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541년 4월과 544년 11월에 열린 백제와 가야의 국가회의. 이를 "임나 부흥회의"나 "임나 재건회의","임나 복건회의"등의 표현으로 사용되나 가치중립적인 개념으로 "사비회의"라고 쓴다.[1]
국내 사서인 《삼국사기》등에는 기록되지 않으며 《일본서기》흠명기(欽明紀) 2년(541) 4월조와 5년(544) 11월 조에만 이러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2 1차 사비회의
삼국시대 당시 가야연맹은 백제와 신라에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는 불쌍한(...) 동맹체였다. 백제와 신라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에 가야연맹 초기를 제외하고는 자주적인 모습을 찾아볼수가 없었다. 일본서기 등에는 당시 가야에는 영향력이 센 세력의 병력이 가야 내 성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던 중 금관가야와 탁순국이 신라에 편입된 되었고 신라는 가야연맹에 위치해 있던 구례산성에 주둔한 백제 군사를 물리쳐서 쫒아낸다. 백제는 가야연맹 일대에 대한 영향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안라국은 그 기회를 살려 백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백제가 설치했던 왜신관의 인원을 친안라 왜인 관료들로 재편성을 하였다. 이를 안라왜신관(安羅倭臣官)이라고 부른다. 540년 경에 설치된 안라왜신관의 관료들은 안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왜신인 이쿠하노오미, 기비노오미, 차후치노아타히와, 안라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가야계 왜인인 이나사(移那斯), 마도(麻都)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안라국은 이 안라왜신관을 이용해 신라와 왜의 연락선 역할을 하여 가야 연맹제국이 신라와 백제로부터 자주권을 행사하였고, 그 결과 안라국은 후기가야연맹의 지도국이 되었다.[2]
신라는 진흥왕이 540년에 즉위하여 신라의 영토확장을 주도하고 있었고, 백제는 성왕이 사비천도이후 백제의 부흥을 꿈꾸고 있었다. 그리고 백제와 신라는 팽창방향을 가야연맹으로 잡았다. 하지만 북쪽으로 고구려가 버티고 있던 상황이라 신라와 백제는 가야 지역에 대한 무력동원은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라와 백제의 팽창정책에 두려움을 느낀 반파국과 안라국은 신라에 2~3차례에 걸쳐 회의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백제에게 회의를 요청, 백제가 받아들여 백제의 수도인 사비에서 회의가 계최된다.
541년 4월. 안라(安羅.안라국/함안군),가라(加羅.고령가야/고령군),졸마(卒麻.함양군),산반해(散半奚.초계),다라(多羅.합천군), 사이기(斯二岐.부림),자타(子他.진주시) 등 가야지역의 7개 국가들의 한기(旱岐.가야 소국의 왕들)과 안라왜신관 관리, 가야연맹을 대표하는 집사(執事.가야연맹의 대표자격 사신)들이 백제에 모였다. 이들은 상시 운영되는 기구는 아니었고 대외적인 국가 중대사가 있을때만 결성되는 임시 회의체다. 이곳에서 가야연맹의 집사들은 가야연맹의 독립 보장과 백제와 화친하게 되면 예상되는 신라의 침공에 대한 우려를 전달했다. 하지만 성왕은 백제는 이미 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만약 신라가 쳐들어 오면 도와주겠다는 말만 남기고 물건을 준후 이들을 돌려 보냈다. 성왕은 신라보다 먼저 가야를 속국으로 삼겠다는 전략이었다.
3 1차사비 회의 이후
가야 연맹은 자신들이 원하는 말을 듣지 못하자, 신라와 다시 접촉했지만[3] 결려되었고 결국 1차 사비회의는 실패로 돌아갔다. 543년 11월, 한반도에 온 왜국 사신은 안라왜신관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고 이는, 백제가 뺏은 안라국의 군령, 성주를 왜신관에 귀속시켜야 된다는 주장을 한것이었기에 백제측의 입장으로썬 불만일수 밖에 없었고, 안라국은 외교활동이 성공적이라고 평가할수 있었다.
불만이 쌓인 백제는 이 모든 내용들에 대해서 지킬수가 없다고 밝히고 이 모든 문제는 안라에 있는 왜신관 관리들중 친 안라 왜인들인 가후치노아타히, 아나사, 마도등을 쫒아내려고 하였고 이 문제를 이유로 가야에 회의를 요구했다.
하지만 가야 연맹은 "543년 12월에, 정월초하루에 사비로 가겠다", "544년, 정월에는 신께 제사를 지내는 기간들이라 제사를 마치고 가겠다.","왜신관경(倭臣館卿)이 허락하지 않았다. 왜신관경은 왜왕이 허락하지 않았다"등등의 이유로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자 백제는 544년 3월에 왜에 사신을 보내 반백제정책의 주도자인 아나사와 마도의 추방을 요구했다. 하지만 왜왕은 이를 거절했다.
4 2차 사비회의
왜와의 교섭에서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하자, 왜에 보낸 사신이 복귀했다는 이유로 가야 연맹에게 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이번엔 거부할 구실을 찾지 못하자 가야 연맹은 응할수 밖에 없었다. 544년 11월에 안라, 가야, 졸마, 사이기, 산반해, 다라, 자타, 구차(久嗟)등 8국의 대표들과 안라왜신관의 관리가 백제로 향했다.
백제 성왕은 이 회의에서 임나(가야연맹) 보호를 위해 "신라와 안라의 경계지역인 함안 동북쪽의 낙동강변에 6성을 쌓고 왜 병사 3천과 백제군을 주둔하는 대신 비용도 백제가 대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는 백제가 신라를 압박하면서 창원의 탁순로를 다시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백제의 군령, 성주를 내보낼수 없는 것들은 가야와 왜의 교류를 막기위해 그런게 아니라 고구려와 신라의 공격에 대비해서 어쩔수 없이 내보낼수 없다"는 핑계를 대었다. 그리고 "일부 왜신관을 왜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임나 건립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왜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등을 이야기하며 가야에 압박을 가했다.
성왕의 제안에 가야연맹의 집사들과 왜신관의 왜인들은 "일본대신(日本大臣.왜신관의 대신인 이쿠하노오미) 및 안라왕, 가라왕의 3인이 답해야 한다"라며 최종 답변을 미루었다. 이는 완곡한 거절의 표현이었다. 이로써 2차 사비회의도 결렬되었고 이는 가야, 백제, 왜는 공존할수 없음을 발표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5 2차 사비회의 그후
545년~547년까지 백제는 가야연명의 세력가들에게 중국의 선진 문물을 나누어 주고, 왜에는 기술자와 학자들을 연이어 파견한다. 왜는 548년 1월에 백제에게 왜 병사를 보내줄것을 약속하였다. 백제 - 왜 연합군이 안라국 6성에 주둔하게 되면 안라국은 백제의 속국이 되는 것이 확정적인 상황이 되자 안라국은 고구려와 손을 잡았다. 이를 알게된 백제는 왜를 의심하게 되고 왜왕에게 파병을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왜는 자신은 이 사건과 상관 없는 상황이라며 안라왜신관의 이나사와 마도에게 고구려에 사신을 보낸 이유를 촉구하며 백제의 편을 들었다. 결국 안라국은 백제에게 대항할 방법이 없기에 빠른속도로 백제의 속국화가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