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문서: 중동전쟁
1 개요
Suez War
제2차 중동전쟁, 시나이 전쟁이라고도 한다. 이집트에서는 삼국 침략이라 부른다.
전쟁기간은 1956년 10월 29일 ~ 1957년 3월.
한때 세계를 호령한 양대강국 대영제국과 프랑스가 새로이 떠오른 미합중국과 소비에트 연방의 장기말 신세로 전락한 것을 전세계에 인증해버린 전쟁이기도 하다.
2 배경
1956년 7월 26일, 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양팔외교전략을 취했다. 미국과 서유럽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아스완 댐을 짓고, 소련과 무기 협정을 맺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무기를 도입하려 했던 것. 하지만 동유럽산 무기 도입 때문에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방측은 아스완 댐 건설비용 지원을 거부했고, 이에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한다. 이 수에즈 운하의 중요성은 문서 참조.
친소 노선을 펼치며 원래 자신들의 것이나 마찬가지던 수에즈 운하를 집어삼킨 이집트에 영국과 프랑스는 크게 반발하였고, 이스라엘 역시 자신들의 선박이 수에즈 운하 통과를 금지당하는데 크게 격분.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군사행동을 결의하였으며 이스라엘 역시 동맹으로 참가하게 된다.
사실 비단 수에즈 운하만이 이번 전쟁의 원인이 아니었다. 영국의 앤서니 이든 정권은 이라크에서 값싸게 석유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나세르가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나세르는 민족주의와 반식민주의, 범아랍주의를 주창하며 이라크에서 영국의 입김을 제거하려 들었고 영국은 이에 열받고 있었다. 프랑스의 기 몰레 정권 역시 나세르 때문에 환장할 지경이었는데 당시 한창 진행 중이던 알제리 전쟁에 나세르가 개입하여 반프랑스 게릴라들을 지원하고 있었고 프랑스는 이집트를 타격할 준비를 하는 한편 이스라엘에 프랑스제 최신 병기를 지원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나름대로 고민이 컸는데 당시 이스라엘은 호전적인 나세르가 선제공격을 해올 것이라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었고 당시 가자지구에서 양측간 계속된 제한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전과가 훨씬 크긴 했어도 이스라엘에 지속적으로 타격을 주는 팔레스타인 민족 게릴라인 페다이가 나세르의 지원을 받아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들 페다이에 의해 이스라엘의 한 키부츠 지도자인 로이 로스버그가 살해되는 일이 벌어지자 모세 다얀은 대국민연설을 통해 팔레스타인의 투쟁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정당한 싸움을 하는 저들이 어중간한 대응으론 절대로 우리를 모두 죽이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테니 유대인들이 살기 위해서는 외세의 간교한 평화협상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면서 투지를 불태웠다.
3 전황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의 삼국 외상은 셰브르에서 3자 회담을 벌였고 이집트 공격을 결의했다.
사실, 애초에 이 전쟁은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쳐서 싸우고 있으면 영국과 프랑스가 질서유지를 구실로 개입하는 구도로 진행되어야 했지만, 양측은 전쟁에 거의 개입하지 못했고, 이스라엘군이 혼자서 이집트를 거의 발라버렸다. 이스라엘 국경의 시나이 반도 방향에서 시작된 공세는 전선 중앙부와 남부 방향의 돌파로 일찍 전세가 결정돼버렸고 11월 5일,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고 시나이 반도의 최남단까지 모조리 점령하여 전쟁은 이집트의 완패로 마무리될 상황이었다. 여기에 영국 공수부대와 프랑스 외인부대가 도착하여 이집트는 완전히 발리기 일보 직전까지 갔지만... 소련이 핵무기까지 언급하며 여차하면 전쟁을 각오한 듯이 보였던데다, 미국 역시 이것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터인데다가 영국과 프랑스가 제멋대로 행동하는 탓에 삐진 상태였다.흥칫뿡,니들끼리 알아서 잘 해봐라 이는 당시 영국 수상 앤서니 이든이 수술 후유증으로 반병신이 된 상태에서 진통제에 취한 채 정책을 처리했던 것이 이 무슨 괴링도 아니고 병크의 주된 원인 중 하나. 당시 단단히 화가 나있던 미국은 소련이 무력을 사용해도 영국과 프랑스를 돕지 않겠다고 반협박을 했다. 그래서 UN의 중재로 1957년 3월 이스라엘군이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여담으로 이 전쟁 종결 뒤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이 핵전쟁의 위기에 닥치면 자신들을 보호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독자적인 핵전력 개발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2차대전 기간 중에도 많은 연구를 해 왔던 영국은 비교적 빨리 핵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으나 프랑스는 진도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먼저 핵클럽에 가입한 영국은 재빨리 자신들을 배신했던[1] 미국편에 붙어 프랑스의 핵개발에 딴지를 걸면서 가히 올챙이 시절 모르는 개구리란게 어떤 건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열받은 프랑스 정부는 조국의 핵무장을 외치면서 막나가기 시작한다. 이후 1960년 샤를 드골이 재집권하여 알제리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프랑스의 내정을 휘어잡으면서 프랑스의 핵개발은 가속화된다.
물론 유대인을 향한 테러 공격과 게릴라가 분명히 존재했고 이스라엘이 대응해야 했지만,이스라엘은 가자 지구 점령 당시에 이스라엘에 테러를 가했던 게릴라들을 색출한다는 이유로 무고한 민간인이 죽기도 했고 학살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유엔 소속의 의사들조차 그에 휘둘리기도 하였다.나중에 함마르셸드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 진위여부를 이스라엘에 추궁했고 이스라엘 크세네트(이스라엘의 국회)에서도 가자 지구 팔레스타인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 있었다는 어찌 된 일이냐고 청문회가 열리기도 했다. 외무장관 골다 메이어는 그런 것 없어염. 우릴 해방자로 반겨주던데? 하고 잡아뗐고 어디서 구라를 참모총장 모셰 다얀은 아랍인들이 선빵을 때려서 죽였다고 주장하였다. 정작 페다이의 수장이었던 노인은 2003년에 페다이들은 중동전쟁 터지고 죄다 이집트로 진작에 달아났었다고 회고했다. 페다이 혐의를 받고 죽은 사람들은 페다이와 친해서 떠벌리고 다녔던 사람들이라고. 어쨌든 유엔 감시단과 이스라엘의 합동 조사단은 300~500명 가량의 무고한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 군대에 의해 살해된 것만큼은 확실하다고 못을 박았다.
수상이었던 다비드 벤구리온은 미국에게 다른 건 몰라도 가자 지구만큼은 이스라엘이 확보하겠다고 억지를 부렸지만 퇴짜를 맞았다. 하지만 불과 11년 후에 제3차 중동전쟁으로.....
4 여담
냉전 초기에 핵을 둘러싼 동맹국의 위기와 소련의 핵을 동원한 무력개입 협박,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소련이 정말로 핵을 동원해서 무력을 사용했다면 미국이 과연 가만히 있었을까?"에 대한 논의 때문에 미국에서는 대체역사소설이나 첩보물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소재이다.
영화로도 제작된 레온 유리스의 <토파즈>에서는 수에즈 위기 당시의 프랑스의 병크와 반미노선, 소련에서 2차대전 때부터 심어둔 프랑스 고위층 첩자에 의한 작품으로 그리고 있다.
포스트 아포클립스 소설 <해변에서(On the Beach)>[2]에서는 수에즈 위기 때 소련에 대한 미국의 오인공격으로 핵전쟁이 벌어졌다고 묘사한다.
해리 터틀도브의 장편 대체역사소설 <The World of Difference>[3]에서는 미국과 소련 출신의 주인공 모두 수에즈 위기 당시 벌어진 아랍공중전에 참가한 파일럿 출신이라는 언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