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dth=50 백제의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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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성왕(聖王)/성명왕(聖明王) | |
성 | 부여(扶餘) | |
휘 | 명농(明襛) | |
생몰년도 | 음력 | 492년?~ 554년 12월 |
재위기간 | 음력 | 523년 5월 8일 ~ 554년 12월[2] (32년) |
내가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
목차
1 설명
개로왕과 함께 전쟁터에서 목이 잘린 백제의 두 왕중 한 명. 전사한 것만 치면 책계왕도 추가된다. 김무력 장군에게 무력으로 죽은 백제의 왕
그리고 아신왕 급의 근성가이.
성왕이란 왕명은 불교의 전륜성왕에서 따온 것이다. 금석문으로 볼 때 성왕이라는 호칭은 살아있을 때부터 불렸던 것 같다.《양서》(梁書) 백제전에는 이름을 명(明)이라 하였고,《일본서기》에는 명왕(明王) 또는 성명왕(聖明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상하게도 《삼국사기》보다 《일본서기》에 더 많은 기록이 나오는 왕이기도 하다.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기는 성왕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 물론 《일본서기》답게 성왕이 긴메이의 신하처럼 기록을 해 놓았지만, 왜곡 이면의 관계는 사실 그 반대였다고 추정된다. 《일본서기》에는 장수왕의 남하로 한강유역을 빼앗긴 백제의 왕으로서 백제의 세력권인 가야를 재건하고 고구려에게 복수하려는 집념의 소유자로 그려진다. 마지막에 허무하게 죽는 장면과 아들인 위덕왕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자책하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지식이 영매(英邁)하고 결단력이 있어 나라사람이 성왕으로 칭하였다."라 하였고《일본서기》에는 "천도지리에 통달하여 그 이름이 사방에 퍼졌다."라고 찬양하고 있어서 그의 인물됨됨이가 비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능력도 있었고 꿈도 높았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비운의 왕.
2 업적
523년 음력 5월에 부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며 그해 음력 8월 패수(浿水)에 침입한 고구려군을 장군 지충(知忠)으로 하여금 물리치게 하였다. 524년 양(梁)나라 고조(高祖)와 국교를 강화하여 양 고조로부터 지절도독백제제군사수동장군백제왕에 임명되었다.
525년 음력 2월에 신라와 서로 사신을 교환하였다. 526년 음력 10월 웅진성을 수리, 수성하였다.
529년 음력 10월 고구려 안장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북쪽 변경에 있는 혈성이 함락되었다. 성왕은 좌평 연모(燕謨)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3만을 이끌고 싸우게 했지만 오곡원(五谷原) 전투에서 패하여 전사자가 2천여 명이나 되었다.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뒤 신라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공동으로 대처하였다.
2.1 사비 천도
동성왕·무령왕이 웅진 초기의 정치적 불안정을 수습하면서 추진해 온 왕권강화정책을 계승하여 538년(성왕 16)에 사비(泗沘)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성왕의 사비 천도는 고구려의 남침이라고 하는 외부세력의 강요에 의하여 행해졌던 웅진 천도와는 달리 성왕의 의도적인 계획하에 단행된 것이다. 따라서 이 사비 천도는 왕권과 국력강화정책의 마지막 마무리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비 천도에는 사비 지역의 토착 신진 세력이었던 사씨(沙氏, 沙宅氏) 가문의 정치적 지지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미륵신앙을 이용해 자신을 미륵이라 칭하며 궁예? 권력을 강화하고 백제의 전성기를 다시 열었다.
2.2 다른 나라와의 교류와 불교
사비 천도 후 국호를 일시 '남부여(南扶餘)'라 개칭하여 부여의 후손으로서의 전통을 강조하였다.[3] 그리고 중국의 양나라와 빈번한 교류를 가지면서 모시박사(毛詩博士)·공장(工匠)·화사(畵師) 등을 초빙하고 열반등경의(涅槃等經義)를 수입하여 백제 문화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크게 힘썼다.
또한 성왕은 인도로부터 범어(梵語)로 된 5부율(五部律)을 가지고 온 겸익(謙益)을 우대하여 고승들을 모아 5부율을 번역시키고 아울러 담욱(曇旭)·혜인(惠仁) 등이 지은 율소(律疏) 30권에 친히 비담신율서(毗曇新律序)를 써서 백제신율을 성립시켰다. 성왕의 이러한 계율의 장려는 불교 교단의 정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달솔(達率) 노리사치계(怒唎思致契) 등을 일본에 파송하여 석가불금동상 1구,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권을 보내어 줌으로써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게 되었다. 이밖에도 성왕은 의박사·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선진문물의 전수자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2.3 관제정비
이와 더불어 사비천도를 전후하여 웅진시대 이래 행해졌던 내외관제를 정비하여 지배체제의 정비와 통치질서를 확립하였다. 중앙관제로는 1품 좌평(佐平)에서 16품 극우(克虞)에 이르는 16관등제와 전내부(前內部) 등 내관 12부와 사군부(司軍部) 등 외관 10부로 된 22부제가 정비되었다.
또 왕도의 통치조직으로서는 수도를 상부·전부·중부·하부·후부의 5부로 구획하고 5부 밑에 5항(五巷)을 둔 5부5항제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지방통치조직으로는 종래의 담로제(檐魯制)를 개편하여 전국을 동방·서방·남방·북방·중방의 5방(五方)으로 나누고 그 밑에 7∼10개의 군을 두는 5방·군·성(현)제를 정비하였다.
이와같이 중앙관제와 지방의 통치조직을 정비함으로써 성왕은 정치운영에 있어서 귀족회의체의 정치적 발언권을 약화시켜 왕권중심의 정치운영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2.4 외교와 국방
성왕은 국제관계에도 힘을 기울여 전대부터 유지되어온 신라와의 동맹관계를 그대로 지속함으로써 고구려의 남진압력에 대항하여 나갔다. 그리고 양(梁) 및 왜(倭)와의 외교관계를 유지하면서 무역과 이에 따르는 문화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백제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
한편, 성왕은 숙원의 과제라고 할 수 있는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탈환 작업에 나섰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는 551년에 백제군을 주축으로 하여 신라군과 가야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을 일으켰다.
이 연합군은 북진하여 백제군이 먼저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 지금의 서울)을 공격하여 격파함으로써 기선을 제압하여 고구려군을 패주시켰다. 그 결과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을 회복하였고 신라는 한강상류의 10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드디어 고토회복.
또한 반로국[4]등을 위시한 가야연맹을 사비회의를 통해 영향권 안에 넣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가야연맹 No.2인 안라국을 무력화시켰다. 외교적으로 고립된 안라국은 고구려와 손을 잡았으나 동예인까지 박박 긁어모아온 고구려군을 독산성 전투에서 나제연합군이 대파하기도 했다. 이 때까지는 진흥왕도 쾌히 수천의 원군을 보내주는 등 나제동맹이 아직 유효한 것처럼 보였다.
3 신라와의 갈등
한편 성왕은 백제의 영토였던 도살성과 백제가 점령한 금현성을 모두 신라에게 빼앗겼음에도 눈감아 주었는데 이건 당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원군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듬해인 551년에 신라와 힘을 합쳐 백제가 한강 하류를, 신라는 한강 상류를 공략하는데 성공하나, 결과적으로 상류를 차지한 신라가 서진해서 하류까지 모두 차지함으로써 나제동맹은 파기되고 백제의 고토회복도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성왕은 신라에게 복수할 것을 다짐한다.
다만 신라가 백제가 주둔하고 있는 한강유역을 쳤다는 것에는 여러 반론이 있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한 백제가 본의아니게 어쩔 수 없이 스스로 한강유역을 포기하자 신라가 이 공백을 놓치지 않고 한강유역으로 진출하였다는 설이 대표적. 임용한이 이 설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 이 설에서 주장하는 백제가 한강유역을 버린 이유는 1)북쪽의 고구려와 동남쪽의 신라 양측으로 압박을 받게 되는 점, 2)신라는 남한강의 상류에 있어 유리하고, 백제는 평야지대라 한강에 주력병력을 둔다면 자칫하면 사비성이 며칠 안에 아작날 수 있다는 점 등 지리상의 불리, 다시 천도할 수도 없고 3)한강유역을 회복하면 왕권이 강화될 것을 우려한 백제 귀족, 호족들의 한강 유역 개발 비협조 등이다. 결국 성왕이 어쩔 수 없이 한강 유역을 포기하고, 이를 신라 진흥왕이 놓치지 않고 '잘 먹겠습니다' 하고 한강 유역을 점령하였다고 본다. 일본서기에도 백제가 이 땅을 버렸고, 이로 인해 신라가 그곳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고 적혀있고,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그 땅을 "빼앗다" 라고 하지 않고 "거뒀다" 라고 표현해 전투가 없었음을 간접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아직 확정된 설이 아니다. 상기한 임용한 교수의 경우 대체로 군사 지리적인 면에 포커스를 맞췄지만, 백제는 대중국 교류권을 위한 교두보로서 한강 유역을 차지하여야 했고[5] 따라서 불리함을 감안하더라도 쉽게 포기할 수 있는 땅이 아니다. 물론 한계를 넘는 세력권이라면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 밖에 없겠지만.[6] 게다가 한강유역이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식량 생산량이 어마어마한 곡창지대였다. 백제는 전라도 지역을 항시 차지하고 있었으니 신라에 비해서는 중요성이 덜하기는 하지만, 국방문제 외에 경제문제에서도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또한 마찬가지의 이유로, 신라는 기여에 비해 중요도가 떨어지는 남한강 상류만을 차지할 수 있었기에 신라가 한강 유역을 선제공격할 당위성 역시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7]
게다가, 앞에서 언급된 백제가 한강유역을 포기한 이유를 양면압박으로 들고 있는데, 이는 신라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오히려 더 심각하다. 신라사 한강유역을 먹을 경우는 이 압박이 훨씬 심하다. 지도를 보면 간단하게 알 수 있듯이, 백제가 한강유역을 먹으면 동남쪽의 신라가 거슬리더라도, 그 신라의 남서부를 압박함으로서 신라의 한강유역에 대한 견제를 해소할 수 있지만,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면 이곳을 백제가 한강 유역에 압박을 넣을경우는 신라의 한강유역을 뒤에서 받쳐줄 지역이 아예 없다.[8]
3.1 관산성 전투
신라의 한강하류 점령으로 백제의 실지회복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자 성왕은 553년 딸을 신라 진흥왕에 시집보내 진흥왕의 장인이 됐다.[9]이는 잠시간의 화친을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554년에 일부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보복을 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시집간 딸의 운명은… 이 신라보복군에는 가야와 일본의 원군도 합세하였다. 백제의 이와같은 군사동원으로 양국간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전투의 절정은 관산성 전투였다. 그런데 관산성 전투의 경과 및 성왕이 죽음을 맞는 과정이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본서기》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諡曰<聖>.32년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시호를 성이라 하였다.[10]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조
十五年, 秋七月, 修築<明活城>. <百濟>王<明 >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 <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于都刀{高干都刀}> ,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 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15년 가을 7월, 명활성을 수축하였다. 백제왕 명농이 가랑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 각간인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이들과 싸웠으나 불리하게 되었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주병을 이끌고 와서 이들과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공격하여 백제왕을 죽였다. 이 때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 대승하였다. 이 싸움에서 좌평 네 사람과 장병 2만 9천 6백 명을 참하고,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조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의 내용에 다소 차이가 있는 듯하다. 신라본기에서는 정상적인 교전에서 신라군이 3만명 정도로 이루어진 백제군의 진영을 무너뜨리고 성왕을 죽인 것으로 보이지만, 백제본기에서는 성왕이 야간에 50명만을 거느리고 신라군을 공격하려던 중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관산성 전투항목 참조.
일본서기에 기록된 성왕의 유언은 "짐은 매양 뼈를 깎는 고통을 참아왔다. 더 구차히 살고 싶지 않다."
《일본서기》에는 일설로, 사로잡힌 성왕은 참수되었으며 몸은 백제로 돌아갔지만 그 목은 신라 왕궁 북청 계단 밑에 묻었다 전해진다.[11] 《일본서기》에는 유독 신라를 미워하는데, 사실은 《일본서기》가 백제의 관점을 그대로 자신들의 관점으로 바꿨다는 의혹을 가지게 만드는 점 중 하나다. 성왕을 사로잡은 부대 지휘관이 금관가야계이며 김유신의 조부인 김무력(金武力)이다. 가문이 그야말로 백제의 원수였다.
4 사후의 영향
이러한 패전의 결과로 국내 정치정세도 심대한 영향을 받아 동성왕 이후 성왕대까지 확립되어가던 왕권중심의 정치체제가 귀족중심의 정치운영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1세기 이상 신라와의 사이에 맺어졌던 나제동맹 관계는 이 싸움 이후부터 완전히 결렬되었다. 이리하여 양국은 최후까지 적대적으로 대결하는 불구대천 원수 관계로 빠져버리게 되었으며, 이는 한반도에 있어서 삼국의 역학관계의 성격을 결정짓게 되었다. 오히려 백제는 신라 타도를 기치로 내걸며 그동안 주적이었던 고구려와 점차 화친, 나아가 동맹을 맺게 되었고 더 나아가 고구려는 그동안 관심을 갖지 않았던 백제의 동맹국인 왜와도 손을 잡기 시작했으며 신라는 수나라, 당나라에 친하려 하는 등 그 반대가 된다. 원래 외교라는게 어제의 적이 오늘은 친구가 되는 것이 현실.
5 그 외
불상인데 무섭게 생겼다
威德戀慕父王像 所造顯之尊像卽 救世觀音像是也。위덕왕이 부왕상을 연모하여 만들어서 나타낸 존상이 구세관음상이다.
《성예초(聖譽鈔》[12]
- 호류사 몽전에 보관되어 있는 목제 구세관음상. 성예초에 따르면,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이 성왕을 기리기 위해 그의 모습을 본따 제작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는데[13] 녹나무로 만들어서 그 위에 금박을 입힌 이 목제 관음상은 실제로 가보면[14] 성인 남성 키와 비슷할 정도로 큰데 높이 179.9cm에 달한다.
성왕의 키가 179.9cm가 아닐까? 왕도 루저!
6 매체에서의 등장
서동요(드라마)의 프롤로그에서 신라군에게 잡혀 목이 잘리는 장면만 나왔다. 배우는 안석환. 그 뒤 영상물에서 볼 일이 없다가 제왕의 딸 수백향에서 태자 시절의 남자주인공으로 등장했는데 배우는 서동요에서 무왕을 연기했던 조현재가 다시 한번 백제왕역을 맡아 앳돼 보이고 많이 어설프던 그 때에 비해 부쩍 남성미와 연기력이 늘어날 걸 볼 수 있다. 캐릭터는 공적인 면에서 냉철하고 유능하면서도 한편으론 지나치게 입이 짧고 깔끔을 떤다. 맘이 있는 여주를 자꾸 골탕먹이며 사지로 내모는 츤데레속성도 보이고 있다. 성왕(제왕의 딸 수백향) 문서로.
7 삼국사기 기록
一年夏五月 성왕이 즉위하다
一年秋八月 좌장 지충이 고구려를 패수에서 격파하다
二年 양 고조가 왕을 책봉하다
三年春二月 신라와 서로 예방하다
四年冬十月 웅진성을 수축하고 사정책을 세우다
七年冬十月 좌평 연모가 고구려와 전투하여 패배하다
十年秋七月 별이 비 오듯 떨어지다
十二年春三月 양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공하다
十二年夏四月 형혹성이 남두 성좌를 범하다
十六年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칭하다
十八年秋九月 장군 연회가 고구려 우산성을 공격하다
十九年 양에서 모시박사 등을 보내주다
二十五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二十六年春一月 고구려가 예와 공모하여 독산성을 공격하다
二十七年春一月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 지르다
二十七年冬十月 양에 사절을 파견하다
二十八年春一月 장군 달기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하다
二十八年春三月 고구려군이 금현성을 포위하다
三十一年秋七月 신라가 동북 변경을 획득하여 신주를 설치하다
三十一年冬十月 왕의 딸이 신라로 시집가다
三十二年秋七月 성왕이 죽다
신라보다 고구려와 더 많이 싸웠다.
이는 위의 내용을 봐도 유추할 수 있는게, 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싸웠던 왕이기 때문. 하지만 한강유역 수복 이후엔 신라에게 뒤통수 맞았고, 이에 복수하려다 실패했다.
7.1 일본서기 기록
일본서기의 내용들은 모두 교차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애초에 일본서기의 편찬 목적이 "역사를 기록한다"보다는 "우리나라 킹왕짱! 세계 최고의 나라라능!" 정도의 프로파간다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
- 524년 정월 : 백제 태자 명이 즉위하다.
- 529년 3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항구를 내려달라 요청하다. 안라회의에 사람을 보내다.
- 530년 9월 : 안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모야신을 사로잡다. 5성을 취하다[15]
- 531년 12월 : 백제군이 안라에 진출해 걸탁성을 쌓았다.
- 531년 5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다.
- 541년 4월 : 성명왕이 임라의 한기들에게 덴노의 뜻을 전하다.
- 541년 7월 : 성명왕이 임라에 신하들을 보내다. 그리고 덴노에 부한과 일마의 정사를 아뢰다.
- 543년 9월 : 덴노에게 공물을 바치다.
- 543년 12월 : 임라와 일본부의 집사들을 불렀으나 이들이 응하지 않았다.
- 544년 정월 : 임라와 일본부의 집사들을 불렀으나 이들이 응하지 않았다.
- 544년 정월 이달 : 임라와 일본부의 집사들을 불렀으나 낮은 이들을 보내왔다.
- 544년 2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조서를 받아오다.
- 544년 3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다.
- 544년 11월 : 임라와 일본부의 집사들을 불러 임라 재건을 도모하다.
- 545년 5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다.
- 545년 9월 : 덴노에게 장육불을 만들어 바치다.
- 546년 정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 546년 6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조공를 바치다.
- 547년 4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다.
- 548년 정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 548년 4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 548년 6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 548년 윤7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 548년 10월 : 득이신에 성을 쌓았다.
- 549년 6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낻.
- 550년 2월 : 일본에서 사신이 오다.
- 550년 4월 : 일본 사신이 돌아가다. 고구려 노비 7명을 바치다.
- 551년 12월 : 덴노가 보리 씨앗 1,000곡을 하사하다. 성명왕이 백제, 신라와 임라의 병사들을 이끌고 고려를 정벌해 평양을 토벌했다.
- 552년 5월 :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하다.
- 552년 10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이해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다.
- 553년 정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다.
- 553년 6월 : 일본에서 사신이 오다.
- 553년 8월 : 일본이 사신을 보내다.
- 553년 10월 : 백제 왕자 여창이 고려군과 싸워 이기다.
- 554년 정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다.
- 555년 2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다.
- 555년 3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 555년 5월 : 일본 수군이 도착하다.
- 555년 12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전투에서 패해 목이 베어지다.
7.2 관련 항목
- ↑ 이 표준영정은 일본 호류사에 위치한 복제구제관음상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 ↑ 554년 7월에 사망한 것은 《삼국사기》의 기록. 《일본서기》에 따르면 12월에 사망한 것으로 나타난다.
- ↑ 고구려와의 경쟁의식에서 비롯된 걸로 추정된다. 또한 참고로 백제는 부여를 북쪽의 살기 좋은 국가로 표현하는 일이 잦았다.
- ↑ 흔히 알려진 이름으로는 "대가야"
- ↑ 대체 경로로 당진을 이용하긴 했으나 당시 항해 수준은 연안항해이므로 한강유역이 몇배는 유리하다.
- ↑ 바꿔 말하면 위 주장은 백제의 당시 상황이 그러한 지형적 불리함으로 인한 문제가 백제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다는 주장이고 반론은 감당할 만했을 것이다란 차이일 뿐이다. 즉 항강 유역 차지의 당위성 자체가 저 주장 자체를 타파하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
- ↑ 위 항목과 마찬가지로 당위성이 반론 자체로 여겨지긴 힘들다. 선제공격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사실만 증명할 뿐이다. 성왕의 복수 다짐 역시 신라가 선제공격했기 때문이 아닌가 할 수도 있겠지만 동맹국이 전쟁의 결과로 획득한 이익을 전부 차지했다는 점은 무혈입성이든 신라가 공격한 것이든 백제측에서 반감을 가지는 건 당연한거라 오히려 즉시 공격에 나서지 않았고 혼인관계까지 맺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선제공격이 아니라 백제가 사정상 물러난쪽에 더 힘이 실리는 근거가 된다.
- ↑ 그러나 이 경우는 평면적인 세력도만을 고려한 주장이다. 한강 상류영역으로 철수 후 방어를 펼치다 원군이 도착하면 반격에 나설 수 있다는 점이나 험준하다고 까지 할 수는 없으나 남쪽에서 올라오는 세력을 어느정도 막을 만한 지형은 동남쪽에 충분히 있다. 게다가 저 반론(반론 자체가 신라가 먼저 공격했을 가능성이 낮다는 주장의 반론임에 주목하자)의 논거 대로라면 역시 신라가 선제공격을 했을 이유도 같이 사라진다. 즉 양면 포위가 근거가 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오히려 당시 다른 이유로 백제가 사정이 나빠서 물러난걸 신라측이 낼름 먹었다쪽에 신빙성만 올라가는 셈.
- ↑ 성왕 쪽이 진흥왕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심지어 성왕의 아들 위덕왕 부여창이 진흥왕보다 열 살이나 더 나이가 많다.
- ↑ 백제본기의 관산성 전투에 대한 언급은 이게 전부다. 관산성이라는 이름이나 저 50명 이외의 다른 군사들의 존재는 전혀 언급이 없다.
- ↑ 백제 유민 사이 돌던 소문일 가능성이 높으며,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 군주제 시대에는 보통 적국 군주라도 어느 정도 대우해주는게 동서고금의 보편적 현상이었으며, 무엇보다 왕궁을 매번 다녀야할 지배층이 소름 끼쳤을테니 말이다. 일본서기기록에 성왕의 목을 베기 전에 일단 절부터 올렸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적이라도 국왕은 고귀한 혈통이며, 그러한 사람의 목을 계단 밑에 묻어서 아무나 밟도록 만들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 ↑ 15세기 초에 호류사에 머물렀던 승려인 성예가 남긴 책.
- ↑ 쇼토쿠 태자를 본땄다는 설도 있다.
- ↑ 일본의 비불이기 때문에 특정 날에만 공개한다. 구제관음상의 경우 매년 봄(4월 11일~5월 18일)과 가을(10월 22일~11월 22일)에만 공개.
- ↑ 등지리모라(騰利枳牟羅)‧포나모라(布那牟羅)‧모자지모라(牟雌枳牟羅)‧아부라(阿夫羅)‧구지파다지(久知波多枳) 위치는 불명이나 대구에서 창령에 걸치는 지역으로 보는 설과 창원 북부에서 영산 밀양 일대의 성이라는 설도 있다. 아부라는 현풍 방면, 구지파다지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성산동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