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스타인 베블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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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rstein Bunde Veblen
1857년 7월 30일 ~ 1929년 8월 3일

"분석의 끝에서, 현명한 영리행위란 결국 사려깊은 깽판놓기임이 드러난다"[1]

1 사회학자 겸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은 미국 출신의 사회학자 겸 경제학자이다. 제도주의 경제학[2]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기도 하다. 대표적인 저서로 유한계급이 있다.

1.1 생애

사회학의 역사에서도 가장 독창적이며 도발적인 주장을 펼쳤던 인물 중 하나. 대표적인 미국 사회학자 중 한 명이다. 그의 사상은 험난했던 그의 생애에 기인하는 바 크기 때문에, 베블런의 사상을 살펴보기에 앞서 짧게나마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베블런은 노르웨이 이주민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베블런 일가가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 배경이 눈물겹다. 그의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모두가 가족 소유의 농장을 사기로 인해 빼앗겼던 것. 그렇다고 미국으로 와서 사정이 나아진 것도 아니다. 부동산으로 한 몫 잡아보려는 투기꾼들과 사채업자들에 의해 그나마 미국에 건너오면서 구입한 몇 뙈기 안 되는 땅마저 다 빼앗기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블런의 부모는 뼈빠지게 노오력한 끝에 미네소타에 넓은 농장을 마련하고 폐쇄적인 노르웨이인 공동체의 큰어른이 되었다. 타지에서 개고생한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이주민들이, 자신들을 등쳐먹을 생각에 혈안이 된 미국인들을 얼마나 경멸했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하지만 이런 폐쇄성은 젊고 유능한 베블런에게는 독이기도 했다. 베블런은 답답한 데다, 엄격한 생활규범을 요구하는 노르웨이인 공동체에 완전히 융합되지 못해 늘 삐딱한 태도로 일관했다. 이는 뼛 속까지 새겨진 미국인 불로소득자에 대한 경계 및 분노와 결합하여 베블런이 평생 독설과 풍자를 무기로 삼게 만들었으며, 베블런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으로 남게 했다. 이방인에 대한 짐멜의 통찰대로라면 그는 천상 사회학자가 될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베블런의 주 활동무대는 미 중부였다. 당시 미 중부는 새롭게 대학들이 들어서며 능력있는 교수 및 강사에 대한 수요가 컸고, 자연히 급여 수준도 좋았다. 베블런은 시카고, 스탠포드, 미주리에서 재직했는데, 특히 첫 부임한 시카고 대학에서 프래그머티즘의 대가인 존 듀이, 윌리엄 제임스[3]와, 사회심리학으로 사회학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조지 허버트 미드, 이주사회학자 윌리엄 토마스등과 교류하게 된다. 이들과 토론하고 논쟁하는 과정에서 베블런의 번뜩이는 사상은 더욱 다듬어졌고, 베블런은 점점 더 대가의 풍모를 갖추게 된다.

1.2 사상적 특징

  • 베블런적 이분법

베블런의 기획은 경제학 비판에서 출발한다. 그는 기존의 경제학이 만들어놓은 모형이 지나치게 이상적이라 비판하며, 인간의 경제행위는 인간의 다른 많은 행위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형성된 사회적 맥락에 입각해 분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4] 여기엔 형식주의에 반대하는 프래그머티즘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그는 인간사회의 발전을 기술의 발전을 통해 설명하는 한편, 기술적인 영역에서 개인이 점하는 위치가 개인의 사고를 결정한다고 봤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베블런이 마르크스와 동일한 주장을 펴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당대 사람들이 베블런을 평가하면서도 자주 나왔던 이야기이다.

하지만 베블런은 마르크스와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특히 베블런적 이분법(veblenian dichotomy)에서 잘 드러난다. 마르크스 이후 발전된 인류학의 연구성과들을 포용할 수 있었던 베블런은 경제활동이 단순히 화폐경제나 시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또한 전통적인 농업생산자 집단이던 노르웨이 이주민 가정의 경험과, 서류 몇 장으로 생산자들이 일궈놓은 땅을 앗아간 불로소득자들의 경험도 그의 생각에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여기서 베블런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 더욱 정확히는 유한계급 등장 이후의 인간 사회가 기업과 산업, 소유권과 기술, 제도와 기술발전, 금전적 직업과 산업적 직업, 노동기술과 판매기술 사이의 대립 위에 서 있다는 이분법을 발전시킨다. 쉽게 말해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뭐가 버는 게 현대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혹자는 마르크스에게서도 노동자와 자본가의 구분이 나타나며, 자본가는 노동과 분리되어 있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베블런의 특징은 생산을 노동과 자본이 변증법적으로 결합하는 과정으로, 즉 적대하면서도 서로가 없이는 유지되지 않는 상대항으로 본 마르크스와는 달리, 불로소득자들을 생산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켰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를 더 단순하게 표현하면 대다수의 산업적 직업에 종사하는 인간은 작업본능(the instinct of workmanship)에 의해, 먹고살기 위해 기술을 발전시키고 생산한다. 그러나 약탈자로서 금전적 직업을 가진 자들이 생산과정에 기생하여 자신의 몫을 앗아간다. 베블런에 의하면 수탈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으며, (부재)소유권은 약탈경제의 현대 자본주의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 깽판놓기

그렇다면 생산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자들이 어떻게 생산으로부터 이득을 취할 수 있는지가 문제로 떠오른다.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깽판놓기(sabotage)이다. 인간의 경제활동이 원활히 돌아가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최대한 단순하게 생각해봐도 원자재를 생산해서 이를 수송하고, 다시 원자재를 가공해서 완성품을 만든 후 적절하게 분배해야 한다. 경제활동은 당대에 대중적으로 인지되고 용납된 기술 수준[5]을 기준으로 하여 작동하게 되는데, 그 과정의 복잡성 때문에 필연적으로 고도의 협업을 요구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생산설비를 가진 A가 여러가지 핑계를 대며 기계 작동을 거부한다고 하자. 예를 들어 당장 겨울이 다가오는데 실을 잣는 방적기 가동을 그 소유권자가 거부했을 때, 공동체는 곧바로 동사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 어떻게 어떻게 손으로 실을 직접 뽑아서 옷을 만드는 데 성공했더라도, 그 옷을 운송하기로 한 사업자가 트럭의 운행을 거부한다면? 이런 식으로 생산과정이 원활히 작동하지 않도록 깽판칠 힘이 큰 자들은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생산의 결과물을 쉽게 수탈할 수 있다. 간명하게 자신이 소유한 기계 작동의 대가를 요구하는 것으로부터 최종 생산 결과를 교묘하게 조정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금전적 직업 종사자들은 공동체의 경제활동을 볼모로 잡고 언제라도 공동체의 피를 빨아낸다.

베블런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날강도 귀족(robber baron)[6]들의 행위가 이런 생산과정에 대한 깽판놓기에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한계급은 산업공동체 내부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여 살아가고 있다"[7]고 일갈한다. 현대의 영주들인 기업 소유자들은 가격 체계를 흐뜨러트리고, 금융 상품을 만들어 생산에 투입될 자원의 배분을 왜곡하고, 제도적으로 보장된 각종 권리들을 행사하여 생산과정을 거추장스럽게 만듦으로써, 결과적으로 생산자들이 충분히 생산해내지 못한만큼을 이득으로 챙긴다.

이런 분석결과 베블런은 부재소유권 제도, 현대적 가격체계, 금융상품 등 생산담당자와는 무관한 이익을 챙기기 위한 장치들이 생산의 가능성을 저해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현대 자본주의는 더 많은 생산이 가능한, 산업적 직업을 가진 자들이 관리하는 사회주의로 이행할 것이라 생각했다. 마르크스와의 차이점은 마르크스가 축적된 자본이 다시 스스로의 축적을 저해하는 일종의 피드백 과정으로 사회주의 이행을 논한 반면, 베블런의 깽판놓기는 시종일관 자연스러운 생산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 기술과 제도

무엇보다 마르크스와 베블런의 가장 큰 차이는 마르크스가 생산력과 생산체계를 이야기한 반면, 베블런은 기술과 제도를 이야기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가 증가된 생산력이라는 몸에 걸맞는 옷으로서 생산체계의 변화를 이야기했다면, 베블런은 발전된 기술 및 지식체계에 걸맞는 외피로서 제도 변화가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베블런에게서 제도란 집단에 의해 제재를 받는 관습이나 습관의 덩어리[8]인데, 제도는 인간 사회가 기술/지식을 활용하는 방식을 조정하고 규제하며, 그 결과 이를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금전적 직업 종사자들을 만들어낸다. 제도 변화는 기술 발전보다 빠르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그 결과 발전된 기술과 낡은 제도는 충돌을 일으키게 되며, 이 때 비로소 산업적 직업에 종사하는 자들과 금전적 직업을 가진 자들 사이의 대립이 첨예하게 부각된다.

흥미로운 것은 베블런이 기술적 요소와 제도적 기반을 분리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한국의 사례로 생각하자면 동도서기론에 설득력이 있다고 봤다고 할 수 있겠다.[9]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저 유명한 선두주자의 벌금(the penalty of taking the lead)이다. 먼저 기술을 개발하는 데는 많은 노력과 고통스러운 변화가 수반된다. 그렇게 등장한 기술 역시 낡은 제도로 인해 제 가능성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해당 기술을 골라서 받아들일 때는 그 개발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한편으로, 선행사례에 비춰 기술에 맞춘 적당한 제도를 새롭게 구성할 수도 있다.

베블런은 선두주자의 벌금을 설명하며 당대의 영국이 산업혁명을 먼저 일으켰음에도 그 잠재력이 한계에 달한 반면, 뒤늦게 산업화 대열에 뛰어든 독일이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을 사례로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선구자에게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이야기했다. 무엇보다 이 개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베블런이 역사를 선형적이지 않고 단절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봤다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기술, 지식체계라는 외적 충격이 전제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과학 기술이 단절적으로 발전한다면 제도의 변혁 역시 생각보다 극단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베블런의 관점이다.

  • 유한계급

한국을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에게 베블런은 유한계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유한계급은 영어로 leisure class인데, 이는 말 그대로 노는 계급, 여가를 즐기는 계급이라는 뜻이다. 요즘 용어로는 차라리 잉여계급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 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냥 하루하루 똥 만드는 기계일 뿐이지

베블런은 동료 학자였던 미드와 제임스 등의 영향 하에서 자존심을 인간 행위의 중요한 요소로 규정한다. 자존심은 동료가 평가하는 자신에 대한 반응으로 생겨나는 감정인데, 인간은 이 자존심의 상실을 끔찍히 두려워한다. 따라서 개인은 주위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특히 이웃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기 위해 경쟁하게 되는데, 이 경쟁 과정에서 쉽게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방법이 바로 여가를 빙자한 잉여로움의 과시이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이 생산과정에 종사하면서 노동해야 하는 한편, 수탈을 통해 이익을 얻으므로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일부 상류계층의 특화 전략에서 출발한다. 고귀한 나는 너희들과는 달리 땀흘려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베블런은 야만경제 시대에 유한계급이 처음 출현한다고 봤다. 야만경제에서 족장이나 왕들은 전쟁과 수렵 등으로 자신들의 잉여로움을 과시했다. 그러던 것이 스포츠 등의 형태로 발전해왔으며, 심지어 베블런은 대학 역시도 이러한 유한성의 발로라고 비꼬기도 했다.대학원생이라 죄송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베블런이 현대사회에서는 이런 경쟁의 "낭비적 표현양식"이 전 사회계층에 일반화된다고 본 것이다. 이는 근대에 접어들어 신분질서가 무너지며 경쟁해야 할 이웃의 범위가 넓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중산계급 부인은 남편과 주인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 대리적 유한의 모습을 드러낸다"[10]는 주장에선 베블런의 탁월함이 느껴진다. 한편 상류계급의 문화를 물려받을 때는 유한적인 생활태도를 같이 물려받아야 한다는 주장에서는 부르디외아비투스 개념의 단초가 엿보이기도 한다.

한국에서 사치품이 잘 팔릴 때마다 나오는 개념인 베블런재는 바로 이 잉여로움의 과시가 자본주의적 소비와 결합한 결과이다. 지위를 높여주는 잠재적 기능이 소비에는 담겨있는 것이라고 베블런은 지적했다.

  • 그 외에도

공무원들의 복지부동 행태를 설명하거나, 군대에만 들어가면 다들 바보가 되는 현상을 설명하기에 적당한 훈련된 무능력이 베블런이 주장한 개념이다.

1.3 트리비아

성격이 상당히 괴팍해서 밉보인 적이 많았고, 그 결과 대학을 세 번이나 옮겨다녀야 했다. 대학측에서도 베블런의 강의 태도에 실망해 매년 강사계약을 갱신하는 방식으로 고용했을 정도. 그의 높은 명성에 걸맞는 계약은 아니었다. 강의 태도나 성격도 성격이지만, 사실 시카고와 스탠포드 대학에서 비난을 받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방탕한 자유연애 때문(...) 받은 러브레터들을 숨기지 않고 집에 들고가서 부인에게 들킨다거나, 내연녀와 함께 유럽여행을 간다든가 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첫 부인과는 결국 이혼.

학점은 랜덤으로 뿌렸다고 한다. 학생들의 지적 수준을 경멸했다는 듯. 그럼에도 몇몇 제자들을 남겼다.

처음 전공은 칸트철학이었다. 어쩌면 마르크스와 그의 본질적인 차이는 처음 시작이 헤겔과 칸트였던 데서 발생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전공을 갈아탄 후에도 프래그머티즘을 위시한 철학, 사회심리학이나 인류학, 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케인즈의 초기 논문들도 숙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재혼한 부인은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는데, 둘 다 성격이 대국적이었는지 상당히 대충 살았다. 설거지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불도 잘 개지 않았다고. 그냥 평범한 자취생이네 옷을 빠는 게 귀찮았는지 버려진 종이로 옷을 만들자는 주장도 했다.

"좋은 연구는 하나의 질문을 두 개로 만든다"는 말을 남겼다. 연구자들이라면 다들 십분 공감할만한 명언. 선두주자의 벌금이나 훈련된 무능력 등의 개념어만 봐도 알 수 있듯 언어의 마술사였다. 그는 모든 사회현상에는 그 이면이 있다고 여겼고 이에 따라 그의 글에는 그의 가치판단이 단어들마다 섬세하게 숨겨져있는데, 그래서 현대의 베블런 독자, 특히 비영어권 독자들은 한 문장 한 문장 읽을 때마다 수많은 난관에 마주치게 된다...

2 관련항목

  1. "All business sagacity reduces itself in the last analysis to judicious use of sabotage." - "평화의 본질과 그 존속기간에 관한 연구"(1917) 중
  2. 신제도주의 경제학과는 다르다
  3. 윌리엄 제임스의 경우엔 베블런과 만났는지 확실치 않으나, 베블런의 작업을 볼 때 적어도 제임스의 영향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4. 루이스 코저, 신용하/박명규 역, "사회사상사", p.320
  5. 베블런은 지식이 발견되었느냐 자체보다는, 공동체에 받아들여졌는지의 여부를 매우 중요시했다.
  6. 19세기 미국에서 되살아 난 과점 또는 불공정한 사업 관행을 추구한 직접적인 결과로 각각의 산업을 지배하여 막대한 재산을 축적한 사업가와 은행가를 가리키는 경멸적인 의미의 용어이다. (위키백과 참조)
  7. "유한계급" 중
  8. 루이스 코저, 신용하/박명규 역, "사회사상사", p.322
  9. 동양의 제도를 그대로 유지한채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일수는 없겠지만, 기존 서양의 것과는 전혀 다른 제도를 새롭게 구성함으로써 서양의 기술을 수용할 수는 있다고 봤을 것이다.
  10. "유한계급"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