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 제9보병사단과 중공군 38군 소속 3개 사단이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벌인 전투로 한국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2 전투 전 상황
1952년 당시 철원 일대는 인근의 평강 김화와 함께 철의 삼각지대를 이루면서 유엔군과 중공군 인민군이 대치해 있는 곳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중공군은 작은 목표물로 큰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요충지를 찾아 노리고자 했고, 철원 북방의 395고지는 그들이 노리기 딱 적격인 장소였다.
당시 유엔군은 철원평야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철원 북방에 있는 395고지는 남동쪽으로 펼쳐진 철원평야 일대를 훤히 내다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즉 395고지 하나만 차지하면 철원 일대를 전부 위협할 수 있었던 것.
이런 상황에서 펼쳐진 중공군 38군의 공세를 맞이한 게 395고지 일대에 주둔해 있던 한국군 9사단이었고, 그렇게 해서 후일 백마고지라 불리게 되는 395고지의 전투가 시작되게 된다.
3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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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의 지형과 전투 전 9사단 30연대의 방어선 구축
중공군의 공세는 52년 10월 6일 새벽부터 개시, 395고지를 지키고 있던 9사단 30연대가 맞이하면서 10일간에 걸친 전투가 시작되었다.
중공군은 병력을 교대시켜 가며 집중 공세를 퍼부었지만 395고지는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395고지는 전체적으로 λ자 형태의 능선을 이루고 있는데, 이 때문에 중공군이 수적인 우위를 앞세워 측면공격을 시도했을 때는 ∧꼴로 된 능선 양쪽에서 십자포화를 맞고 패퇴했으며 결국 1자로 된 좁은 정면 능선을 따라 반복 공격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피해를 입어도 파상공세가 계속되면 결국 방어병력이 나가떨어질 수 밖에 없다. 한데 당시 9사단장인 김종오는 방어병력이 나가떨어지기 전에 빠르게 연대 단위로 395고지 일대 병력을 교체해 가며 전투를 치루었고, 빠른 교체를 위해 휘하 대대에 직접 명령을 내려 이동시키는 월권을 행하기까지 했다. 이 덕에 백마고지 일대의 9사단 병력은 전투력이 완전 소진되기 전에 교대해 가며 여력을 보충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9사단 예하 포병뿐만이 아니라 인근 미군의 포병부대가 총동원되어 지원에 나섰고, 미 공군의 지원까지 계속되었다. 거기다 백마고지의 동쪽 평야지대에는 한국군 53전차중대가 배치되어 있었고, 이들은 전투 내내 중공군의 측면에 정확한 직사포를 퍼부었다.
그런 상황속에서도 중공군은 395고지 정상을 수 차례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방어하던 한국군을 395고지 일대에서 완전히 축출하는데는 실패했으며, 고지가 뺏긴 와중에도 한국군은 능선 일대에서 재차 반격을 해 고지를 탈환해 냈다가 다시 중공군의 반격으로 빼앗기는 등 이 고지를 가지기위해 10일동안 국군과 중공군의 뺏고 빼앗기는 싸움이 반복된다.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10일동안의 전투기간 동안에만 고지의 주인이 무려 12번이나 바뀔정도로 치열했다고 한다.
그렇게 계속되던 고지점령싸움에 9사단이 휘하 병력을 총동원해 반격, 중공군이 공격의 교두보로 삼고 있던 백마고지의 북쪽 능선을 또다시 탈환해 중공군 전체를 백마고지 일대에서 격퇴해 내면서 비로소 끝이 났다.
4 결과
중공군은 14000여명의 사상자를, 한국군 3,396명의 사상자를 냈다.
현리 전투를 비롯해 온갖 추태를 보였던 한국군은 1951년 후반부터 부대 전체의 재교육 등 내실을 다지기 위해 힘썼는데, 백마고지 전투에서 사단 단위 병력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는데 성공했다.
395고지가 어떻게 해서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선 이런 저런 말이 많다. 395고지 일대에 전투 이전부터 말에 관련된 지형 명칭들이 많았다는 말도 있고, 포격으로 무너져 내린 능선 모양이 백마의 등을 닮아서란 말도 있는 등[1] 카더라만 많다. 백선엽 장군에 의하면 고지 자체는 백마의 형상이 아니지만 포탄이 착탄한 지점이 하얗게 드러났는데 멀리서 보면 백마 한 마리가 누워있는 형상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당시 전투를 보도한 기자들이 백마고지라고 칭하면서 기사들을 보냈고, 이후 이것이 정착되었다.
5 기타
이 전투에서 한국군과 미군은 21만 9954발, 중공군은 5만 5000발, 총 27만 4954발의 포탄을 쏟아부었다. 한국전쟁 중 단일 최다 포탄소비 전투.
전투 후반에 급하게 신병들이 보충되어 전투에 투입되는 와중에 제대로 병적 확인이나 인수 인계도 안 되고 전투에 투입되어 전사한 이들도 많으며, 이렇게 죽은 이들은 전사 확인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무명용사로 처리되어 유족들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 채 그대로 긴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현재 국립현충원에 계급과 이름 다섯 글자로 남아 있는 전사자들의 상당수가 이렇게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전사 여부를 확인할 수 없어도 포로 생활을 하다가 송환된 것이 아니면 원칙적으로 전사자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당시 소대장이었던 29연대 1대대 중화기중대장 대리 최현호(崔鉉鎬) 중위의 수기가 있다.
백마고지 전적지가 세워져 있으며 여기서 1.5km 떨어진 곳에 노동당사가 위치해 있다.
현재 백마고지는 5사단 관할. 근처 열쇠전망대가 있으며 신청하면 둘러볼 수 있다. 전망대 홈피
인터넷에서 가끔 도는 백마고지 전투영상이라고 나오는 외국 영화 장면이 있는데, 이것은 프랑스에서 제작한 디엔비엔푸 전투 관련 영화 장면이다.
80년대 초반 KBS에서 2부작 실록 6.25 특집 드라마로 백마고지 전투를 극화한적이 있는데 일반적인 반공물을 넘어선 수작으로 평가된다. 실제로 전차에 연기자를 태워서 포격지원 장면을 촬영한다거나 클라이맥스에서 육탄 3용사의 투혼이나 조금씩 참호를 파들어가면서 진격하는 장면을 그리는 등, 여러면에서로드 넘버 원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걸작.
한국군과의 전투를 거의 연전연승으로 자랑하는 중국군의 공식전사에서도 드물정도로 한국군의 승리를 인정하는 전투이기도 하다. 이후 백마고지의 부대가 나중에 전두환의 주구라는 걸 기록하는 경향이 있다.
중공군 38군은 전쟁 전부터 중공내 정예 부대였다. 한국전쟁 후 처음에는 삽질이 있었지만 결국 중요한 작전에 성공하여 중공군 사령관에게 "제 38군 만세!"라는 축전을 받는다. 이때부터 만세군으로 불릴 정도로 중공내에서는 최정예 부대이다.
당시 전투에 참전하신 분의 말에 의하면 야간에 백병전을 할 때 머리카락 길이로 피아 여부를 판별 했다고 한다. 중공군은 머리를 박박 깎았고 국군은 머리가 길었다고 한다. 야간에 전혀 안보이는 상태에서 한손으로는 눈앞에 있는 사람의 머리를 만지고 다른 손에는 대검을 들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상대방의 머리를 만져서 길면 살려주고 짧으면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대검으로 쓱싹~ 하는 것이다. 그러던 와중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위에 손을 턱~ 하고 올려서 만졌는데 순간 가슴이 철렁 했다고 한다. 왜냐면 그가 죽일 가능성이 50:50 이였으므로. 다행히 국군이였는지 자신을 놔두고 다른 사람 머리 만지러 떠났다고 한다. 그만큼 치열한 전투였다는 에피소드.
물론 실제 고지전 혹은 점령전 하에서 야간백병전은 피아식별이 되지 않는 총검이나 군용삽을 이용한 무차별적인 난투극에 가까웠기 때문에 걸러듣는게 좋다.
6 이 이름을 딴 것
6.1 백마고지역
2012년 11월 20일 개통한 경원선의 역.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7 스타크래프트 맵
백마고지(스타크래프트) 참고.- ↑ 그런데 당시 전투 상황에 대한 말들을 보면 정작 백마고지의 중앙 능선은 백마는 커녕 낙타능선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