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C. 마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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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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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 이오시프 스탈린조지 마셜1944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1947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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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 제임스 번스[1]조지 마셜1948 - 해리 S. 트루먼
< 1953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
1952 - 알베르트 슈바이처조지 C. 마셜1954 - 국제연합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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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George Catlett Marshall Jr.,
(조지 캐틀렛 마셜)
출생1880년 12월 31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사망1959년 10월 31일, 미국 워싱턴 D.C.
복무미합중국 육군(1902–1959)
최종 계급육군 원수
주요 이력미국 육군참모총장
주요 참전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주요 서훈노벨평화상
"True architect of Victory" - 윈스턴 처칠


인류 역사상 역대 최대의 대국적 전략가[2]
더 간단히 말하자면 미국에서 show me the money와 operation cwal를 친 사람 천조국의 소하 또는 관중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조차 데꿀멍해야 할 정도의 먼치킨. 조용한 인물이었던 오마 브래들리, 아이젠하워조차 마셜에 비한다면 연예인 정도의 진성 히든캐릭터인 인물. 이는 미해군이나 공군도 마찬가지인데 해군참모총장으로서 해군을 총지휘했던 어니스트 킹체스터 니미츠레이먼드 스프루언스와 같은 휘하 일선 지휘관들에 묻혀버렸고[3] 공군참모총장(당시는 육군항공대 사령관)으로 공군을 총지휘했던 헨리 아놀드커티스 르메이 등의 야전사령관에 묻혔다. 합참의장 윌리엄 리히 제독까지 가면 갓 입문한 밀덕들은 이름을 모르는 경우도 대다수.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육군참모총장으로 재직하면서 미국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전후에는 마셜 플랜(1947년~1961년)을 수립, 실행하여 유럽 부흥에 큰 공을 세웠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서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다.

마셜 제도와는 상관이 없다. 이 제도는 영국 탐험가 존 마셜의 이름을 딴 케이스.

1 생애

1.1 초기 이력

펜실베이니아주 유니온 타운시에서 태어났다. 1901년버지니아군사대학을 졸업하고 임관했으며 필리핀을 거쳐서 1917년에는 소령이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제1보병사단의 작전 및 교련 담당 참모로서 프랑스에 파견되어 1918년에는 유럽 파견군 최고사령부에 근무하며 작전계획 담당 참모로 활약했고, 이후 1919년에는 대령으로 승진, 유럽 파견군 총사령관 존 퍼싱 대장[4]부관이 되었다.

1.2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소령으로 복귀했다.[5] 전간기[6]에는 육군성에서 근무했으며, 주로 교련 프로그램의 입안에 종사했다.[7] 또한 국방대학의 교관으로 복무할 때는 3년동안 국민당 군사고문으로 파견되어 1차 국공내전을 직접체험하기도 했다.[8] 1923년에는 중령, 1933년에는 대령이 되었고 참모총장 후보에까지 올랐으나, 라이벌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의 후잡질 때문에 좌천당했다. 이후 1935년 맥아더가 물러나기가 무섭게 1936년준장으로 승진하면서 30여 년 만에 을 달았다.

1.3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39년에는 소장이 되었고, 곧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제15대 육군참모총장으로 지명됐다. 참모총장이 되며 순식간에 대장으로 승진우왕 굳, 유럽 반격계획(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입안, 지도했고, 이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며 연합군이 전쟁에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했다[9]. 1943년에는,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에도 선정되어 명성의 절정을 달렸으며, 1944년 12월 드디어 원수가 되었다. 2차대전 시기 육군 원수 중에서 웨스트포인트 출신이 아닌 인물은 마셜이 유일하다.

태평양 전쟁 중에는 남서 태평양 방면 총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나 태평양 함대 사령관인 체스터 니미츠 원수와는 달리, 소련이 일본을 치게 해야한다는 주장을 펴서 결국 소련군을 대일 전선에 끌어들였다. 1945년 8월 9일부로 말이다[10]. 전쟁이 끝난 후, 육군참모총장 자리에서 물러나며 예편(예비역 원수).

1945년 12월에는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중국 전권특사로 임명되어 국공내전에 개입하던 미국의 외교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장제스는 글러먹은 놈이니까 괜히 마오쩌둥 어그로 끌면서 우리 물자 소모할 필요가 없습니다. 버리시죠."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리고 4년 후, 마셜의 예언은 사실이 되었다.

1.4 군인으로서 업적

1939년 2차대전 발발때 미군은 17만 5000명의 조악한 숫자에 소총이 없어 모형총으로 훈련 중이던 군기 바닥의 군대를 단 6년 만에 830만이라는 잘 훈련된 군대와 12만 9천여 대의 항공기, 4천여척의 함정, 2천5백만 여대의 차량, 1억 2천만여정의 소총, 그리고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핵무기 2발을 보유. 전세계 6만 마일에 걸쳐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병참 밎 보급 시스템[11]을 구축한 희대의 먼치킨. 이 결과가 미 의회의 엄청난 반대를 이겨가며 그가 만들어낸 결과들이다. 스피치 100 오오.

아이젠하워, 맥아더, 브래들리, 패튼, 몽고메리 등의 연합군 명장들이 거두는 승리에는 마셜이 구축한 전략과 병참/보급 시스템이 뒷받침이 되었으며[12] 그가 쌓아온 시스템은 현대의 미군에게 아직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또한 아이젠하워, 브래들리를 발굴, 패튼이 사고쳐도 계속 돌격대장(?)질 할 수 있게 한 양반. 지휘 체계 일원화하는등 수없이 많은 업적을 쌓은 인물임에도 직접 전장에서 싸운 이력이 없어 정작 졸병대장이라 불린 브래들리한테도 밀리는 겸손함을 보였다. 비슷한 포지션으로 해군의 윌리엄 D. 리히, 어니스트 J. 킹, 육군항공대[13]의 헨리 아놀드가 있는데 마셜을 포함한 이 4인방은 2차대전기 합동참모회의를 주관하고 루스벨트를 보좌하며 실질적으로 전쟁을 주도했다. 직접적인 작전 지휘를 담당했던 킹 제독과 아놀드 장군, 최고 사령부 참모총장[14]으로 각 군대의 조율과 중재를 맡았던 리히 제독과 함께 병참, 군비 증강, 인사를 맡았다.

그의 업적을 찬찬히 뜯어보면 군비증강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의회를 설득하여 기하급수적인 군비증강과 전시경제체제로의 전환, 총력전 체제로 순식간에 전환했다.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2년까지 총력전체제로 전환에 성공했는데 정작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독일은 43년에서야 총력전체제로 전환했으니... 인사 부분을 보면 아이젠하워를 비롯하여 패튼, 브래들리, 공군원수에 오르는 헨리 아널드가 있고, 리히 제독을 최고사령부 참모총장으로 추천한 것 역시 그의 업적.

1.5 정치가

1947년, 국무장관으로 취임. 이 해 6월 5일 하버드 대학에서 열린 강연에서 나중에 「마셜 플랜」으로 알려지는 유럽 부흥계획을 발표했으며(11월 실행), 대 중국정책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1949년에는 국무장관에서 물러나서 미국 적십자사 총재로 취임했으나 이듬해에는 트루먼의 요청으로 다시 국방장관이 되었다. 역대 국방장관 중 非문민 장관은 마셜이 유일하다. 다만 원수 계급이 종신직이라는 점과 당시 해군과 공군이 예산과 항공전력, 핵무기 등의 문제로 으르렁대던 시기[15]라 이들을 통솔할 리더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특례가 인정된 것이므로 한국처럼 전역 1시간만에 국방장관 되는 행태와는 비교를 불허. 참고로 이때 국무장관이 바로 애치슨 라인을 선포한 딘 애치슨이었다. 당연히 6.25 전쟁이 발발하자 트루먼 행정부는 사방에서 뭇매를 맞았고, 트루먼 대통령은 마셜 총재를 구원투수로 콜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음 해 건강상의 이유로 국무장관직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1.6 개인사 및 기타

군인으로서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성격도 강직해서 다른 각료들에게도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다.[16] 오죽하면 "조지라고 불러도 되겠소?"라고 묻는 트루먼 대통령한테 "아닙니다, 각하. 마셜 장군으로 불러주십시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도 전해져 올 정도...

사실 이 사람도 치명적인 실수를 한 적이 있는데, 바로 진주만의 참극을 연출한 공로가 그것이다. 사실 마셜 장군만의 잘못은 아니었지만...[17]

같은 합참의 구성원이자 해군참모총장이던 어니스트 킹 제독과는 그야말로 견원지간이었다. 이는 유럽 및 대서양에 중점을 두던 마셜과 태평양에 중점을 두었던 킹의 성향 차이에 기인한 것. 하지만 마셜이 원래 과묵한 인물인지라 직접적으로 말싸움한 적은 드물다. 근데 사실 킹 제독과 사이가 좋았던 인물이 몇 없어서(...)[18]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4형제 중 홀로 살아남은(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제임스 라이언 일병을 구하는 미션을 최종 승인하는 육군참모총장으로 나온다. 배우는 하브 프레스넬.

앨라배마주 헌츠빌에 소재한 NASA의 조지 C. 마셜 우주센터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이곳은 관제센터인 휴스턴 LBJ 우주센터와 발사장인 케이프 커내버럴 케네디 우주센터만큼은 아니지만 로켓 제작과 테스트를 실시하는 곳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굉장한 인지도를 갖고 있으며 지역의 쏠쏠한 관광자원으로도 기능하고 있다.
  1. 트루먼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 소련 강경파.
  2. 마셜 원수가 구상한 전략들은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하는게 크게 공헌했다.
  3. 사실 해군에서는 마셜 장군보다 더한 사람이 한 사람 있다. 어니스트 킹의 이름 때문에 묻혀버린, 어니스트 킹의 상관에 해당하는 최고사령관 참모장 윌리엄 리히.
  4. M26 중전차에 이름이 붙은 그 사람 맞다. 조지 S. 패튼 장군의 은사이기도 하다.
  5. 전쟁 시기에는 전시 임관도 많았고 장교의 수도 부족했기에 승진이 빨랐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는 방대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없기에 군축을 단행하게 되는데 많은 장교들을 예편시키거나 전쟁 이전의 계급으로 강등시켜서 수요를 맞추는 것이 보통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계급 특진 참고.
  6. 프랑스의 포슈 장군이 말한 20년간의 평화. 1차 세계대전 종전일부터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날까지(1918년~1939년)를 가리킨다. 또 다른 말로는 해군 휴일.
  7. 이 때의 경험이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군을 빠른 시간안에 재무장시키고 훈련시키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8. 이때 국민당 정권의 부패상을 생생하게 목격한 마셜은 훗날 2차 국공내전을 맞이한 미국 정부에 중국 국민당을 버리라고 주문하게 된다. 결국 미국은 국민당한테 등을 돌렸고, 장제스대만으로 도망가게 된다. 대체역사물 떡밥으로 자주 거론되는 "궁지에 몰린 공산 잔당의 만주를 먹지 말라"라고 조언한 것도 마셜. 하지만 장제스는 듣지 않았다
  9. 아이젠하워는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연합군 전체를 지휘하는 자리에 있었다. 스포츠로 바꿔보면 감독(아이젠하워)과 단장(마셜) 같은 사이.
  10. 이때 일본에서는 "소련한테 전쟁 물자 좀 얻어봅시다. 이왕이면 내분도 일으켜보고. 안되면 소련한테 평화 회담을 주선해달라고 합시다"라고 제안했다. 물론 외교 담당자들의 반응은 "나치하고 편먹었던 우리가 소련한테 물자를 받는다고요? 거기에다 미국하고 소련을 이간질 시키겠다고? 머리에 총 맞았소?"총 안 맞아도 이미 정신이 나간 상태였지
  11. 나치독일이 독소전쟁기간 내내 광활한 러시아 영토로 인해 병참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것과는 극명하게 비교된다. 미국은 우월한 병참능력을 바탕으로 유럽의 독일과 태평양의 일본을 상대로 동시에 전 세계의 곳곳에서 양면전쟁을 수행할수있었다. 히틀러가 꺼려했던 양면전쟁을 미국은 거뜬히 해냈다.
  12. 그는 직접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 하려했으나, 루스벨트 대통령이 태평양 전쟁이 난 상황에서 이 모든 상황을 조율 할 수 있는 전략적 안목을 가진 장군은 마셜 밖에 없다며 지휘를 말리기도 했다. 오오
  13. 당시 이미 육군에서 반독립하여 실질적인 공군이었다.
  14. 최고 사령부는 합참의 전신. 리히 제독은 지금으로치면 합참의장.
  15. 해군 측의 인물이었던 제임스 포레스탈 초대 국방장관이 자살을 했고, 해군청장과 해군참모총장 휘하 수많은 제독들이 사표를 내거나 좌천, 불명예 제대를 각오하며 국방부에 항명하였다. 후세는 이를 제독들의 반란이라 기록하고 있다.
  16. 서양 문화권에서 상대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사적인 친분을 의미한다. 일본도 마찬가지.
  17. 사실 당시 어니스트 킹 제독과 이승만(진주만 공습 몇달 전에 《일본을 벗기다 Japan inside out》이라는 책을 써서 일본의 침공을 예언했으나 미국인들에게 비웃음당했다. 그러나 진주만 공습후 이 예언이 재평가되면서 이 책은 불티나게 팔렸다.)을 제외하고는 미국의 어느 누구도 일본따위가 미국을 공격하리라 생각할 수 없었다. 당시 미국은 고립주의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영국등에 밀리는 2류 국가처럼 인식되었는데 그렇다 해도 일본과는 넘사벽의 간극이 있었다. 또한 미국을 방문했던 이들로 인해 실제 미국의 경제력은 영국, 독일, 프랑스등 구 열강들에 비해서도 월등하다는 결론을 낸 상태였음에도 미국을 공격했다. 당장 연합함대 사령장관(즉 해군 총사령관)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마저도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하던 인물이었으니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8. 또다른 합참의 구성원이자 육군항공대사령관(공군참모총장)이었던 헨리 아놀드 장군은 킹 제독과 폭격전략으로 담판을 짓다가 뒷목을 잡았다(...) 또 킹 제독은 수하였던 태평양 함대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과도 의견이 상당히 갈려서 많이 싸운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