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 1979년
일제강점기 경제학자로 지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1894년 전북 고창군에서 태어났다. 1912년에 수원으로 상경하여 농업학교 수학,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했으며, 1925년에 도쿄상과대학(現 히토츠바시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 연희전문학교 상과 교수로 재직하여 활동한다.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를 비롯한 사회경제사 연구 저술로 유명했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사관에 입각해 총독부 어용 학술단체인 조선사 편수회에서 주창하는 정체성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글을 여러편 기고했었다. 대표적으로 1920년대 중국에서 고조되었던 자본주의 맹아론에 영향을 받아 한국사의 마르크스주의적 5단계 발전론을 설정하고 한국의 자본주의 맹아에 대한 이론을 내세워 식민사관에 맞섰다. 이 일로 그는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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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운이 논문 쓴 조선사회경제사 일부 내용.
1930년대 중후반 무렵 들어 백남운은 경제학자로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자신을 따르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경제연구회라는 사회주의 성향의 학생동아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것을 빌미로 그를 잡아들여 2년여 남짓 투옥시켰다. 1940년 석방되었고, 그는 그 뒤 김광진 등의 학자들과 교류하는 것 이외에는 은둔하며 지냈다.
해방 이후에는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그는 남조선신민당을 결성해 정계에 뛰어들긴 했는데... 학자 이미지가 강한 백남운에게는 정치인으로는 부적격이었고, 정치 입지가 적어 끝내 입지를 마련하지 못했다. 특히 조선공산당의 박헌영과 여러번 심하게 부딪쳤다. 박헌영을 비롯한 정통공산주의자들은 백남운을 '사회개량주의자'라고 인식했을정도로 그를 극도로 경계했다고 한다.
1946년 11월에는 남조선신민당이 조선인민당, 조선공산당과 합당해 남조선로동당을 결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박헌영이 이끄는 남로당에는 가입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현실의 장벽 앞에서 회의를 느끼고 정계은퇴를 선언하기도 했다.
그 뒤 민족문화연구소를 꾸리고 문화운동에 활동하나, 정계은퇴 6개월 만인 1947년 4월 다시 정계복귀를 선언했고, 그는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글을 발표하고 나서 여운형과 합작해 근로인민당 창당에 동참했다. 1947년 5월에 근로인민당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되자 더 이상 조직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1947년 8월 들어 좌익 세력 검거 선풍이 불면서 백남운은 당원과 함께 검거되는 위기에 내몰렸다. 결국 백남운은 신변에 위협을 느껴 이듬해 1948년 남북협상을 계기로 월북을 결행하였다.
이후 북한에서 고위직을 역임하면서 활동하였다. 북한최고인민회의제1기대의원, 북한 초대내각 교육상,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마르크스 레닌주의방송대학총장 등을 맡았으나, 형식상으로 공직에 있었지 실질적으로 정치적인 발언은 거의 하지않고 지냈다.
연희전문학교 재직 당시 친우가 되었던,[1] 정인보의 납북을 주도하였다는 카더라 통신이 현대 한국의 사회주의 사학자들 사이에서 언급된다. 당시 환갑이 몇년 남지 않았던 정인보는 전쟁통에 감행한 월북의 여독으로 사망하였다고 해서, 그가 나중에 매우 후회하였다던가 뭐라든가. 이때 커다란 후회를 하였기 때문에 백남운은 정치적인 권한을 사적으로 쓰지 않게 되었고, 그래서 숙청을 모면하였다는 야사가 있다.
1979년에 사망했다.
2011년 10월 그의 손자(로 추정되는 사람)가 탈북했다.- ↑ 36년부터 38년 사이에 연희 전문학교에서 같이 재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