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요
Containment Policy, 封鎖政策
미국의 20세기 대 공산진영 정책을 대표하는 정책
미국이 냉전시절동안 적국이자 라이벌이었던 소련의 세계에 대한 영향력을 줄이고 우위를 점하고자 실행하였던 대외정책이다. 미국의 외교관이자 정책관이었던 조지 F. 케넨에 의해 처음 고안되었고, 그 후 폴 니찌, 조지 마셜. 존 파스터 덜레스, 멕조지 번디, 헨리 키신저, 즈비뉴 블제진스키, 그리고 조지 슐츠 등 냉전 시대의 미국의 안보전략관들과 그들이 보좌한 대통령들에 의해 냉전이 종료될때까지 수없이 변형되고 바뀐 역사가 있다.
2 냉전 초기
2차대전 종료 후, 소련과 조금씩 차이가 틀어지던 미국은 소련에 외교관으로 파견되어있던 조지 F. 케넨에게 "얘네 왜이럼? 보고부탁함."이라 전보를 치고, 케넨은 왜 이제야 나를 부르지 투덜거리며 전보를 답송한다. 이게 그 유명한 "긴 전문Long Telegram". 요약하자면, 소련(러시아)은 오랜 외세의 침입에 의한 역사로 인해 다른 국가들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사실상 이성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산주의 진영은 하나의 거대한 세력이 아닌 작은 세력들로 쪼개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였다[1]. 또한, 소련에게 말의 논리는 모르겠지만 힘의 논리는 통할 것이라 판단하여 당근과 채찍을 계속 준다면 어느정도 길들이는게 가능할 것이라 판단했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자원은 무한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진영을 중요한 구역들과 외곽 구역들로 나눠야 하며, 중요 구역들의 방어만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참고로 한반도는 이 외곽지역에 포함되어있었다. 베를린 구호작전이나 터키 연안의 달다넬스 해협 시위 등은 이 봉쇄 정책을 기반으로 시행된 작전들이었다.
이것이 봉쇄정책의 초안이었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이 정책은 유지된다.
참고문서:
Long Telegram: 케넨이 미정부의 요청에 의해 미국에게 소련의 상황을 보고한 전보
Novikov Telegram: 마찬가지로 비슷한 시기 소련의 미국대사 니콜라이 노비코브가 소련에게 미국에 대해 보고한 전보. 내용은 얼추 비슷했다.
Mr. X Article (1947). 케넨이 Mr. X라는 가명으로 작성한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문서. 참고로 이 문서는 당시 가루가 되도록 까였었다.
3 한국전쟁발발에서 아이젠하워까지
하지만 1950년 전에 중국이 공산화되고 소련은 핵실험에 성공한다. 중국의 공산화는 예상 밖의 변수였고, 소련의 핵실험은 예상했으나 이렇게 빨리 성공할줄은 몰랐기에 이에 놀란 미국은 기존의 비교적 온화한 봉쇄정책을 버리고, 폴 니찌 (Paul Nitze) 등의 전략관들과 함께 NSC-68이라는 전략문서를 작성, 이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봉쇄정책을 세운다. 이는 기존의 정책과는 다르게, 공산진영은 하나의 거대한 진영으로 보며, 자유진영의 중요한 구역들과 외곽 구역들의 구분을 없앴다. 즉, 모든 구역들을 중요한 구역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반도의 운명이 판이하게 갈리는 시기였기도 한데, 한반도는 케넨의 봉쇄정책에 의하면 외곽지역에 속해있었다 (일본이 주요 지역이었다). 하지만 한반도 또한 미국의 방어선에 추가되었고, 이로 인해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시작하자, 미국은 즉시 대응하여 한국에 군사를 파견하며 결과적으로 한반도의 전쟁을 휴전의 순간까지 지원하였다. 결과적으로 한국전쟁의 휴전은 냉전을 안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트루먼 정권은 초기의 자유진영을 중요지역과 외곽지역으로 나누는 전략을 버리고 모든 지역을 보호하는 정책을 수용함으로서 기하급수적으로 방위비가 늘어나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트루먼은 이를 당시 크게 지지를 받던 킨지언(Keynesian) 경제정책으로 해결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아이러니하게, 오늘날 미국의 악명높은 군수산업복합체 (military industrial complex)의 시작은 리버럴 진영에서 시작된것이었다. 하지만 트루먼을 이은 아이젠하워는 이를 엄청난 세금의 낭비라고 판단하고, 상대적으로 구입비와 유지비가 싼 핵무기로 전력차를 메꾸려한다. 이는 특히 당시 핵미사일의 발전이 겹침으로서 가능해졌던 것이다. 또한 아이젠하워와 그의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수에즈 운하 사태 (Suez Crisis) 등에서 어느정도 유연하게 소련과 대처하면서 더욱 냉전은 안정화(stabilize)되어갔다. 하지만 이는 안정화였을 뿐, 근본적으로 소련과 대치하는 상황의 해결은 뒤로만 멀어져갔다.
4 존 F. 케네디의 봉쇄정책
케네디가 당선되기 얼마 전, 소련은 흐루쇼프라는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났다.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는 소련을 관리하던, 자신이 속한 트로이카 중 전 KGB국장이었던 라바렌티 베리아를 숙청하면서 권력을 장악했다. 그 후 그는 스탈린을 디스하며 새로운 소련을 추구한다. "We will bury you"라는 그의 말은 매우 유명한데, 그의 의도는 '우리가 만든 제품들의 산더미속에 너희를 묻어버리겠다'였지만, 흔히 '너희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겠다'(...)로 오인받고는 했다.
케네디는 젊고 왕성한 리더였다. 닉슨을 선거에서 꺾은 후[2] 대통령에 당선된 케네디는 여러차례 소련과 충돌위기를 겪게 된다. 동독이 서독으로 탈출하는 자들을 막기 위해 베를린 장벽을 세우며 베를린의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케네디는 뭔가 해보라는 빌리 브란트 당시 서베를린 시장의 독촉을 받고 (투덜거리며) 베를린으로 출발한다. 거기서 그는 그 유명한 "Ich bin ein Berliner (나도 한명의 베를린인입니다)" 연설을 하며 베를린인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게 된다. 이처럼 케네디는 한 카리스마 하는 지도자였다.
케네디의 당선기간동안 세계는 핵전쟁을 겪을 위기를 한번 넘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쿠바 미사일 위기이다. 자세한 사건의 경과는 해당 항목을 참고바람. 위의 흐루쇼프와 케네디는 다행히 이 사건에서 서로 전쟁할 의도가 없다는걸 파악하고 총부리를 돌리게 된다. 추가로, 만약 닉슨이 당선되었다면, 당시의 패배하기 싫고 승부욕 강한 닉슨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각자의 상상에 맞김.
케네디의 봉쇄정책은 아이젠하워와 덜레스와는 달리 여러명의 조언을 받으며 시행되었다. 쿠바 사태 당시에도 케네디는 여러명[3]의 조언을 받으며 사태의 경과를 지켜보고 지휘했다. 하지만 케네디 정권의 총체적인 전략을 짜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은 월트 윗먼 로스타우(Walt Whitman Rostow)였다.[4] 로스타우는 BSNP (Basic National Security Policy-기본 안보 전략)을 작성하였으며 케네디 정권의 봉쇄정책의 틀을 마련하는데 쓰였다.[5] 케네디는 미국의 안보에 대해, 어느 한 세력이나 세력의 연합들이 미국을 위협하지 못할때 보장된다고 믿었으며[6], 따라서 한 블락(bloc)이 미국을 위협하지 못하게 여러 국가들의 독립을 지지했다.
5 린든 B. 존슨의 봉쇄정책
6 닉슨, 키신저와 포드의 데탕트
7 카터와 블제진스키의 인권, 도덕 외교의 비상
8 레이건과 부시: 냉전의 종식까지
9 오늘날 남아있는 여파
10 관련 항목
11 참고서적
John Lewis Gaddis, Strategies of Containment. Oxford University Press
Christopher Llayne, The Peace of Illusions. Cornell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