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엔비엔푸 전투 | ||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일부 | ||
400px [1] | ||
날짜 | ||
1954년 3월 13일 - 5월 7일 | ||
장소 | ||
북베트남, 디엔비엔푸 일대 | ||
교전국 | 프랑스 제4공화국 베트남국 미국 | 북베트남 ● 지원국 소비에트 연방 중화인민공화국 독일민주공화국 |
지휘관 | 앙리 나바르 피에르 랑그레">">">">" /> | 보응우옌잡 레정탄 쭈후이먼 |
결과 | ||
베트남군의 승리 | ||
영향 | ||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종결 인도차이나 반도에서의 프랑스군 철수 베트남 전쟁의 서막 | ||
병력 | 1만 4천 명 | 6만 4,500명 - 전투원 4만 9,500명 - 지원 병력 1만 5천 명 |
피해규모 | 전사 2,293명 부상 6,650명 실종 1,729명 포로 1만 1,721명 항공기 229대 손실 전차 10대 손실 | 전사 4,020명 부상 9,118명 실종 792명 |
베트남어 : Chiến dịch Điện Biên Phủ(戰役奠邊府)
프랑스어 : Bataille de Diên Biên Phu
영어 : Battle of Dien Bien Phu
한자 : 奠邊府戰鬪
1 개요
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베트남(북베트남)과 프랑스(프랑스 제4공화국)간의 전투. 이 전투로 인해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철수하고 베트남은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다.
2 배경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는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 독립을 요구하는 호치민의 베트민[2]과 싸우고 있었다.
물론 화력면에서는 프랑스군이 압도적인지라 1951년 1월에는 하노이를 탈환하기 위해 육군 4개 사단을 투입한 베트민의 공세를 막아내고 1만명 수준의 사상자를 내게 만들 능력이 있었지만, 정글전과 게릴라전의 특성상 전투에서는 이겨도 전쟁 전반적인 측면에서는 야금야금 영토가 축소되던 상황이었다. 결국 베트민이 1953년에는 북부 지역을 거의 장악하고, 베트남과 중국의 국경지대를 완전히 장악한 후, 라오스까지 침공하려는 시도를 하자 라오스와 월남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인 디엔비엔푸를 선정하여 프랑스 육군 외인부대를 선두로 한 공수부대를 투하해서 지역을 점령한 후 요새를 건설하고, 해당 요새에 최대한의 병력을 모아 베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적을 유인하여 싸우려고 작정하였다.
프랑스 육군이 이런 전략을 세우게 된 이유는 다시 한번 베트민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줘서 전세를 되돌릴 필요가 있었으며,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요새를 거점으로 해서 빈약한 무장과 장비를 가진 베트민을 대상으로 전투를 벌인다면 화력에 강점이 있는 프랑스 육군이 쉽게 우세에 설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멍청하게 요새에 닥돌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적의 후방 거점이나 교통로의 요지에 병력을 공수강하시켜서 아군 요새를 만들면 적은 보급로 확보를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요새에 닥돌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3 시작
일단 프랑스 육군은 해당 작전을 위해 현지 주둔병력은 물론이거니와 본국에서 지원가능한 거의 모든 병력, 장비, 물자를 총동원했다. 그 이유는 계속 밀리는 상황에서 엉성하게 끌어모은 병력만으로는 당장 적지 한복판에 공수강하한다는 것 자체부터 무리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외인부대를 주축으로 한 정예부대가 결성되며, 그 숫자도 다 합치면 투입병력만 16,000명, 지원병력까지 합치면 2만명에 육박했다.
그리고, 이들을 위한 장비도 최대한 확보했다. 당장 요새를 건축하기 위한 각종 장비는 물론이거니와, 포병도 105mm 견인곡사포를 28문이나 확보했고, 심지어 전차도 경전차지만 M24 채피를 분해해서 수송기로 실어와 현지에서 조립하는 방법으로 10대를 확보했다. 여기에 더해서 요새를 지원할 항공전력도 프랑스 공군의 F8F 베어캣을 중심으로 한 270여대를 배치했으며, 수송기도 100대를 확보했다.
이런 식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침공부대는 1953년 11월 20일 2개 대대규모의 외인부대가 현지공수강하에 성공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순식간에 전체 병력을 공중으로 수송하는데 성공했으며, 즉시 비행장을 건설하고 비행장을 지킬 요새를 건축했고, 비행장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반경 3km 이내에 8개나 되는 전초진지를 탄탄하게 건축하고 병력을 배치했다. 그리고 이 때까지 발생한 손해는 지극히 미미했으므로 프랑스군은 한때지만 이미 작전이 성공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4 반전
그런데 사실 디엔비엔푸는 사방이 산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라 한번 고립되면 거의 탈출이 불가능한 지역인데다가, 애초에 공중에서 병력을 투하해서 만든 요새라 처음부터 프랑스가 지배하는 지역과의 육상교통로가 없었다. 그리고 육상교통로를 만들려고 해도 애초에 디엔비엔푸가 하노이 서쪽 300km에 위치한 국경지대이므로 만들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초기 작전을 마치고 한숨을 돌리고 나니 자동적으로 베트민군에게 포위된 상태였다. 사람이 절대 접근 불가라는 산악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당시 지휘관이었던 보응우옌잡 장군은 육군 제351공병포병(Engineering Artillery)사단에게 디엔비엔푸로 가는 도로 82km를 확장시키라고 명령했고, 사단 병력뿐만 아니라 민간인들까지 가세한 결과, 디엔비엔푸로 통하는 확장 도로가 완성되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베트민 병력들은 중기관총과 대공포, 야포 등을 손수 인력으로 옮기거나 혹은 부품 단위로 분해하여 정상에서 조립하는 식으로 설치를 하는 상상을 초월한 집념을 보여준다. 당시 베트민 육군은 자전거를 개조하여 수백키로그램의 군수물자를 운반하였는데 산악이동중에 타이어가 손상되자 헝겁을 말아 타이어대신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프랑스가 진지를 건축하는 동안 베트민군은 쓸데없는 전투를 삼가고 병력을 집중시켜서 51,000명의 대군을 편성했으므로 병력면에서도 공격자 대비 방어자의 승리 비율인 3대 1의 상황을 만든다. 그로 인해 '만에 하나 포위돼도 항공기로 물자 운반하면 끝.' 이라고 생각하던 프랑스군은 항공기들마저 대공포에 박살나며 상대방을 오만하게 판단한 결과로 그야말로 궁지에 몰린다.
또한, 디엔비엔푸에 있는 요새와 비행장[3]은 잘 건설해놓은 상태[4]였으나, 요새와 비행장을 수비하기 위해 외곽에 조성한 8개의 전초진지는 불안한 방어력을 가진 상태였으며, 특히 요새를 내려다보는 고지대에 배치된 병력과 장비의 수는 극단적으로 적었다. 원래부터 프랑스군이 생각한 요새의 방어력은 게릴라군이 운영할 수 있는 소형 박격포에 대응한 것이었지, 정규군이 운영하는 정식 대포의 집중사격을 견뎌낼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서 베트민측이 1954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반격을 시작하자마자 고지대는 순식간에 해방전선의 손아귀에 들어가버렸고, 외곽에 조성한 8개의 전초진지도 1주일에 1개씩 함락돼서 실질적으로 디엔비엔푸 요새와 가장 가까운 육상교통로를 가지고 방어력도 가장 좋았던 남쪽의 전초진지를 빼고는 몽땅 함락되고 만다.
덕분에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요새와 비행장은 관측시설까지 고지대에 마련한 해방전선측의 치열한 포격에 휘말렸으며, 결국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프랑스군은 거의 격멸당해서 실질적으로 더이상 전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곳을 지키기 위해 투입된 외인부대 병력도 전원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거나 도주하는 참패를 당했다.
물론 프랑스군도 놀고 있던 것은 아니라서 전투 초기에는 매일 10회 이상의 공습을 퍼붓고, 보급물자는 물론 하루 100명 이상의 증원병력을 낙하산으로 투입하는 등 지속적인 증원을 했다. 하지만 워낙 베트민군의 숫자가 많고, 정글과 산악이 합쳐진 지역에서 적이 정확하게 어디 있는지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관측과 정찰이 제대로 안된 상황에서는 답이 없었다. 게다가 베트민군이 투입한 중화기의 숫자도 많아서 요새의 화력으로는 대응하기도 힘들었다. 당장 대공포만 80여문 이상이었으므로 공습하는 프랑스 공군 항공기에 대해 맹렬하게 대응하는 바람에 전투가 진행되면서 프랑스측 항공 전력도 날로 축소되었다.
결국 비행장까지 돌입한 베트민군과 프랑스군간에 총검과 수류탄까지 동원되는 육박전이 벌어졌으며, 더 이상 버틸 수 없던 것은 프랑스군이었다. 2달에 걸친 공방전끝에 프랑스군은 10,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생존병력 8천여명은 1954년 5월 7일 오후 5시 30분에 전원 항복하였다. 포로 8천여명은 베트민 측이 가혹하게 맨 몸으로 장거리 이동을 하며 먹을 것도 거의 주지않고[5] 박대하면서 차례로 쓰러져 죽어가 살아남은 3천여명[6]만 조국으로 돌아갔다. 물론 베트민군도 23,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피해와 관계없이 승리한 것은 확실했다.
5 결과
무장 게릴라 단체로 시작해 정규군까지 도달하는 모든 단계를 밟은 非유럽권 독립운동이 현대 서양 점령자와의 대규모 회전(會戰)에서 승리를 거둔 최초의 전투.- 마틴 윈드로(Martin Windrow)
이로 인해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손을 떼기로 한다. 아직 병력상으로는 프랑스군이 더 많았지만, 이미 디엔비엔푸에서 정예병력과 물자, 장비를 몽땅 날려먹은 후라서 현지에 남아있는 병력은 전투의지가 바닥을 뚫을 정도로 크게 떨어지는 베트남 현지민이 주축이 된 민병대밖에 없었으며,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만한 물자와 장비, 자금이 크게 부족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미 공군의 B-29 수백대를 동원하여 북베트남군 지역에 융단폭격을 감행하는, 실질적으로 선전포고 없는 참전에 해당하는 일까지 검토했지만 이미 때늦은 일이라 포기해 버린다. 일설에는 이 폭격에 원자폭탄까지 사용을 고려했다는 루머도 있다.[7]
1954년 7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서 열린 회담을 통해 휴전협정이 조인, 프랑스군의 철수와 함께 북위 17도선을 휴전선으로 설정하고 합계 8km의 비무장지대를 설치하며, 2년내에 남북통합 선거를 실시한다는 합의가 나온것으로 8년여에 걸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그 막을 내린다.
하지만 프랑스는 1949년, 일본군의 통치 때도 등장했던 바오다이 황제를 수반으로 한 꼭두각시 정권인 베트남국(1949년~1955년)을 세워놨었고 이를 정통 베트남 정권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베트남에서 손을 뗀 프랑스에 뒤이어서 미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다.
이후, 디엔비엔푸가 재현될거라고 예견됐던 케산 전투는 미군의 무지막지한 항공지원으로 포위를 풀어버렸다.
디엔비엔푸 전투로 베트남이 사실상 독립을 쟁취하자, 프랑스의 여타 식민지에서도 거세게 독립운동의 불길이 타올랐다. 베트남에서 군사력을 소진하고, 전비로 경제가 엉망진창이 된 프랑스는 식민지들의 독립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1956년 튀니지를 시작으로 1960년까지 17개 아프리카 국가[8]가 독립하였다. 사실상 본토의 일부로 간주했던 알제리는 끝까지 지키고자 하였으나, 이곳 조차도 알제리민족해방전선과의 참혹한 알제리 전쟁에서 패전하고 1962년 독립을 인정하였다.
6 기타
베트남에서 제작된 FPS "7554"에서는 게임 타이틀 자체가 디엔비엔푸 전투가 끝난 1954년 5월 7일에서 따온 만큼 이 전투가 마지막 미션으로 등장한다. 미션 제목의 영문명이 "Global Impact(국제적인 충격)"...
- ↑ 디엔비엔푸 요새를 함락한 베트민 육군.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승리 당일 기념 사진 촬영을 까먹고 있다가 다음날에서야 정신 차리고 이 사진을 연출해 냈다는 설도 있다.
- ↑ 나이 든 세대들은 흔히 월맹이라고 부른다.
- ↑ 현재도 이 비행장은 공항으로 잘 쓰고 있다.
- ↑ 일부는 구 일본 육군이 쓰던 비행장을 재개조했다.
- ↑ 하루에 미숫가루를 1명당 1줌씩 주었다. 당연히 포로 학대라고 대들다가 개머리판으로 쳐맞고 피투성이로 치료도 해주지않아 그냥 죽은 포로도 속출했다. 베트민 측은 단두대로 베트남 저항군을 무작정 처형한 놈들이 무슨 포로 우대냐 라고 씹었다고 한다.
- ↑ 포로 교환 당시 이들은 그야말로 굶주리고 영양실조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반면에 베트민 포로들은 제법 잘 먹어서 대조를 이뤘다. 프랑스는 포로학대랍시며 항의했지만 베트민 측은 코웃음치며 무시했다.
- ↑ 이건 미국이 프랑스에 핵 무기를 지원해서, 프랑스 주도로 핵공격을 하도록 권유했던 역사적 사실과는 또 다른 문제이다. 이 경우의 미국은 말 그대로 전쟁범죄자 그 자체가 된다.
- ↑ 튀니지, 모로코, 기니, 니제르, 코트디부아르, 모리타니, 말리, 세네갈, 베냉, 부르키나파소, 가봉, 콩고, 중앙아프리카공화국, 토고, 차드, 마다가스카르, 카메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