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표

서문표(西門豹)는 중국 전국시대 인물로 나라 정치가다.

1 설명

공자의 제자이자 공문십철 가운데 한 사람인 자하 밑에서 학문을 배웠다. 위나라 문후(文侯)는 자하를 스승으로 모시고 경전과 예를 배우는 한편 국정에 자문을 구했는데, 자하의 문하생인 이극과 서문표 등은 문후의 중요한 인재 풀로 활약했다.

2 하백의 고사

사기 골계열전에 따르면 서문표는 위나라 문후 때 업성의 태수가 되었는데 이때 뛰어난 정치가이자 행정가로서 서문표가 남긴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진(晉)이 분열해 위나라가 생긴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鄴) 땅에 유수(留守) 자리가 비자 모사 적황은 문후에게 서문표를 적임자로 추천했다. 업은 , 나라와 이웃한 땅이라 위나라의 중요한 요충지였으나 별로 발전하지는 아니했던 곳이다.
서문표가 업에 도착해 치수사업을 벌이려고 하였으나 주민들의 분위기가 한마디로... 망했어요.

연유를 캐물으니 "매년 하백(河伯)[1]이 장가를 들어 그 뒷바라지 하느라 등골이 빠집니다"하는 답이 나왔다. 뭥미 싶어서 자세히 알아보니, 날이 가물지 않고 물길도 잔잔하도록 매년 처녀를 인신공양하는 풍습[2]이 있었다. 무당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하백에게 바칠 처녀를 물색하면, 관리들은 세금을 걷어 거하게 행사를 치르는 것.[3]

돈 있는 집은 딸을 살려야하니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몸값을 바쳐 모면하고 가난한 집 딸들만 희생되었다 연출되었다. 매년 이 짓을 했으니 백성들은 제사비용으로 세금을 내느라 쪼들리고, 딸자식 가진 부모는 이웃 땅으로 도망가 인구가 감소해서 세수가 줄고...

이 이야기를 들은 서문표는 다음 번 하백이 장가드는 날에는 자기도 꼭 참석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날이 왔다. 벼슬아치와 지역 유지를 비롯해 수천 명 구경꾼이 몰려들었고, 일흔 살 무당이 위풍당당하게 선두에 서고 젊은 무당 십여 명이 뒤를 따랐다.

서문표는 "하백의 신부 얼굴을 보자"고 요청했고, 산 제물로 뽑힌 처녀를 보더니 얼굴이 추하다며 트집을 잡고, 하백에게 다른 이쁜 처녀를 보낼테니 기다리라고 전하라며 부하를 시켜 냅다 무당을 강물에 집어던졌다.

누구도 예상 못한 사태인지라 한동안 모두 벙쪄 있는데, 서문표는 태연자약 덧붙였다.

"무당 할멈이 늙어서 얘기가 늘어지나보오. 거기 젊은 제자 무당이 좀 가보시오."하고는 또 무당을 강물에 집어던졌다.

그래도 돌아오지 않자, 여러사람이 설득하라며 제자 둘을 더 던지고도 올라오는 사람이 없자(…)

"무당들은 계집들이라 하백을 설득하기 힘든가보오, 번거롭지만 삼노(三老)[4]께서 직접 설득해보시오."하더니 역시나 삼노를 강물에 집어던졌다.

사태가 이쯤 되니 좌중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지만 서문표는 뻔뻔할 정도로 태연했다. 의관을 정제하고, 허리도 굽히고, 진심으로 하백이 그들을 다시 뭍으로 돌려보낼 것이라 믿는 분위기를 연출해 보였다. 물론 하백의 답신은 없었고, 서문표는 태연히"무당도 삼노도 돌아오지 않네? 제사 주관한 관리하고 유지들이 전부 설득하러 가시오."하고 무심한 듯 시크하게 계속 내던질 분위기였다(…).

앞장서서 무거운 세금을 거두었던 무리들은 이마가 깨지도록 절을 하며 살려달라고 빌었고, 비로서 서문표는 "앞으로 하백을 장가 보내겠다 싶으면 물속에 들어가서 중매부터 서고, 물속에 들어가는 것은 내가 도와주겠소."라고 천연덕스럽게 선언했다. 이후로 업 땅에서 산제물을 바치는 풍습은 사라졌으며, 흩어졌던 사람들도 다시 모여들었다.

이후 서문표는 대규모 관개사업을 벌여 열두 개 보를 쌓았다. 만들 당시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은 불평했지만, "당장은 나를 원망해도 백년 뒤에는 고맙게 여길 것"이라며 밀어붙였다. 과연 물길이 잡히며 수해가 줄었고 풍부한 수량을 바탕으로 농업 생산량이 증가했다. 이후로 업은 황하 부근의 유력한 대도시가 되어 번창했다.

한나라 때, 이미 서문표가 지은 수로가 오래되었다는 생각에 나라에서는 수로를 합치자고 건의했지만 백성들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현군 서문표가 백성들을 이끌고 만든 방식을 함부로 바꿀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결국 계획은 취소되었다.

이때 서문표가 땅을 판 곳이란 유래가 있는 서문거(西門渠)란 지명이 실제 있다.

후에 와 골든간지전예가 크게 존경하고 통치에 있어서의 역할모델로 삼았다. 전예의 유언은 "서문표와 같은 길을 걸었으니 그와 같은 곳에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였으며, 조조의 마지막 유언은 "업(鄴)의 서쪽 언덕 서문표(西門豹) 사당 부근에 묻어주어라." 라는 것이었다.

여담으로 다른 얘기로는 이후에 하백이 처녀를 바치지 않음을 괘씸히 여겨 마을을 쓸어버리려다가 예(신화)의 화살을 맞고 물러났다고도 한다.

3 관련 항목

  1. 河水(하수, 황하의 옛 이름)의 신을 이름
  2. 처녀를 잘 먹인 후에 꽃단장하여 배에 태우는데, 미리 조그만 구멍을 뚫어 놓아 멀리 못가고 가라앉게 했다고.
  3. 당연히 남은 돈은 이놈들이 나눠가지고...
  4. 지역 유지, 제사를 앞장서서 주관하고 세금을 거두어 무당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