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구

1 심해 밑바닥의 깊은 계곡

해구(海溝, Trench)는 해(바다)의 구(도랑), 즉 바닷속에 있는 길고 좁은 도랑이라는 뜻. 물론 동네 좁은 도랑 규모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매우 깊은 수심의 크고 긴 도랑을 가리킨다.
지구의 표면을 이루는 지각은 지각판으로 나눠져 있는데, 이 중에 대륙판과 해양판이 충돌할 때 대륙판은 상승하고 해양판은 하강하여 형성된다.
대표적으로 북마리아나 제도에 있는 유명한 마리아나 해구, 일본 열도 동쪽에 있는 일본 해구가 있다.

2 백제 비류왕대의 대신

解仇
생몰년 미상

백제 비류왕대의 귀족으로 대성8족중 하나인 해씨 가문 출신이다.[1] 312년 병관좌평에 올랐는데 이는 해씨가문에 대한 비류왕의 전략적인 지지로 보여지며, 건국초기부터 강력한 힘을 사용하던 부여씨에 대한 견제로 사용되었다고 보여진다.

3 백제 전지왕대의 대신

解丘

생몰년 미상

백제 전지왕대의 대신으로 전지왕의 외척이다. 407년 2월에 병관좌평에 임명되면서 백제의 병권을 장악했고, 당시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할 목적으로 417년 7월에 사구성(沙口城) 건설을 감독하기도 했다.

4 백제 문주왕, 삼근왕대의 권신, 반역자

解仇

(? ~ 478)

백제 문주왕, 삼근왕대의 대신이자 반역자이기도 하다.

476년 8월에 문주왕은 해구를 병관좌평에 임명하였다. 이후 문주왕의 웅진천도로 인한 왕권 약화와 백제 정국의 불안등을 보고 왕위에 대한 욕심을 내었던 듯 하다. 477년 백제 왕실에서 문주왕을 능가하는 세력이었던 내신좌평 곤지(昆支)가 죽었는데 비록 삼국사기 등에는 그 원인이 드러나지 않았으나 이를 해구의 소행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이후 477년 8월에 해구는 그 권력이 왕권을 능가하기에 이르어 정권을 장악하고 법도를 문란하게 만드는 한편 심지어 왕을 없애려는 마음까지 품게 되었다. 그러나 문주왕은 해구에 대해 아무런 제지도 할수가 없을 정도로 힘이 약해진 상태였다.[2]

477년 9월, 해구는 문주왕이 사냥을 나가 궁궐 밖에서 묶고 있던 틈을 타 자객을 보내 왕을 살해하고 국가 전권에 대한 장악을 시도했다. 이러한 상황은 해구 독단적인 행동보다도 그를 받쳐주는 해씨(解氏)가문이 주도한 것으로도 추정되기도 한다. 이후 문주왕의 아들인 삼근왕이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여전히 나라의 권력은 해구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이듬해인 478년 봄에 해구는 은솔 연신 등의 무리와 더불어 대두성에 웅거하여 모반을 일으켰다. 이는 해씨와 마찬가지로 한성을 기반으로 했던 귀족인 진씨(眞氏) 가문이 삼근왕을 도와 해씨 가문에 대항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해씨가문과 진씨가문의 대립속에 결국 해씨가문이 밀려나면서 해구는 지역 토착세력인 은솔 연신(燕信)과 함께 대두성(大豆城)에서 격렬히 항거했는데, 이때 해구는 삼근왕이 보낸 좌평 진남(眞男)의 군사 2천도 격퇴하였다.

하지만 해구는 덕솔 진로(眞老)가 이끄는 500명의 정예병과 교전하다 사망했으며 그와 함께 싸우던 연신은 고구려로 도망갔다. 이후 연신의 부인과 아이들은 사로잡혀서 웅진의 저자에서 목이 베어져 죽었다.

여담으로 목만치가 밀려난 시기를 구이신왕 대가 아닌 문주왕 대로 보기도 한다. 이 설의 경우 해구의 전횡으로 인해 일본으로 망명했다는 것이다.
  1. 참고로 이 항목에 있는 백제 인물들은 모두 대성팔족중 해씨가문 출신.
  2. 삼국사기 문주왕본기에는 왕의 성격이 여리고 부드러워서 해구를 막지 못했다고 하였으나 실상은 왕권이 워낙 미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