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dth=50 백제의 역대 국왕 | ||||
21대 개로왕 부여경 | ← | 22대 문주왕 부여도 | → | 23대 삼근왕 부여삼걸 |
시호 | 문주왕(文周王) / 문주왕(文洲王) / 문주왕(汶洲王)[1] | |
성 | 부여(扶餘) | |
휘 | 모도(牟都) / 여도(餘都)[2] | |
생몰년도 | 음력 | ? ~ 477년 9월 |
재위기간 | 음력 | 475년 음력 9월 ~ 477년 9월 (3년) |
1 소개
개로왕의 아들(《삼국사기》) 또는 동생(《일본서기》).[3]
중국사서에는 모도(牟都) 혹은 여도(餘都, 여기서 여餘가 성이고 이름이 도都다.)로 나타난다. 이미 개로왕 시기 때 상당한 위치에 올라있었음이 여러 기록에서 나타난다. 즉 개로왕이 송에 사신을 보냈을 때 보국장군이란 직책을 받았으며, 이후에는 상좌평을 역임했었다.
성품이 부드러웠지만 우유부단한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백제 최대의 국난을 수습해야 하는 막대한 임무를 맡은 왕으로써는 어울리지 않은 성품을 소유한 듯. 그래도 인간됨은 선했는지 "백성을 사랑하였고 백성 또한 그를 사랑했다"라고 한다.
고구려가 한성으로 처들어오자 신라 자비 마립간에게 1만 구원병을 얻어오나, 이미 한성백제는 한성을 함락당하고 개로왕과 그 일족은 살해당한 뒤였다.
2 웅진으로의 천도
한성이 함락되고 한강 유역은 고구려군의 손아귀에 떨어진다. 한성 함락 소식을 들은 문주는 지원군을 이끌고 웅진으로 가 그곳을 새 도읍으로 정하고 왕에 즉위했다. 백제의 678년 역사 중 477년간 수도였던 한성을 잃은 백제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또한 한강 유역에서 피난온 난민들을 정착시키는 것도 문제였고, 본거지를 잃은 귀족 세력인 해씨, 진씨도 세력이 쇠하기 시작하여 현지 지방세력(구 마한 세력)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사택(砂宅)씨, 연(燕)씨 등의 도전을 받게 된다.
3 살해 당하다
패전으로 인해 왕실의 권위는 바닥까지 떨어지고, 지배층 내부의 갈등까지 겹쳐서 백제는 매우 혼란스러웠고, 결국 재위 3년째 되는 해 사냥을 나가 외부에서 묵었다가 병관좌평[4] 해구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하지만 해구의 세력은 아직도 강대하여 아들 삼근왕이 즉위한 후에도 권세를 휘두르다가 동성왕파의 세력이 커지면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죽고 만다. 한편 삼근왕 또한 반란을 진압한 직후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5]
4 기타
문주왕의 아우 곤지가 475년 한성 함락 이후에 백제에 귀국하여 내신좌평에 임명한 걸 보면 전왕 개로왕처럼 왕실 인사들을 등용해 왕권을 강화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둘 다 해구에 의해 살해됐지만...
5 삼국사기 기록
一年秋九月 문주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月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다
二年春二月 대두산성을 수축하고 민가를 이주시키다
二年春三月 송에 예방이 고구려의 방해로 실패하다
二年夏四月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치다
二年秋八月 해구를 병관좌평으로 임명하다
三年春二月 궁실을 중수하다
三年夏四月 곤지를 내신좌평으로 임명하고 삼근을 태자로 책봉하다
三年夏五月 흑룡이 웅진에 나타나다
三年秋七月 내신좌평 곤지가 사망하다
三年秋八月 병관좌평 해구가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다
三年秋九月 문주왕이 죽다
- ↑ 《일본서기》의 기록
- ↑ ""여"가 "부여"씨를 축약한 표기이고, "도"는 모도의 축약한 이름이다.
- ↑ 이기동 교수가 '中國史書(중국고서)에 보이는 百濟王牟都(백제왕 모도)에 대하여'(1974년)라는 논문에서 중국측 기록과 《일본서기》, 《삼국사기》등을 정치하게 비교 분석하여 문주왕이 개로왕의 동생임을 고증했다라고는 하나, 실제로 이것을 가장 먼저 밝힌 것은 일본의 나카 미치요(那珂通世)의 『외교역사 外交繹史』(1915). 또한 1974년에 가사이 와진(笠井倭人)이 이를 부연설명한 적이 있으므로, 단순히 이기동의 업적으로만 보긴 어렵다. 어찌되었든 이후 학계에서도 대체적으로 이것을 따르고 있다
- ↑ 지금의 경호실장급 직책이다. 국왕의 최측근이라는 뜻.
- ↑ 삼근왕의 죽음에 동성왕이 개입했다는 주장이 있다
- ↑ 제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