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진(북한)

s_2300526.jpg

金光鎭

1902년 ~ 1986년

1 개요

북한의 경제학자. 보성전문학교 상과 및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교수.

2 생애

1902년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에서 태어났다. 평양에서 중학교까지 졸업한 후,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상과대학(現 히토츠바시 대학)을 졸업하였다. 백남운의 동경상과대학 후배이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 1931년 9월 이강국 등과 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연구실 조수로 있었다.

보성전문학교의 시간강사를 맡아 오다 1932년 유진오, 오천석과 함께 보전 상과 전임교수로 임용되어, 1939년까지 경제사, 상업학 등을 강의하였다.

재직중 각종 강연회에 강사로 활동하고 '보전학회논집' 등의 학술지와 '동아일보' 등의 신문에 경제평론이나 조선경제사 관계 논문을 발표하였다. 좌익 경향이 심한 교수였기 때문에,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1939년 강단에서 물러난 뒤에는 평양으로 내려가 고무공장을 경영하였다. 광복 후 1945년 8월 17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가 결성되자 무임소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45년 8월 27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와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가 합작하여 평남인민정치위원회로 개편되자 상공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에서 1947년 사이에는 백남운을 통해 남한 학자들을 입북시켜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임용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일설에는 이때 김일성의 경제 교사였다는 말도 있다. 무식한 김일성이 무슨 말인지나 알아 들었을까?

1949년 5월에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교원으로 임용되었다. 1954년 과학원 후보원사, 같은 해 10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강좌장을 맡았다. 1957년 3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 부장교수가 되었다.

이후 1960년 11월 과학원 경제법학연구소 소장, 마르크스레닌주의 방송대학 정치경제학부 경제학강좌장, 과학원 상무위원 등을 거쳐 1963년 5월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64년 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장이 되었다.

1964년 6월 중국 북경(北京)에서 개최된 아시아경제세미나에 북한 학자 대표 중 1인으로 파견되었다. 정치활동으로는 1961년 5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 직책을 맡았고, 1972년 12월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73년 7월, 만 70세 생일에 즈음하여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6년 사망하여 평양시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3 학문적 업적

조선 후기와 일제 시기 경제사·운동사 및 정약용의 경제사상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화폐사, 재정사도 그의 연구분야였다.

맑스주의의 이론을 적용하여 조선 후기의 경제적 상태를 해명하면서, 한국 경제사에는 노예제 단계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1937년에는 '고구려 사회의 생산양식 - 국가의 형성과정을 중심으로'를 발표했다. 1949년에는 '조선민족해방투쟁사'의 일부를 집필했으며, 논문 '삼국시대의 사회구성에 관한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력사과학 1956년 5∼6월호)는 북한에서의 시기 구분 논쟁을 촉발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후 그가 일제시대부터 주장한 ‘노예제 결여론’은 북한 학계의 통설에서 고조선·부여·마한이 노예제 사회로 규정되면서 비판받았다.

1963년 김광순·변낙주와 함께 '조선경제사상사(상)'을 공동 집필하였다. 그 후 1973년에는 '조선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생'이라는 논문을 공동저술하였다.

4 스캔들

보성전문 교수 시절, 평양에서 체호프의 ‘앵화원’이라는 연극을 관람하였다가, 거기에 출연하고 있던 조선일보 기자 노천명에게 반하였다. 노천명은 시인 김기림의 구애도 칼같이 거절하였을 만큼 까칠하고 도도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김광진의 구애에는 흔쾌히 마음을 열었다. 평양의 개운사에서 처음 만난 이래 그들의 연애는 불꽃을 튀겼고 김광진은 곧 아내를 정리하고 노천명과 재혼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아내와 이혼을 협의하러 경성으로 간 김광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노천명은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쳐다보는” 신세가 되었다. 김광진의 동료 교수였던 유진오는 잔인하게도 이 스토리를 '이혼'이라는 소설로 써버렸다. 이에 격분한 모윤숙, 이선희 등 동료 여성 문인들이 모델을 밝히라며 유진오를 찾아가 삿대질을 하며 싸웠는데, 이러한 소동은 노천명의 수모를 세간에 더욱 더 널리 알려지게 만들었다.

더욱 황당한 것은, 김광진이 노천명에게 다시 돌아가지 않은 것이 아내와의 의리때문이 아니라, 기생 출신의 1930년대 인기 가수 왕수복때문이라는 데 있었다. 왕수복은 본디 이효석 죽기 직전의 마지막 연인이었는데, 1935년 실시된 인기투표에서 ‘목포의 눈물’ 이난영을 3위로 밀어내고 톱을 차지했을 만큼 당대의 스타였다. 그녀는 미모의 기생 출신이지만 유학을 떠나 음악을 공부하여 성악가가 됐으며, 평양의 대학 교수로서 종생했던 의지의 여인이었다. 그리고 이런 면모들은 무려 14살이나 연상이었던 김광진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1]

그 후 김광진은 보성전문 교수직을 그만두고 평양에서 고무공장을 경영하며 왕수복과 같이 살았다. 남북 분단 이후 김광진은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 교수가 되었고, 왕수복은 공훈배우가 되었다. 김광진은 1986년에 죽었고, 왕수복은 나이 여든에 김정일의 호의로 ‘독창회’까지 열고 2003년에 죽었다.
  1. 이걸 보고 노천명은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란 시를 지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