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야누스

Lucius Aelius Sejanus

1 개요

티베리우스 황제 때 로마 제국의 최고급 행정관료.그리고 불륜이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부하. 프라이토리아니의 대장(근위대장)으로서, 티베리우스의 외아들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하며, 티베리우스를 폐위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음모를 꾸미다 사형에 처해졌다.

2 생애

2.1 출신

아버지 루시우스 세이우스 스트라보는 아우구스투스 아래에서 근위대장으로 임명되는 등 총애를 받았다. 세야누스 역시 어렸을 때부터 당시 제위 계승 후보였던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동행하는 등, 차기 관료로서 친분과 경력을 쌓았다. 티베리우스와도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2 근위대장

서기 14년 티베리우스가 제위에 오르자, 근위대장이던 아버지 루시우스 세이우스 스트라보와 함께 공동 근위대장이 된다. 1~2년 뒤에 단독으로 근위대장이 된다. 14년에는 판노니아의 로마군에서 폭동이 발생하자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와 함께 동행하여 폭동을 진압했다. 세야누스는 유능한 모습을 보여서 티베리우스에게 중용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서서히 야심도 드러냈다.

20년에 자신의 딸을 클라우디우스의 아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와 약혼시켜서 황실과 인척 관계를 맺으려 했다. 하지만 이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가 급사하여 결국 무산되었다. 이 무렵부터 세야누스를 경계하는 티베리우스의 장남 드루수스와 마찰을 빚게 되었다.

22년 폼페이우스 극장에 화재가 발생하자, 화제의 진화에 노력했으며 티베리우스에게 공적을 칭찬받았다.

2.3 드루수스 암살

23년 당시 티베리우스의 양자로 가장 제위 계승권이 유력했던 게르마니쿠스는 이미 죽었다. 티베리우스의 후계자 후보로는 그의 친자식인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의 장남 네로 카이사르, 차남 드루수스 카이사르, 그 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칼리쿨라)가 있었다. 그 외에도 티베리우스의 조카인 클라우디우스도 있었다.

세야누스는 드루수스와 마찰을 빚었으며, 아직 어린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과는 달리 나이와 경험이 출중하여 자신의 야심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으므로 제거 계획을 만들었다. 세야누스는 드루수스의 아내 리비아(Claudia Livia Julia)에게 접근하여 불륜의 관계를 맺었다. 리비아의 요구에 따라 세야누스는 3명의 아이를 낳았던 아내 아피카타와 이혼하고 리비아와 결혼 약속을 했다.

리비아의 할아버지 에우데모스, 환관 류그도스도 끌어들여서 드루수스 암살을 계획했으며, 리비아가 드루수스에게 약간의 독을 서서히 먹여서 병사로 위장하는 방법으로 암살에 성공했다.

25년 세야누스는 드루수스의 미망인 리비아와 결혼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티베리우스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2.4 티베리우스의 은둔

드루수스의 사후 티베리우스의 후게자는 게르마니쿠스의 두 아들 가운데 이미 성인이 된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로좁혀졌다. 세야누스는 이 2명과 그들의 후원자인 대 아그리피나를 표적으로 했다. 이미 티베리우스와 아그리피나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를 독살했다고 의심하여 노골적으로 적대시 했기 때문에 이간질 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세야누스의 정부였던 리비아 역시 아그리피나와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바랬다.

세야누스는 게르마니쿠스의 친구들, 대 아그리피나의 동조자를 차례차례 고발하여 실각시키고, 대 아그리피나의 세력을 약화시켜나갔다.

25년 티베리우스는 캄파니아로 출발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 때, 낙반 사고가 일어났을 때 세야누스는 자신의 몸으로 티베리우스를 보호하여 티베리우스의 믿음을 굳혔다.

27년 티베리우스는 이탈리아 본토에서 떠나 카프리 섬에 거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접근하는 것을 완전히 장악하고 거대한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세야누스의 생일은 공식적으로 경축되었고, 티베리우스의 동상과 함께 세야누스의 동상이 놓이게 되었다. 세야누스의 파벌도 급격히 성장했다. 네로 카이사르의 동생으로 형과 대립하던 드루수스 카이사르도 세야누스에게 포섭되었다.

2.5 권세의 절정

29년, 로마에서 티베리우스의 어머니이자 아우구스투스의 미망인이던 '아우구스타' 리비아가 사망한다. 이로서 세야누스와 티베리우스는 공공연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아그리피나와 그녀의 아들 네로를 추방해서 섬에 유배햇다.

드루수스는 아에미리아 레피다와 결혼했는데, 리비아와 마찬가지로 세야누스는 그녀와 간통을 하여 드루수스를 함정에 빠뜨렸다. 드루수스는 30년 로마의 팔라티누스 궁전 지하실에 유폐되어 병사의 감시 아래 놓이게 된다.

31년,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의 공동으로 콘술(집정관)이 되었으며,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비록 황제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이때는 아직 여전히 집정권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으며, 세야누스의 세력은 절정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때 부터 이미 티베리우스는 점차 세야누스를 경계하게 되었고, 세야누스를 제거하는 음모를 꾸마기 시작했다. 관습적으로 두 명의 집정관 가운데 한 명은 로마에 머물러야 하는데, 티베리우스는 카프리에 틀어박혀 있었으므로 세야누스는 로마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그때까지 장악하고 있던 티베리우스의 서신, 면회를 관리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된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에 대한 의심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표면적으로는 세야누스를 신뢰하며 모든 속주에 명령을 내리는 프로콘술 명령권, 향후 5년간 공동 집정관 권한을 준다. 이로서 세야누스는 황제의 3가지 권위 가운데 호민관 특권을 제외한 모든 권한을 가지게 된 것이다.

2.6 세야누스 처단

화려한 권력을 누리던 세야누스는 그 최후도 극적이었다.

5월 초, 티베리우스는 갑자기 집정관을 사임한다. 집정관은 공동 사임이므로 세야누스도 사임하게 되었다. 5월 9일, 2명의 후임 보궐 집정관이 취임했으며 이 중 1명이 그만두고, 6월 1일 세야누스의 동료인 루키우스 프루키니우스 투리오가 취임했다. 10월 1일, 또 한 명의 집정관으로 티베리우스의 신임이 두터운 푸플리우스 멘미우스 레굴루스가 취임했다.

이 시기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를 경계하게 되어 티베리우스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음모는 사토리우스 세쿤두스 누설되어 티베리우스에게 입수되어 있었다.

10월 17일 카프리에서 나에비우스 스트리우스 마크로가 세야누스 대신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에 임명되어 서한을 가지고 로마에 간다. 밤에 도착한 마크로는 그날 밤 집정관 레굴루스, 소방대장(praefectus vigilis)[1] 그라에키누스 라코 등에게 티베리우스의 서신을 전달했다. 마크로는 프라이토리아니의 지휘권을 접수한 다음, 세야누스에게 찾아가서 근위대장에서 해임되었음을 통보한다. 하지만 동시에 내일 원로원에서 세야누스에게 호민관 특권이 주어진다고도 알려주었다. 이는 곧 세야누스를 차기 황제로 지명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세야누스는 매우 기뻐하였고 음모를 깨닫지 못하였다.

다음날, 세야누스는 당당하게 원로원에 출석하였다. 레굴루스는 티베리우스의 서한은 낭독을 시작했다. 마크로는 친위대를 장악해두고, 라코는 부하들을 팔라티누스 주변에 배치하여 봉쇄, 친위대의 무력 발동에 대응하였다. 티베리우스의 서한은 처음에는 시시한 국정 문제를 줄줄히 늘어놓으며 시간을 끌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레굴루스는 낭독을 계속했다.

레굴루스가 낭독하는 서한은 세야누스 파의 의원들을 비난하는 것을 시작으로, 서서히 세야누스 자신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변해갔다. 마침내 티베리우스의 서한은 세야누스에게 티베리우스 자신이 고발자가 되어 국가반역죄를 선고하고, 그 증거를 나열하였으며, 원로원에게 세야누스를 즉시 처형할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끝맺어졌다.

낭독 직후 원로원은 환호했으며, 세야누스는 갑작스러운 상황변화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자신의 이름을 3번이나 부르는 것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세야누스는 반항도 하지 못하고 구속되었으며 그날 밤 교수형에 처해졌다.

세야누스의 처단은 큰 장애 없이 이루어졌지만, 세야누스의 권세가 워낙 강하고 프라이토리아니라는 강력한 군사력을 이끌고 때문에 티베리우스 역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세야누스가 프라이토리아니로 반란을 일으킬 것을 경계하여, 긴급시에는 유폐되었던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풀어주고 군대를 지휘하여 세야누스에 대항하라는 지시도 있었다. 또한 티베리우스는 카프리에서 속주의 군단에 도망칠 것도 생각하고 선박도 준비해두고 있었다.

2.7 사후

세야누스의 시체는 시민들에게 모욕을 받고 티베레 강에 버려졌으며, 그의 동상은 모두 파괴되고 세야누스의 이름이 적힌 동전 등은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세야누스의 처형 이후, 그 일파 역시 숙청되었다. 세야누스의 장남과 삼촌 부라에수스는 즉시 처형. 아직 어린 차남과 장녀도 교수형에 처해졌다. 로마에서 처녀를 교수형에 처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장녀는 강간을 당하고 살해되었다고 한다. 세야누스의 전처 아피카타도 자살을 강요당해 죽었다. 이 때 아피카타는 유서로 드루스스 암살의 정황을 밝혔다.
  1. 치안까지 관할하는 집단이라, 근위대와 함께 로마의 무력집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