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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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역대 국왕
22대 문주왕 부여도23대 삼근왕 부여삼걸24대 동성왕 부여모대
시호삼근왕(三斤王) / 삼걸왕(三乞王) /
임걸왕(壬乞王) / 문근왕(文斤王)[1]
부여(扶餘)
삼걸(三乞)
생몰년도음력465년(?) ~ 479년 11월 (약 15세)
재위기간음력477년 9월 ~ 479년 11월 (3년)

백제의 23대 건길지

1 치세

三斤王 【或云壬乞】文周王之長子

삼근왕은 【혹은 임걸이라고도 한다】문주왕의 맏아들이다.
ㅡ 《삼국사기

삼근(三斤)은 임근(壬斤)의 오기라고도 하며 《일본서기》에는 문근왕(文斤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주왕해구에게 살해당한 뒤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후 해구에게 휘둘려 주체적인 국정운영을 하지 못했다. 해구가 신흥세력인 은솔 연신(燕信)과 대두성에서 반란을 일으키는데, 왕이 좌평 진남(眞男)에게 명령하여 군사 2천 명으로 토벌하게 하였으나 패하였다. 다시 덕솔 진로(眞老)에게 명하여 정예 군사 5백 명을 거느리고 해구를 공격하여 죽인다. 연신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그의 처자들을 체포하여 웅진 시장에서 목을 베었다.

재위 3년인 479년 봄과 여름에는 가뭄이 매우 심했고, 11월에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이것은 해씨 세력을 무너뜨린 진씨 세력의 정치적 변란으로 추정된다. 혹은 동성왕이 후환을 없애기 위해 어린 삼근왕을 제거했을 가능성도 있다.

유라쿠 덴노 23년(479) 여름 4월 백제(百濟)의 문근왕이 죽었다. 천왕이 곤지왕(昆支王)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인 말다왕(末多王)이 어린 나이에 총명하므로 칙명으로 궁궐에 불러 직접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근하게 조심하도록 타이르고 그 나라의 왕으로 삼았다.[2] 그리고 병기(兵器)를 주고 아울러 지구시국(筑紫國) 군사 500인을 보내 자기나라로 호위해 보냈는데, 이 사람이 동성왕(東城王)이 되었다.

이 해 백제(百濟)에서 바친 조부(調賦,공물)가 평상시보다 많았다. 츠쿠치(筑紫)의 아찌노 오미(安致臣)· 우마카히노 오미(馬飼臣) 등이 수군을 거느리고 고려(高麗)를 쳤다.
ㅡ 《일본서기

여하튼 이후 백제에선 다시 진씨 세력이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그 구심점이 해구를 토벌한 진로(眞老)다. 이 사람이 삼근왕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얽혀있으리라 추정된다.

2 삼국사기 기록

一年秋九月 삼근왕이 즉위하다
二年 해구의 반란을 진압하다
二年春三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三年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다
三年秋九月 대두성을 두곡으로 옮기다
三年冬十一月 삼근왕이 죽다

2.1 상세 기록

三斤王【或云壬乞】文周王之長子。王薨 繼位 年十三歲。軍國政事一切委於佐平解仇。

삼근왕은【혹은 임걸이라고도 한다】문주왕의 아들이다. 왕이 붕어하자 왕위를 이으니 이때 나이 13세였다. 군사 임무와 나라 정사에 대한 일체의 권한을 좌평 해구에게 맡겼다.

二年春 佐平解仇與恩率燕信聚衆 據大豆城叛。王命佐平眞男 以兵二千討之 不克。更命德率眞老 帥精兵五百 擊殺解仇 燕信奔高句麗 收其妻子 斬於熊津市。

2년 봄, 좌평 해구가 은솔 연신과 함께 무리를 모아 대두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좌평 진남에게 명하여 군사 2천으로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질 못하였다. 다시 덕솔 진로에게 명하여 정예 군사 500명을 거느리고 해구를 공격하여 죽이게 했다.연신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그의 처자식을 체포하여 웅진 시장에서 목을 베었다.

論曰。春秋之法 君弑而賊不討 則深責之 以爲無臣子也。解仇賊害文周 其子三斤繼立 非徒不能誅之 又委之以國政 至於據一城以叛 然後再興大兵以克之 所謂履霜不戒 馴致堅氷 熒熒不滅 至于炎炎 其所由來漸矣。唐憲宗之弑 三世而後僅能殺其賊 况海隅之荒僻 三斤之童蒙又烏足道哉。

사관은 논한다. 춘추의 필법에 군주가 적에게 시해되었는데 토벌하지 않으면 심히 이를 꾸짖었으니 이는 신하다운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해구가 문주왕을 시해하였는데도 그 아들 삼근이 즉위하였으나 능히 이를 참형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또한 그에게 국정을 맡기고 결국 일성에 의거하여 모반하게 만들고 그런 뒤에야 다시 크게 군사를 일으켜 이를 토벌하였으니, 소위 서리를 밟을 때 경계하지 않았다가 굳은 얼음을 얼리는 데 이르게 하고 불이 반짝 거릴 때 끄지 않고 있다가 불길이 심하게 타올라 올 때 이르러 덤비는 것과 같으니 그 연유하는 바가 점점 더 해가는 것이다. 당헌종을 시해한 자도 삼대 이후에야 겨우 (잡아) 죽일수 있었는데 바다 모퉁이(海隅)의 황량하고 궁벽한 곳(荒僻)의 삼근 어린애가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三月己酉朔 日有食之。

3월 초하루 기유일에 일식이 있었다.

三年 春夏大旱。

재위 3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秋九月 移大豆城於斗谷。

가을 9월 대두성을 두곡으로 옮겼다.

冬十一月 王薨。

겨울 11월. 왕이 붕어했다.

아버지도 재위기간이 3년이었는데, 아들도 재위기간이 3년 밖에 안 된다. 역시 기록이 부실한 편이다.
  1. 일본서기》의 기록
  2. 일본서기인 만큼 걸러 들어야 한다. 애초에 여긴 일본이 세계 킹왕짱 나라고 중국도 자기들 밑에있다고 기술해 놓은 역사서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