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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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노 사망자[1][2]
지역/종류기간위그노 사망자
루브르 근처200 명
오를레앙3일간1,200 명
보르도300 명
기타 지방 합계27,000 명
전체 사망자1일 ~ 6일3,000 명
6일 이후수만 명
1개월간 수천 명 ~ 수만 명의 위그노(프랑스 개신교도)들이 가톨릭 교도들에게 학살당한 사건.

1 개요


St. Bartholomew's Day Massacre

1572년 8월 24일부터 10월까지 위그노 전쟁 중이었던 프랑스 파리에서 가톨릭 세력이 개신교 신자였던 위그노인(Huguenot)들에게 행한 대학살. 성 바르텔레미 축일의 학살(Massacre de la Saint-Barthélemy)로도 불린다. 학살이 시작된 8월 24일 밤이 가톨릭에서 예수의 12사도였던 바르톨로메오의 축일이었기 때문에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라 부른다.

사건의 발단은 발루아의 마르그리트 공주와 나바르의 앙리(앙리 드 나바르)간의 정략 혼인에서 시작되었다. 발루아 왕조의 실권자였던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 왕후는 가톨릭과 위그노간의 화평을 위해서 위그노(프랑스내 개신교인) 진영의 중심이었던 나바르 여왕 쟌 달브레의 아들인 앙리와 자신의 막내딸을 혼인시키기로 했다. 이 혼인에는 만약 발루아 왕조에 왕위 계승자가 없을 경우 나바르에 왕위 계승권이 넘어가기 때문에 마르그리트를 통해서 모계로라도 발루아의 혈통을 계승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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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파르 드 콜리니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위그노 진영의 지도자인 가스파르 드 콜리니였다. 콜리니는 몽모랑시 가문 사람이었고,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자질로 젊었을 때부터 주목받던 인물이었다. 그는 한때 카트린느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으나, 신교로 개종하고 발루아 가문에 공공연하게 반기를 든 이후 그들의 우정은 깨어지고 말았다. 아무튼 샤를 9세는 명석하고 매력적인 콜리니에게 호감을 느꼈고 콜리니의 영향으로 위그노쪽으로 개종할 듯한 기미를 보였다. 게다가 콜리니는 샤를 9세에게 "우리끼리 싸우지 말고 플랑드르 쳐들어가서 스페인 바르죠?"라고 제안했고 샤를 9세는 "그거 좋네"라고 한 것도 문제였다.[4] 카트린느으로선 위그노도 골치 아픈 마당에 당시 최강국이라 할수 있는 스페인과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콜리니를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파리로 진격해오는 위그노들을 막고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전격적으로 생 제르맹 앙 레 성에서 전격적인 평화협정을 맺고 처음으로 이뤄졌던 행사가 바로 나바르의 앙리의 정략결혼이었다. 3차 전쟁이 휴전으로 끝났고 승리자였던 콜리니도 결혼식에 초청받았고, 그 결혼식에서 흉탄이 콜리니에게 날아든다. 그러나 총탄은 비껴가 콜리니의 왼팔을 꿰뚫는데 그쳤다. 범인은 그대로 말을 타고 달아나 기즈 가문의 저택 근처에서 종적을 감췄다.

외과수술을 받아 손가락을 자르는 등의 치료를 받은 콜리니의 저택에 카트린느와 함께 찾아간 샤를 9세는 눈물을 흘리며 반드시 진상을 밝히겠다고 약속했다.

카트린느의 죽음 이후 여러 인물들이 이 암살의 배후에 공통적으로 공범으로는 카트린느가 있다고 지목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통설로 여겨지며, 배후로 스페인을 지목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실제로 콜리니는 그만큼 유능한 제독이었으며, 제3차 위그노 전쟁이 한창일 때 위그노 측에 전향하여 지휘를 맡음으로써 불리했던 전세를 뒤엎고 위그노군을 이끌고 파리까지 진격해왔을 정도로 전략전술에 뛰어난 인물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콜리니는 같은 신교파였던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자는 주장까지 해왔다. 스페인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 수도 있는 중요인물로 떠오른 것이다. 물론 스페인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카트린느에게도 이는 위협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이 이후, 간신히 평화를 되찾았던 카톨릭 세력과 위그노 세력간의 알력다툼이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위그노 세력의 귀족들이 카트린느가 점심식사를 하는 도중 쳐들어가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어가고 있었다. 파리의 카톨릭 신자들은 위그노들의 보복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여기에는 카트린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전의 전쟁에서는 위그노 세력이 우위를 점해 샤를 9세가 먼저 화의를 청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히스테릭한 반응이라고 하기도 힘들다.

여기에 강경 가톨릭 세력의 중심이었던 기즈 가문의 기즈 공과 야심가인 동생 앙리가 가세하면서 문제가 커졌다.

기즈 공은 콜리니와 루이 드 콩데[5]의 사주로 의해서 아버지가 암살당한 원한이 있었다. 그래서 기즈공은 이번 기회에 아버지의 원수도 척결하고 눈에 거슬리는 위그노들을 싹 쓸어버리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기즈공 때문에 목표는 콜리니 한 명에서 파리의 모든 신교도 대학살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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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2년, 샤를 9세

8월 24일, 결국 샤를 9세는 카트린느와 기즈 공의 충동에 의해 콜리니와 위그노 지도자들을 숙청하라는 명을 내리고[6] 기즈 공은 자신의 병력을 동원해 콜리니의 저택을 들이쳐 그를 살해했다. 카톨릭을 믿는 파리 시민들이 이에 호응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위그노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국왕의 스위스 근위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날 밤에는 프랑스 전국에 걸쳐 남녀를 가리지 않고 위그노인 수천 명이 가톨릭인들에게 학살당했다. 또한 수많은 여자들이 강간당한 후 잔인하게 살해당했으며 어린아이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이 와중, 얼마 전에 어머니가 사망하여 나바르 왕으로 등극한 새신랑 부르봉 가문의 앙리는 카트린느의 비호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를 비롯해 왕의 근친인 콩데 공작도 간신히 살아남았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학살에 대해 보고받고 신을 찬양했다고 하며 바티칸에서도 대대적으로 축포가 터졌다고 한다. [7] 또한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이 날을 축제일과 희년으로 정하고 모두가 이것을 지켰고 기념주화도 제작하였다.

다만 이 학살을 거리에서 구경만 하던 이들이 있었다. 피에 미친 사람들이 너희들도 위그노냐? 라고 하자 그들은 불쾌하듯이 "우린 사형집행인이다." 라는 말을 했다. 사람들이 아니 사형집행인이라면 같이 죽여야지 왜 구경만 하냐고 묻자 그들은 "이들이 재판을 받고 사형판결 내려진 게 아니라 그저 길거리에서 마구 죽이는데 이게 사형이냐? 이건 그냥 살해, 아니 학살이잖아! 우린 적어도 네놈들처럼 미친 학살자는 아니다!" 라고 말하곤 가던 길을 갔다는 일화도 있다.

1572년 위그노 학살 기념주화

이후 유약했던 샤를 9세는 학살의 충격과 죄의식에 시달리다 서자만을 남긴 채 사망했고 그 뒤를 이어 선출되어 막 즉위했던 왕제 앙리 3세가 폴란드 왕위를 버리고 탈출해 왕위를 계승했다. 앙리 3세는 총신들과 어울려 사치 향락을 즐겼고, 점차 인망을 잃어갔다. 그 사이 가톨릭 민중들에게 신망을 얻던 가톨릭 진영의 기둥인 기즈 공과는 갈등을 빚다 결국 암살해 버렸다.[8] 그리고 나중엔 앙리 3세 또한 기즈 공의 암살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킨 파리 시를 앙리 4세의 위그노 군대와 함께 포위하다 광신적인 가톨릭 수도사에게 암살당하여 발루아 왕조는 정말로 어이없이 몰락해 버렸다.

이에 분개한 위그노들은 다시 결집해 발루아 왕조 타도를 외치며 앙리 나바르를 중심으로 결집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네덜란드의 신교도들과 영국여왕 엘리자베스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일으켰다. 이후 내전은 프랑스 전역으로 확대되어 나라를 쑥밭으로 만들었고, 앙리 4세가 개종하고 나라를 통일하면서 마무리된다.

칼뱅파들은 이 사건에 충격을 받고 전제군주정에 심각한 회의를 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칼뱅파의 원조였던 장 칼뱅은 국가체제에 순종하는 성향이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위그노와 칼뱅파들은 전제군주에 저항하는 저항권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자코모 마이어베어의 오페라 위그노 교도는 이 사건을 바탕으로 가톨릭 신자인 발렌틴과 위그노 라울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영화 여왕 마고의 직접적인 줄거리는 이 학살 때 발루아의 마르그리트가 학살로 부상을 입은 라 몰느를 구해주면서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2 가톨릭의 사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97년 8월 성 바르톨로뮤축일의 대학살에 로마가톨릭 교회가 개입됐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가톨릭은 이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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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련 항목

  1.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99257&cid=42050&categoryId=42050
  2.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07098&cid=43047&categoryId=43047
  3. 샤를 9세는 유약했고 후에 앙리 3세가 되는 앙주 공은 사치만 즐기는 데다 무능하기는 마찬가지여서 그럴 만했다. 이런 아들들이 후사를 볼 가망이 없자 카트린느로선 모계로라도 자신의 자손에게 왕위를 잇게 하려고 했던 것. 그러나 마르그리트와 앙리 4세간 아이가 없어 카트린느의 후손은 단절된다. 대신 카트린느의 먼 친척인 마리 드 메디시스의 아들이 루이 13세로서 왕위를 잇는다.
  4. 그래도 내심 불안했는지 네덜란드 총독 알바공에게 위그노들의 플랑드르 공격 계획을 알렸다고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국왕이 이중플레이를 구사하면서 위그노들을 통제하려 했다고 보기도 한다.
  5. 부르봉 가문의 가장으로 앙리의 숙부였다. 당시는 이미 전투 과정에서 사망.
  6. 기록에 따라선 샤를 9세와 카트린느는 그날 밤 방에 숨어 공포에 떨었다고도 한다. 왕명을 내린 것은 형식상의 서명 내지는 책임소재 확인에 불과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까지는 국왕의 권위가 어느정도 유지되어 기즈 공작도 스스로 그 정도의 일을 벌이지는 못하는 상황이었다. 기즈 공의 위세가 왕을 능가하는 것은 앙리 3세 후기, 파리의 가톨릭들의 지지를 업은 뒤의 일이다. 단, 이후 바오로 2세가 이 일의 배후에 로마 카톨릭 교회가 있었음을 인정함으로써 새로운 배후로 로마가 떠올랐다. 이에 대해서 바오로 2세는 이미 사죄를 했다.
  7. 단 교황은 개인적으로는 이 참화를 탄식했다. 수많은 무고한 사람이 죽었으니 프랑스왕에게도 화가 미칠지 모른다고 말했다. 어쨌든 교황이 이 학살의 날을 축하하여 ‘하느님께 찬양’이란 뜻의 성가인 ‘떼 데움’(Te Deum)을 부를 것을 명했고 특별 감사의 미사까지 집전한 것은 사실이다.
  8. 사실 기즈 공이 왕위에 야심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기즈 가는 샤를마뉴의 후손을 자처하면서 서프랑크 왕국의 단절 후 로베르의 카페 왕가가 왕위를 찬탈했다고 주장하고, 샤를마뉴의 후손인 자신들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