 갔다고 쳐도 90세다. 이리되면 아들 동천왕이 209년생인데... 나이 차이가 너무난다. 제위에 오른뒤 동천왕을 낳았으니 죽을 당시 나이는 50세 전후이거나 많이잡아도 60대다. 이리되니 태조왕에서 신대왕의 이르는 왕이 형제들이 아니라 아들과 손자라는 설이 맞아 떨어진다.
유레카! - ↑ 고국천왕에게 반기를 들은 큰 아들 발기拔奇와 한글 독음이 같다. 그런데 음차라는 걸 감안하면 동일 인물일 수 있으나, 세부 사항과 결말이 많이 다르기에 다른 인물로 여기는 것이 정설. 만약 둘이 동일인물이라면 고국천왕과 산상왕도 동일인물일 수가 있다...
- ↑ 처음 왕후 우씨는 왕이 죽자마자 발기에게 먼저 찾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왕의 죽음을 알지 못했던 발기는
형의 아내를 네토라레할까봐형이 자신을 떠보려는 줄 알고이름과 어울리지 않게거절하였고 하는 수 없이 발기의 동생인 연우를 찾아갔는데, 연우가 직접 고기를 써는 식으로가정적인 남자정중히 대접하다가 손이 다치게 되었는데 이를 본 왕후 우씨가 직접 치료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 ↑ 다만 발기가 망했긴 한데 산상왕도 이 일로 조금 망해버렸다. 발기가 산상왕의 처자를 다 죽여버려 산상왕은 10년 넘게 아들없이 지내야 했다.
- ↑ 해당 원문: 계수가 형제의 정을 버릴 수 없어 감히 그를 해치지 못하고 말하였다. “연우가 왕위를 사양하지 않은 것은 비록 의가 아니지만, 당신이 한때의 분함을 못 이겨 나라를 멸하려 함은 무슨 뜻입니까? 죽은 후에 무슨 면목으로 조상들을 뵐 것입니까?”
- ↑ 이렇듯 맏이 발기拔奇와 셋째 발기發岐는 여러 차이가 있다. 맏아들 발기는 연나부의 세력을 끌어모았고, 셋째 발기는 소노부의 세력을 끌어모았다. 맏이 발기는 바로 공손씨의 군대를 끌어들였고, 계수가 이기지 못해 고국천왕이 좌원에서 격파했다. 이후 맏이 발기의 최후는 요동에서 여생을 보냈다는 설과 고국천왕이 용서하고 투항을 받아들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맏이 발기는 배신하긴 했어도 그냥 말 그대로 '베신' 이지 셋째 발기처럼 군대를 이끌고 온 '변란'은 안일으켰으니 이런 얘기가 나왔을 수 있다. 또 고국천왕이 인자한 성격이었다고도 하니 맞을지도
- ↑ 을파소는 우씨의 갈굼 속에서도 산상왕의 후궁 간택을 지지한 몇 안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 ↑ 설화에 따르면 평민으로 추정된다.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는데 한 처녀가 떡으로 돼지를 사로잡으니 신하가 산상왕에게 즉각 알려서 몰래 바람을 피는걸 주선했다고 한다...
- ↑ 산상왕 5년에 "제발 아들 갖게 해주세요" ㅠㅠ 라고 기도했는데 그러고도 7~8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