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발(전한)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3위 선평후(宣平侯) 장오4위 강후(絳侯) 주발5위 무양후(舞陽侯) 번쾌

1 개요

생몰년도? ~ BC 169
이름주발(周勃)
작위강후(絳侯)
시호무후(武侯)
고향패군(沛郡)

중국 초한쟁패기, 전한(前漢) 한고조(漢高祖) 시대의 군인이자 정치가. 유방(劉邦)의 막료(幕僚)로 그의 천하통일에 공헌했다. 의 개국 공신. 이후 여씨를 숙청하여 유씨 천하의 안정을 가져온 인물.

2 출세길에 나서기 전

본래 패 땅에서 살던 평범한 사람으로, 이 곳은 현재의 강소성 지역인데 본래 선조는 현재 하남성 지역인 권(卷) 땅 출신이었지만 패로 집단 이주를 왔다고 한다. 누에를 치고 엮어 근근히 먹고 살면서, 남의 집 초상(初喪)이 나면 피리를 불러 위로 했다. 힘이 장사였는지 강궁을 다루는 재관(材官)이라는 병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만 해도 딱히 특색은 없었던 사람으로, 사마천은 아예 비루하고 소박한 사람이었고 재능은 범용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

3 반(反)진 전쟁

이후 유방이 거병하자 중연(中涓)[1]의 신분으로 유방을 따라 다니며, 이후 유방이 치루는 여러 싸움에서 앞장 서서 싸웠다. 하읍(下邑)을 함락시킬 때는 가장 먼저 성벽 위에 올라가는 용맹을 보여주기도. 이 공으로 오대부(五大夫)의 작위를 받았다. 주발뿐만 아니라 주발이 다루는 병사들도 다른 군졸들보다 용맹했는지, 개봉(開封)을 공격할 때는 주발의 병사들이 다른 병사들보다 더 많이 위험한 성벽 아래로 가장 빨리 당도했다고 한다.

이후 유방은 주발을 양비령(양비현의 현령)[2]에 임명하고, 그 이후에도 유방을 따라 종군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장사(長社)을 점령할 때 역시 가장 먼저 성벽에 올라갔다고 한다.

4 초한전쟁

홍문연의 일이 있은 후 유방이 한왕이 되었을때는 위무후(威武侯)라는 작위를 받았다. 유방이 삼진을 평정하면서 나설 때는 괴리(槐里)와 호치(好畤)의 전투에서 가장 많은 공을 세웠고, 조분(趙賁)과 내사(內史) 보(保)를 공격할 때도 가장 큰 공을 세웠다. 북쪽으로 진공하여 칠(漆)을 공략하고 장평(章平)과 요앙(姚卬)의 군사를 무찔렀다. 팽성대전에는 참여하지 않은 듯?

이후 서쪽의 견(汧)을 점령하고 곡역(曲逆)을 평정하면서 많은 공을 세웠는데, 항우가 사망하고 나서는 사수군(泗水郡)과 동해군(東海郡) 관하의 22개 현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다만 역시 한신과 같이 엄청난 공훈을 세운 조참보다는 초한전쟁 중 공은 밀리는 듯한 인상은 있다.

5 반란 평정

한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이후에도 주발은 계속 일선에 나서 전투를 지휘했다. 연왕 장도(臧荼)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유방의 군대에 종군하여 많은 공을 세웠고, 이로 인해 열후가 되어 8180호의 식읍을 받고 강후(絳侯)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한왕 신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유방을 따라 종군하여 무천(武泉)에서 흉노의 기병을 물리치고, 동제(銅鞮)에서 한왕 신의 부대를 격파하고 반란군에게 함락되었던 진양성 등을 수복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한군이 흉노 묵돌선우의 유인책에 속아 평성(平城)[3] 동북쪽의 백등산(白登山)에서 큰 곤경을 당한 백등산 포위전에서도 다른 장수들 중에서도 가장 큰 공을 세웠다. 백등산 포위전 자체야 완전히 포위되어 간신히 빠져나온 전투긴 하지만. 이때의 공으로 태위가 되었다.

진희(陳豨)의 반란군을 물리칠 때도 진희의 장수 승마치(乘馬絺)를 죽이고, 마읍(馬邑)을 함락시키고[4] 승리를 거두는가 하면, 노관(盧綰)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대활약을 했다. 반란군 진압에서 오히려 더 공을 세우는듯한 모습.

이리하여 평생동안 유방을 따라 전쟁터를 전전하며 상국1명, 승상2명, 장군과 이천석의 고관 3명을 포로로 잡고 별도의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2개의 군대를 격파했으며, 3개의 성을 함락시켰으며 5개의 군에 속하는 79개의 현을 평정하면서 승상과 대장 각1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6 말년

이렇게 대활약을 했던 주발이었지만, 유방이 사망하고 여후의 시대가 오자 그도 몸 조심을 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 왕릉은 주발과 진평(陳平)이 여후가 독단적으로 행동하는것을 견제하지 않는것을 비판하기도 했을 정도.

그렇지만 이것은 당장의 숨고르기에 지나지 않았다. 꾸준히 때를 기다린 주발 등은 결국 여후가 먼저 사망하자 손을 쓰기 시작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여후의 두 조카 여산과 여록(呂祿)이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역상의 아들인 역기가 여록과 친하다는 점을 이용, 역상을 협박 해서 역기를 유인하여 군사권을 내려놓게 했고, 이틈에 군사권을 장악하여 병사들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여씨들을 따르겠다는 군사들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유씨들을 따르겠다는 군사들은 왼쪽 어깨를 드러내라!"

이에 모든 병사들이 왼쪽 어깨를 드러내자, 주허후(朱虛侯) 유장(劉章)과 함께 여씨들을 척살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그는 한문제를 즉위시켜 다시 유씨의 천하를 부활시켰다. 이후 주발은 그 공으로 우승상의 자리에 임명되었고, 황금 5천금과 식읍 1만호를 얻었다.

하지만 이렇게 공을 세운 것 치고는 그리 깨끗한 말년은 보내지 못했는데, 문제가 즉위한지 한달 정도 지났을때 누군가가 주발에게 충고를 해주었다.

"여씨들을 주살하고 천자를 추대한 장군의 위엄은 천하를 진동시켰습니다. 그리고 장군께서는 많은 상금과 식읍을 하사 받아 신분이 더할 수 없이 높아지고 황제의 총애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이 상태가 오래 간다면 화가 몸에 미치게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주발은 불안한 느낌이 들어 스스로 직위를 반납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년이 지나 진평이 사망하자, 주발은 다시 올라와서 승상이 되었는데 10개월이 지나자 문제는 주발에게 넌지시 이런 말을 하였다.

"옛날, 내가 열후들에게 조칙을 내려 봉국에 부임하라고 했소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부임하고 어떤 사람은 부임하지 않고 있소. 승상이 내 말을 중하게 생각한다면 그들에게 솔선수범을 보이시오."

결국 주발은 그 말 한마디로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이후 주발은 위풍당당한 과거와는 달리, 자신이 숙청당하지 않을까 두려워 전전긍긍하며 불안감 속에 살았고, 항상 갑옷을 입고 지내고 따로 무장시킨 병사들을 거느리고 나서야 주위 사람들과 만났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주발이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 는 소문이 되었고, 결국 고발이 들어와 문제는 주발을 감옥의 옥리에게 보내 조사하게 하였다. 잔뜩 겁을 먹은 주발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전전긍긍했고, 옥리는 그런 주발을 더욱더 괴롭혔다. 결국 주발이 천금을 옥리에게 주자 이를 받은 옥리는 주발이 살 수 있는 방도를 넌지시 전해주었다.

당시 주발의 장남 주승지(周勝之)는 문제의 딸, 즉 공주를 부인으로 데리고 있었다. 이 관계를 이용하면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주발은 당시 태후였던 박태후의 동생 박소(薄昭)에게 많은 돈을 주었고, 박소는 박태후에게 "아니, 공주의 시아버지가 이런 꼴을 당하면 되나." 는 식으로 주발의 편을 들어주었다. 박태후는 황제가 문안 인사를 하러 자신을 찾아오자, 두건을 내던지며 그를 꾸짖었다.

"강후는 여씨의 난 때 황제의 옥새를 보관했고 북군의 군사들을 장악했음에도 모반을 꾀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한 개의 작은 현에 의지하여 반란을 꾀했겠소?"

이미 옥리와 주발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문제는 주발의 기가 완전히 꺾인 것을 보고 그를 손봐주는 일을 멈추기로 했다. 가까스로 풀려난 주발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고 한다.

"백만 대군을 지휘하던 장군의 신분이었던 나는, 옥리 한 사람의 권세가 그렇게 대단한 줄 몰랐다!"

이후 봉국으로 돌아가 사망했고 무후(武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 때 그런데 괴이하게도 아들인 주아부 역시 비슷한 말로를 당했다.

7 그 외 이야기

전형적인 화통하고 단순 화끈한 인물이라 성품이 강직했다고 한다. 딱히 배운 것도 없어 문학을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유세객들이나 선비들이 말을 좀 하려고 하면 "빨리 빨리 말하쇼!" 하며 재촉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왕릉이 여씨의 전횡을 보다 못해 따지고 들다 쫓겨나는 셈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처했던 일과는 달리, 은근히 끈질긴 면이 있어서 여후의 권세가 극심할 때는 참고 있다가 이후에 여씨를 쫒아내는 일에 성공했다. 이런 점 때문인지 유방은 평소에 주발에게 일을 맡길 만하다고 여겼다. 실제 유방은 유언에서 "왕릉은 우직해서 진평으로 보좌하게 해야 하는데, 진평에게만 일을 맡기면 안된다. 주발은 배운건 없지만 행동거지가 무겁고 믿음직하니 장차 유씨 왕조의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예언에 가까운 말을 했고, 이는 완벽하게 실현되었다.

유방이 처음 진평을 등용할 당시, 관영(灌嬰)과 함께 가장 거세게 반대했던 인물이 주발이었다. "그 놈이 얼굴은 잘생겼지만 단지 관에 매다는 아름다운 옥구슬에 불과하여 그 심성은 비어있는 놈이다. 반복무상한 간신배에 불과한 작자다." 라며 엄청나게 폭언을 퍼부었지만, 유방은 진평과 면담한 후 아랑곳하지 않고 진평을 썼다.

이후 여씨를 평정할 때는 보조를 맞추었는데, 이후 문제가 즉위할 당시에는 오히려 주발이 굴욕을 당하고 만다. 문제가 주발에게 "온 나라를 통틀어 일 년 동안 옥사를 판결하는 소송은 몇 건이나 되는가." 라는 질문을 하자, 주발은 "모르겠습니다."라고 답을 했고, "전국을 통틀어 일 년 동안 국가 재정으로 걷어들이고 지출하는 양식과 돈은 얼마나 되는가." 라는 질문도 "모르겠습니다." 라고 대답하며 부끄러워 땀을 뻘뻘 흘릴때, 진평은 같은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일을 맡아 하는 관리에게 물어보시면 될 것입니다. 폐하께서 옥사에 관한 일을 알고 싶으시면 정위(廷尉)를 불러 물으시고, 식량과 세금의 수입과 지출을 알고 싶으시면 치속내사(治粟內史)에게 물으십시오."
"재상이란 직위는 위로는 천자를 보좌하고 음양을 다스려 사시를 순조롭게 하며, 아래로는 천지 만물의 생육을 제 때에 자라게 하고 밖으로는 사방의 오랑캐와 제후들을 진무하며, 안으로는 백성들을 백성들로 하여금 황실에 의지할 수 있도록 어루만져 주고, 관리들을 감독하여 각기 자기의 맡은 바 임무를 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문제가 진평을 칭찬하자, 부끄러움에 어쩔 줄을 모르던 주발은 황제의 앞을 벗어나자 진평에게 "그런 대답을 알고 있었으면 왜 나한테 안 가르쳐 주었소!" 라며 따졌고, 여기에 대해 진평은 웃으면서 "나보다 윗자리에 있으면서도 그것도 몰랐나." 라고 대답했다.[5] 그 말을 들은 주발은 딱히 대답할 말도 없어 진평이 자기보다 재주가 뛰어나다고 인정했다. 이후 주발이 우승상을 그만두었기에 그때부터 승상은 하나로 통합되었다. 물론 그 자리는 진평이 차지했다.

한문제를 추대한 당사자였지만, 여러가지 일화를 보면 문제를 굉장히 두려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주발도 문제 앞에서 꽤나 위세가 당당했지만, 원앙(袁盎)이 황제에게 이 문제를 제기한 다음부터는 완전히 잡혀 살았다.[6] 주발은 이 때문에 원앙을 꽤 미워했지만, 정작 주발이 가장 위급한 상황이었을 때 원앙이 도움을 주었다. 주발이 역모 혐의로 옥리에게 고문을 당할 당시, 유일하게 주발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며 무죄를 주장한 사람이 바로 원앙이었다. 이후로는 아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가의(賈誼)가 개혁을 주장할 당시에는 "어린 놈의 색히가 뭘 아는 척을 하냐"는 식으로 욕을 퍼부어 가의가 개혁을 못하게 하기도 했다.

사마천은 이렇게 평론하였다.

「강후 주발은 처음 미천한 신분이었을 때 비루하고 소박한 사람이었고 재능은 범용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이윽고 고조를 따라 천하를 누비고 다니다가 장상의 자리에 오르고 다시 제려(諸呂)가 난을 일으키려고 하자 주발은 다시 한 번 나라를 바르게 세웠으니 비록 이윤(伊尹)이나 주공(周公)이라 한들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 사기, 강후주발세가(絳侯周勃世家)
  1. 조참 역시 처음에 중연으로 유방을 따라 다녔다.
  2. 호비령이 되었다고도 한다.
  3. 현재 산서성 대동시(大同市)
  4. 이때의 표현이 도(屠) 마읍이라, 마읍을 함락하고 학살이 일어난듯 싶다.
  5. 당시 주발은 우승상으로 최고의 자리였고, 진평은 좌승상으로 두번째 직위였던 상황.
  6. 그 이전부터 원앙의 형인 원쾌와 주발이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주발은 더 원앙에게 화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