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 ||||
9위 영음후(潁陰侯) 관영 | ← | 10위 양릉후(陽陵侯) 부관 | → | 11위 신무후(信武侯) 근흡 |
생몰년도 | ? ~ BC 190 |
이름 | 부관(傅寬) |
작위 | 양릉후(陽陵侯) |
시호 | 경후(景侯) |
초한쟁패기에 활약했던 인물.
본래는 위(魏)의 오대부(五大夫) 출신으로, 기병 지휘관을 하던 출신이었는데 이후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가신이 되었다. 횡양(橫陽) 땅에서부터 유방을 따르기 시작하여, 안양(安養)과 강리(杠里)를 공격하였다.
또 조분(趙賁)이 이끄는 개봉(開封)을 유방이 공격할 때도 함께 했다. 다만 함락은 실패했는데, 이에 유방이 북쪽으로 나아가 양웅(楊熊)의 부대를 격파할때도 함께하여 수급 20개를 베는 공을 세워 경(卿)에 임명되었다.
홍문연의 일이 있은 후 유방이 한왕에 봉해지자 부관은 공덕군(共德君)에 임명되었고, 우기장(右騎將)으로 승진하였다. 한신을 얻은 한군이 삼진을 평정하고 북진할때는 조음(雕陰) 땅을 식읍을 받았다.
초한전쟁 기간 중에는 항관(項冠), 주란(周蘭), 용저(龍且) 등 초군의 장수들과 교전을 벌여 초나라의 기병 장수 한 명을 죽이는 공을 세웠고, 이 때문에 식읍이 늘어났다.
이후에는 북벌하는 한신의 군에 배속되어 제나라를 공격하는데 한 몫을 보탰고, 조참(曹參)의 휘하에서 제나라의 남은 땅을 평정하는 공을 세워 양릉후(陽陵侯)에 임명되었다. 처음에는 제나라의 우승상이 되어 혹시 모를 전횡(田橫)의 반격을 대비했고, 5년 후에는 제나라의 상국이 되었다.
이후 초한전쟁이 끝난 후 진희(秦稀)가 반란을 일으킬 때는 주발의 부대에 예속되어 반란군과 격돌했다. 이후 대(代)의 승상이 되어 변방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 편안하게 노환으로 사망했고, 경후(景侯)라는 시호를 얻었다. 아들인 부정(傅靜)이 24년간 자리를 지키다가 죽은 후 부정의 아들인 공후(共侯) 부칙(傅則)이 자리를 이었는데, 이후 부칙의 아들인 부언(傅偃)이 자리를 이었다가 회남왕 유장의 모반에 연류되어 사형되어서 후국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