蘇定方
(592 ~ 667?)
1 소개
당나라의 무장. 본래 이름이 열(烈)이고, 정방은 자이기 때문에 소열이라 불러야 옳겠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소정방이라 칭하는게 일반적이다.[1]
2 일생
하북 출신으로 당태종때부터 장수로 활동해 이정을 따라서 동돌궐 정벌에 참여했다. 꾸준히 전공을 쌓아 왔으나 그가 당을 대표하는 장수로 부각되게 된 것은 서돌궐 원정에서였다.
655년 서돌궐 내에서 내분이 발생하자 이 기회를 틈타 정지절을 총지휘관으로 삼아 공격한 당군에 전군총관으로 종군한 소정방은 서돌궐군 2만여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고, 이때부터 당 군부의 핵심 인물로 자리매김하였다.
657년, 당고종은 서돌궐을 정벌할 것을 결정하고 소정방을 필두로 임아상, 소사업 등 당측 장수와 아사나마사, 아사나보진 등 기미부족에 속한 이민족 번장들을 지휘부로 삼아 서돌궐 공략을 시작하였다.
가장 선두에 있었던 것은 소정방군이였는데, 보병 1만여와 회흘 기병대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있었다. 서돌궐측은 이런 소정방군을 제거하기 위해 기병 10만여를 동원했는데, 이런 압도적인 전력 차이와 양군의 전투 기록에서 여타 당군의 지원과 관련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볼때 유목 기병의 기동력을 살려 흩어져 진군하는 당군을 각개격파 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소정방군은 금산이라 불리는 지역에서 돌궐측 부대 하나를 격파한 후 전진하였으나 예질하에서 서돌궐군 본대와 조우, 위기에 처한다. 서돌궐측이 노린 대로 소정방군과 서돌궐군의 전력 차는 현저하였던 것. 그러나 이 예질하 전투에서 소정방은 강 근방의 고지대를 선점한 후 보병 1만여로 서돌궐군 10만의 세 차례에 걸친 맹공을 모두 튕겨내는 괴력을 발휘하였고, 이에 전열이 흐트러진 서돌궐군에 대해 자신이 스스로 회흘족 기병을 지휘, 역습을 가해 서돌궐측을 대파해 버리고 만다.
거기다 이후 퇴각하는 서돌궐측을 거듭 추격하였고 당의 맹공에 투항하는 부족이 늘어나면서 서돌궐 세력은 빠른 속도로 소멸해 갔다. 소정방은 투항하는 부족들은 아사나마사 등 후방의 당군에 맡겨버리고 자신은 계속 서돌궐측 수뇌부를 추적했는데, 폭설이 내리자 당군이 오지 못하리라 안심하고 있던 서돌궐측에 대해 200리를 돌파해 기습을 가하는 것으로 응수했고, 결국 여기서도 깨진 서돌궐 가한을 포함한 지도부는 중앙아시아 서역지역으로 도망갔다가 그 지역 국가들에 의해 당에 인도되어 멸망해 버렸다.
이 전공 한방으로 소정방은 설인귀 이상의 위상을 지닌 장군으로 솟아 올랐다. 단기포스 하나는 역대급이다.
이후 660년, 당 고종이 백제를 정벌할 것을 결정했을때 이정도 위상을 지니고 바로 3년 전에 엄청난 전공을 세워버린 소정방이 대총관으로 임명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였으며, 백강 하구에서 방어전을 편 백제군을 가볍게 격파해 버리고 전진한다. 계백의 저항으로 인해 신라군과의 합류가 늦어지긴 했으나 김유신이 계백까지 밀어버리고 합류하면서 사실상 백제의 멸망은 확정되었으며, 이후 압도적인 전력으로 사비성을 함락, 웅진으로 도망간 의자왕을 사로잡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후 이듬해인 661년에는 고구려를 침공해 평양성까지 쳐들어갔고, 일본서기에 따르면 때마침 평양에 맹추위가 몰아닥처 대동강이 얼어붙자 그 위로 공성무기를 올리고 공세를 취해 고구려를 위기로 몰아넣었다고 한다.[2] 그러나 고구려의 반격에 부딪처 자체 전력으로 평양 함락에 실패했고, 철륵의 반란으로 일부 군대가 빠져나간데다 사수 전투에서 합류하기 위해 남하하던 방효태군이 괴멸당하자 위기에 빠졌지만 김유신이 지휘한 신라군의 목숨을 건 식량 보급을 통해 목숨을 건져 철수하였다.
이후 667년, 소정방은 사망한다.
3 독살설 ?
KBS 역사스페셜 등에서는 소정방이 김유신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대표적인 근거가 신구당서에서 소정방의 죽음을 너무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 서돌궐 평정때 보여준 미칠듯한 공적에다 백제까지 멸망시켰는데도 니들 왜 소정방의 추증에 대해서 건의 안함둥?이라고 하고있는 것이 수상하다는 것이다.
거기다 경상북도 상주시와 문경시 사이의 3번 국도에는 "뙤다리"라 불리던 다리가 있었다. 뙤다리를 한자로 쓰면 당교, 즉 당나라 다리라는 뜻이 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이 소정방을 초대해 잔치를 베풀었는데 사실 소정방을 유인해서 독살하려는 게 목적이였고, 결국 소정방과 당군들이 모두 죽자 김유신은 이들의 시체를 상주 인근에 묻었는데 그 자리가 바로 당교라는 것이다.
소정방의 살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평양성 함락후 소정방이 당으로 병력을 물리지 않고 신라 쪽으로 남하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교가 있는 곳은 문경시로 통하는 곳이며 문경에는 신라로 통하는 오랜 전략적 요충지이자 교통로인 새재(조령)이 있다. 소정방이 이곳에서 죽었다는 것은 그가 이곳까지 내려왔다는 의미이며 이는 결국 '신라까지도 집어삼킬 속셈으로' 내려왔다고 볼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중국 사서가 소정방의 죽음을 간략하게 기록한 것도 소정방이 신라에 의해 피살당하는 (당의 입장에선)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았기 때문에 그것을 숨기기 위한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수있다는 것이다. 소정방이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은 탓에 당 조정의 신료들은 소정방의 추증을 감히 논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는 것.
하지만 이 기록은 많은 논란을 일으킨다. 중국 사서에는 소정방이 독살되었다는 기록이 없는데 한국 사서, 그것도 신빙성을 늘 의심받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사서에서는 667년에 소정방이 죽은 걸로 기록하고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총장 원년 무진에 당군이 신라에 군자를 긴급요청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일연은 주에서 "이 일을 소정방이라 적은 것은 잘못이며 이적의 일일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이 기록이 나당동맹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소정방으로 대표되는 당나라에 대한 당시 신라인들의 적대감 표출과 김유신의 영웅화 차원에서 탄생한 설이다. 혹은 소정방의 부하가 과다한 충성심으로 병력을 이끌고 신라로 향하다가 김유신의 병사에게 죽임을 당한것을 소정방이 당한 걸로 왜곡한 기록이라는 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