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흡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10위 양릉후(陽陵侯) 부관11위 신무후(信武侯) 근흡12위 안국후(安國侯) 왕릉
생몰년도? ~ BC 183
이름근흡(傅寬)
작위신무후(信武侯)
직위거기장군(車騎將軍)
시호숙후(肅侯)


중국 초한쟁패기에 활약한 한나라의 인물.

다른 공신들처럼 유방을 처음부터 따른것은 아니고, 중연(中涓)의 신분으로 완구(宛朐)[1]에서부터 거병을 해서 패공(沛公)이었던 유방의 부대에 합세하였다.

그 후에는 제양(濟陽)을 공격하고 이유(李由)의 군을 물리칠 때도 함께 했으며, 박(亳)의 남쪽과 개봉(開封)의 동북에서 진군을 공격하여 천인기장(千人騎將) 1명, 수급 57개, 포로 73명을 획득하여 그 공으로 임평군(臨平君)이라는 봉호를 받았다. 다시 남전(藍田)의 북쪽에서 진군과 싸워 거사마(車司馬) 2명, 기장(騎長) 1명, 수급 28개, 포로 57명을 획득했다.

이후 유방이 한왕에 봉해질때는 건무후(建武侯)에 봉하고 기도위(騎都尉)로 임명되었다. 유방이 삼진을 돌파할 때는 별동대를 이끌고 농서(隴西)에 주둔하고 있던 진나라 장군 장평(章平)의 군대를 격파하고 농서 예하의 6개 현을 점령했고, 이후 유방을 따라 동쪽으로 진군하여 팽성에 이르렀지만 팽성대전에서 한군이 캐관광을 당할때 함께 정신없이 털리고 만다.

팽성에서 패배한 후 한군을 배반한 왕무(王武) 등을 공격하고, 별동대를 이끌고 형열(邢說)을 격파하고 형열을 비롯해 병사 4180여명을 포로로 사로잡는 인상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4200호를 식읍으로 받고 별동대를 이끌고 조나라 지역에서 수차례 승리를 거두었고, 나라와 벌어진 싸움에서도 항관(項冠), 항한(項悍) 등을 물리치고 강릉을 공격하고 남군(南郡) 일대를 평정하였다.

유방이 초나라 왕이었던 한신을 사로잡을 때도 함께 했으며, 이후 신무후가 되었고 4600호를 받게 된다.

그 후 한왕 신의 반란을 토벌할때도 종군하여 거기 장군이 되었는데, 진희의 반란 때는 진희의 상국인 후창(侯敞)을 제압하고, 경포(黥布) 토벌전에서도 종군하여 공을 세워 5300호가 되었다.

특별히 임팩트는 없지만 행적을 보면 정말 정신없이 전투에 나섰던 인물. 특히 별동대를 이끌고 나선 싸움이 많았다.

평생동안 직접 90명의 머리를 베고, 32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별동대를 이끌고 14개의 적군을 무찔렀고, 59개의 성의 항복을 받았으며 한 개의 군(郡)과 국(國), 23개의 현을 평정했고, 제후왕[2]과 주국 각 1명, 2천석 이하에서 5백석에 이르는 관리 39명을 포로로 잡았다.

죽고 나서는 숙후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이후 근정(靳亭)이라는 아들이 후직을 이어 받았다가 법률을 위반해 백성들을 노역 시킨 정황이 드러나서 한문제 시절에 후국이 폐지되었다.
  1. 현재 산둥성 허쩌(荷澤) 부근
  2. 바로 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