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학사

三學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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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한 충렬각

최명길은 자신의 명예를 생각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몸을 돌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젖비린내나는 자들이 그를 모욕하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그대들이 매번 조그마한 곡절을 두고 다투고 분변하느라 이렇게 위태로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 삼사는 단지 신(臣)이란 글자의 가부만 논하면 된다. 글을 언제 보낼지는 묘당의 책임이지 그대들의 알바가 아니란 말이다

조선 병자호란 시기에 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하고, 결사항전을 주장하다가 인조가 항복한뒤 중국 선양으로 끌려가 처형당한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의 세 명의 학사를 지칭하는 말이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도 수록되었는데, 이들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작 이 세명의 이름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1636년 12월 청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침입하여 남한산성을 포위하였을 때, 최명길을 중심으로 나라와 화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주화파와, 김상헌을 중심으로 결사 항전을 주장한 주전파와의 의견이 서로 대립하여 충돌하였는데, 결국 주화파의 주장이 승리하였다. 솔직히 대포알이 남한산성 안으로 날아들고 장수들은 척화파 놈들 죽이라고 시위를 해대고 식량을 떨어져가고 근왕병들은 모조리 패퇴하고 강화도까지 함락당한 마당에 척화파가 승리할 수도 승리해봐야 별 뾰족한 수도 없었다 하겠다.

1637년 인조가 남한산성 밖으로 나와 청나라에 항복하였고, 그 후의 일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어쨌든 척화론의 주모자로 홍익한, 윤집, 오달제 3사람이 끌려나왔는데 선양에서의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결국 끔살당하고 만다.
1637년 2월 심양으로 끌려온 홍익한은 용골대가 ‘너의 나라 신료들 가운데 척화를 주장한 자가 퍽 많은데 어찌 유독 너만 끌려왔는가?’라고 묻자 ‘작년 봄에 네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소를 올려 너의 머리를 베자고 청한 것은 나 한 사람뿐’이라고 응수했다. 이에 용골대는 웃으며 가버렸다. 청태종은 홍익한을 회유하려고 했는데 과거 수많은 명나라 유신들을 받아들였고 조선의 척화파까지도 은덕으로 감화시켰다는 소문은 향후 조선을 제어하는 데 커다란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홍익한의 단호한 의지를 확인한 청태종은 곧바로 그를 처형했다. 윤집, 오달제는 후발대로 그해 4월 심양에 끌려왔는데 청태종이 용골대에게 이들을 회유시키라고 지시했다. 용골대는 이들에게 너희들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너희들의 충성이 가상하니 조선의 가족들을 불러와 심양에서 사는 것이 어떻냐고 물었으나, 그들은 우리가 예까지 끌려와 목숨을 끊지 않은 것은 다시 고향산천에 돌아가 주상과 노모를 뵐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뿐이었으며 이것이 안된다면 죽느니만 못하니 얼른 죽이라고 용골대에게 호령했다. 이에 용골대는 '정히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라고 안타까워 하면서 심양 서문에서 그들을 참수한다. 하지만 청나라에서는 반청의 상징인 이 세 사람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훗날 뼈들이 쌓여 있는 심양 형장에서 시신을 찾을 길이 없어 집안에서는 집안의 종들을 시켜 초혼하여 온 다음 유품들을 묻어 가묘를 만들었다.

이들이 남한산성 밖으로 나오는 과정은 사뭇 감동스럽기까지한데 청에서 강화 조건으로 척화신들을 내보내라고 하자 이들은 즉시 앞으로 나서서 자신들이 지난날에 최명길의 주장을 비판했으니 신들을 오랑캐의 진영으로 보내 한번 칼날을 받게 하소서. 라며 죽음을 자청했다. 이조참판 정온, 예조판서 김상헌 등도 자신들을 청나라에 보내 죽게 할 것을 청했고 소현세자도 설사 일이 잘못되어 자신이 죽는다하더라도 자신에겐 아들도 있고 동생들도 있으니 걱정이 없을 것이라며 자신을 청에 보낼 것을 묘당에 요구했다.
이에 조정은 소현세자야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충신들을 죽음의 길로 내몰 수는 없다며 청의 요구를 거부할 것을 왕에게 요청하여 이들이 성 밖으로 나가지 않았는데 전황이 날이 갈수록 불리해지고 식량도 바닥을 보이자 수원부, 훈련도감, 어영청의 장수들이 대전을 포위하고 척화신을 내보낼 것을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벌였다.
결국 윤집과 오달제가 청나라에 보내지게 되었는데 그들은 그 와중에도 세자를 청에 보내면 안된다고 간하며 감동을 먹은 인조가 죽으러 가는 와중에도 나라를 걱정하는가? 그대들의 처자는 기필코 잘 돌봐줄 것이니 걱정 말라. 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의 뜻을 기린 현절사는 남한산성 내에, '홍익한 충렬각'은 현재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