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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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서 관장마황조전(關張馬黃趙傳)
관우장비마초황충조운

ZhaoYun.jpg
趙雲
(170? ~ 229)

勇績當陽著(용적당양저) : 쌓은 용기 당양에서 드러났으니

常山累建功(상산루건공) : 상산이 여러 차례 공을 세웠네.
彼軍都似鼠(피군도사서) : 저 군사는 모두들 쥐떼와 같고
此將竟如龍(차장경여룡) : 이 장수는 분명히 용과 같구나.
膽量魁西蜀(담량괴서촉) : 담력은 서촉에서 으뜸이 되고
威名紀漢中(위명기한중) : 위명은 한중에서 손에 꼽히네.
兩番全幼主(양번전유주) : 두 번을 어린 주인 보전시키니
千載更誰同(천재갱수동) : 천년 동안 또 다시 누가 있으리.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나라의 장수.

기주 상산(常山) 진정(眞定) 사람.[1] 는 자룡(子龍).[2] 시호는 순평후(順平侯).

조운별전에 따르면 조운은 신장이 8척에 용모가 남자다웠다.

2 정사

기존에 진수가 쓴 촉서 조운전은 아래에 있는 내용이 전부로 매우 허전하다. 대중들이 흔히 알고 있는 조운의 활약상은 이후 배송지가 조운별전에서 인용하여 주석으로 보충한 것들이다.

조운(趙雲)은 자(字)가 자룡(子龍)이고 기주 상산(常山) 진정(眞定) 사람이다. 본래 공손찬의 세력에 속했는데, 공손찬이 유비에게 전해를 도와 원소를 막게 하니 조운이 이에 수종(隨從)하여 그를 위해 기병을 지휘했다.

유비가 당양(當陽) 장판(長阪)에서 조조에게 추격당해 처자를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나자, 조운이 유선감부인을 보호하여 모두 위난을 면할 수 있었다. 이후 아문장군(牙門將軍)으로 올랐다. 유비가 촉(蜀)으로 들어갈 때 조운은 형주에 남았다.

유비가 가맹(葭萌)에서 환군해 유장을 공격하고 제갈량을 불렀다. 제갈량이 조운과 장비 등을 이끌고 강을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며 군현들을 평정했다. 강주(江州)에 도착하자 조운을 나누어 보내 외수(外水)를 따라 강양(江陽)으로 올라가게 하니 성도에서 제갈량과 합류했다. 성도가 평정된 뒤 조운을 익군장군(翊軍將軍)으로 삼았다.

건흥 원년(223년)에 선주는 조운을 중호군(中護軍),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임명하였고, 영창정후(永昌亭侯)에 봉했다가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올렸다.

건흥 5년(227년), 조운은 제갈량을 수행하여 한중에 주둔했다.

그 이듬해(228년), 제갈량이 출군하며 야곡도(斜谷道)로 행군하겠다고 거짓 정보를 퍼뜨리자 조진이 대군을 보냈다. 제갈량은 조운과 등지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 하고 자신은 기산을 공격했다. 조운과 등지의 군사들은 약하고 적의 군세는 강하여 기곡(箕谷)에서 실리(失利)했으나, 군사들을 거두어 굳게 지켰으므로 대패에 이르지는 않았다. 군이 퇴각한 뒤 진군장군(鎭軍將軍)으로 강등되었다.

건흥 7년(229년)에 죽었다. 시호를 추증해 순평후(順平侯)라 했다.

(관우, 장비, 마초의 평 이후) 황충, 조운은 굳세고 용맹하여 아울러 조아(爪牙=매우 쓸모 있는 사람이나 물건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가 되었으니 (灌), (滕)의 무리로다.

2.1 공손찬 휘하에서

원소가 책략을 사용하여 한복에게서 기주를 뺏자, 따르는 자들[3]을 거느리고 공손찬 휘하로 들어갔다.

공손찬은 기주인들이 원소를 따르는 것을 걱정하던 도중에 조운이 귀부해 온 것에 기뻐하여 조운을 놀리며 말했다.

듣기로 기주 사람들은 모두 원씨(袁氏)를 원한다던데 그대는 어찌 홀로 마음을 돌리고 미혹되어 이에 반(反)하는 것이오?

조운이 답했다.

천하가 흉흉(=술렁거리어 매우 어수선하다.)하여 누가 옳은지 알 수 없으나 백성들이 거꾸로 매달리는 것과 같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여 비주(鄙州=자신의 주를 겸칭)에서 논의하기를 어진 정치가 있는 곳을 따르기로 하였으니, 그런 뜻에서 귀부한 것일 뿐 원공(袁公)을 소홀히 하거나 명장군(明將軍)을 사사로이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하여 공손찬과 함께 전투에 나선다.

그 뒤 원소와 조조의 연합 세력이 공손찬과 원술 그리고 유비 등이 연합하여 만든 세력과 맞붙은 전쟁에서 유비가 청주자사 전해를 도와 고당이라는 곳에서 병력을 이끌고 있을 때, 조운은 유비의 기병대 지휘관이 되어 그와 첫 인연을 맺었고 유비가 항상 조운을 접견하니 조운은 그에게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이후 형이 죽자 공손찬에게 이를 고하고 낙향했는데, 그가 장례를 핑계로 공손찬으로부터 떠나려는 것임을 직감한 유비와 손을 맞잡으며 애틋하게 작별했다. 조운은 "끝내 덕(德)을 저버리지는 않겠습니다."라고 말하고 훗날을 기약했다.

2.2 유비에게 임관

약속대로 유비가 원소에게 몸을 의탁할 때 업성에서 유비 휘하로 합류한다. 유비는 조운과 한 침상을 쓰며 그를 두텁게 대하였으며, 그를 시켜 원소 몰래 수백 명의 사병들을 모으게 했다.

별전에 따르면 유비가 서주에서 패배해 원소에 의탁했을 때부터 유비와 함께 했으니 역시 관우와 장비 다음가는 구장이었다. 인재를 보는 눈이 탁월하였던 유비가 조운과 한 침상에서 함께 누워서 동고동락했을 정도로 조운은 유비의 최측근이 되었다.

아래에도 나오지만 하작은 유비가 공손찬과 함께 할 때 이미 조운을 휘하로 거느렸는데,(즉, 이 시점에서 조운은 공손찬에서 유비로 주군을 바꿨다는 것) 별전에서는 조운이 업에서 유비 휘하로 들어갔다고 하니 이를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정사 조운전을 따르면 조운은 처음부터 공손찬 휘하에 있다가 이후 유비가 공손찬에 의탁할 때 유비 휘하가 되지만 조운별전을 따르면 처음에 조운은 한복이 다스리던 기주에서 말단 관리로 일하다가 공손찬 휘하에 예속되었다가 유비를 도와 기병을 지휘하다가 낙향한 뒤에 이후 5년간 행방이 불명해 진 뒤 유비가 원소에게 의탁할 때 유비에게 합류하는 것이 된다.

별전을 긍정하는 쪽에서는 하작의 해석에 오류가 있다고 보는데, 본전에서는 딱히 조운이 유비 휘하로 들어갔다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며, 단지 공손찬은 부장 조운을 유비에게 파견하여 유비를 도와 기병을 지휘하게 한 것이다. 이후 조운이 업에서 정식으로 유비군에 합류한 부분은 본전에서는 생략되었지만 별전이 보충했다고 보는것이다.

별전에 따르면, 유비가 하후돈을 박망(博望)에서 물리쳤을때 하후란이란 자를 사로잡았는데, 하후란은 조운의 고향 사람으로 서로 아는 사이였다. 조운은 유비에게 그를 살려주도록 청하고 하후란이 법률에 밝다고 천거하여 군정(軍正)으로 삼도록 천거하였으나 사적으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같은 고향을 둔 사이이기에 교분이 있었을 법 하지만 조운은 공정성을 지키기 위하여 그와 교류하지 않았다. 그의 처세관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3 장판파

선주가 조공(조조)에게 쫓겨 당양(當陽)의 장판(長阪)에까지 이르게 되자 처자(妻子)를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났는데 조운은 유비의 어린 아들(유선)을 품에 안고 감부인을 보호하여 모두 화를 면하게 했다. - 조운전

장판에서 조운은 조조군에게 쫓기는 급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유선과 감부인을 구하였다.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유비의 후계자를 구하여 유비의 품에 안긴 충신인 것이다. 단 연의나 각종 매체에서 보통 그려지는 조운의 용맹무쌍함과는 달리 조운과 조조의 오천 경기병 사이에 큰 충돌은 없었다고 여기는 것이 정설이다. 그래도 서서의 모친이나 유비의 두 딸이 붙잡히는 등의 상황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마냥 순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별전에서 조운은 연의에서처럼 무공이 높여지기 보다는 군주의 신임을 부각시켰다. 어떤 이가 조운이 북쪽으로 떠났다(즉, 조조군에게 항복하러 갔다)고 유비에게 고하자 유비가 수극을 던지며 조운은 자신을 버릴 리 없다고 말했는데, 얼마 뒤 유비가 숨어 있던 곳에 조운이 이르렀다고 한다.

2.4 형주에서

위기에서 벗어난 후 조운은 아문장군이 되었는데, 아문장군은 아기(牙旗) 즉 대장기를 꽂아놓은 부대, 즉 사령관이 머물고 있는 부대의 책임자이다. 쉽게 얘기해서 사령관의 직할부대를 지휘하는 역할이다. 그런고로 조운은 유비 곁에서 최측근으로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조운은 유비의 형남 평정 때도 종군하여 편장군이 되었고, 기존의 계양태수 조범을 대신하여 계양태수를 겸했는데, 계양의 위치상 조운은 후방을 안정시키는 업무와 전방에 보급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생각된다.

번씨와의 일화가 별전에 그려진다. 조범은 유비에게 항복한 뒤 과부가 된 자신의 미인 형수 번씨를 조운에게 재가시키려고 한다. 자신의 입지를 위한 연을 만들어 두려는 것이었는데, 조운은 "우리가 서로 동성(同姓)이니 경의 형이 곧 내 형과 같소."라며 굳이 사양한다. 그녀를 맞아들이도록 권하는 또 다른 사람이 있자 조운은 조범이 급박하게 항복했으니 속마음을 모르며 천하에 여자가 적지 않다며 거듭 사양한다. 훗날 정말로 조범은 유비를 배신하고 달아났지만 조운은 조범이 제안한 혼담을 거절했기 때문에 이 일에 관련되지 않았다.

선주가 익주(益州)로 들어갈 때 조운을 남겨 유영사마(留營司馬)의 일을 보게 했다. 이때 선주에게 손권의 누이 손부인(孫夫人)이 있었는데, 그녀는 교만하고 굳세어 방자하고 오(吳)나라의 관리와 병사들을 많이 거느려 법을 따르지 않았다. 선주는 조운에게 특별히 내부의 일을 장악하도록 하여 이를 엄중히 바로 잡도록 하였다. 손권은 유비가 서정길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많은 배를 보내 누이인 손부인을 데려가려고 했다. 손부인은 후주(유선)를 오나라로 데리고 가려고 하였지만 조운은 장비와 함께 강을 끊고 후주를 데리고 돌아왔다. - 조운별전

이후 유비가 입촉하자 형주에 남아 사마의 일을 맡았는데, 이 사마를 원문에서 유영사마(留營司馬)라고 한다. 유는 남아있는 사람에게 주는 관직이다. 영(營)은 군영이다. 그러므로 유영이란 원래 군영(軍營)이 있는데, 그 군영의 책임을 진 사람이 어떤 일로 떠나게 되어 본래 설치된 장소에 남아있게 되는 군영이다. 그러므로 유영사마란, 남아있는 군영에서 군사 업무를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경우에 유비가 촉으로 들어간 뒤 손부인이 강하게 행동하며 기강을 흐릴 것을 우려하여 특별히 조운에게 내부의 일을 장악하고 엄중히 바로 잡도록 한 것이다. 유비가 입촉하기 전에 자신이 떠난 뒤 손부인을 억제하기가 쉽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별도로 조운에게 유비 집안의 일을 맡도록 한 것인데, 이를 통해 조운에 대한 유비의 특별한 신뢰를 엿볼 수 있다. 참고로 유비가 입촉할 때 형주에 남았던 사람은 조운 말고도 관우와 장비 그리고 제갈량 등이 있었다. 물론 성격이 조금 다른 것이 문제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유비가 그런 면에서 조운을 가장 신뢰했다는 것이다. 군주가 없을 때 군주의 집안일을 맡길만한 능력을 지녔던 인물이 바로 조운이었던 것이다.

유비가 익주(益州)로 들어가고, 오나라는 사자를 보내 손부인을 맞으려고 했다. 손부인은 태자를 데리고 오나라로 돌아가려고 했다. 제갈량은 조운(趙雲)에게 병사를 지휘하도록 하여 장강을 끊어 태자를 남도록 하였다 - 한진춘추

그러나 별전의 기록만을 보면 조운이 단독으로 병력을 지휘한 것 같이 생각되지만 목황후전에 주석으로 달린 한진춘추의 기록을 보면 명령을 내린 사람은 제갈량이었으며, 따라서 조운은 제갈량의 재가를 받아 행동한 것이다.

2.5 유비의 입촉

유비가 가맹(葭萌)에서 환군해 유장을 공격하고 제갈량을 불렀다. 제갈량이 조운과 장비 등을 이끌고 강을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며 군현들을 평정했다. 강주(江州)에 도착하자 조운을 나누어 보내 외수(外水)를 따라 강양(江陽)으로 올라가게 하니 성도에서 제갈량과 합류했다. 성도가 평정된 뒤 조운을 익군장군(翊軍將軍)으로 삼았다. - 조운전

정사의 기록에서는 성도 평정 이후 어느 시점에 익군장군이 된 것으로 나오는데, 화양국지에서는 이를 219년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자치통감에 따르면 하후연 전사 후 조조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한중에 왔을 때 조운을 익군장군이라고 명시한다. 조조가 완전히 물러간 후 한중왕에 올랐으므로 시기상으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익군장군의 시기에 대한 시점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정사 조운전 : 익주 평정 이후 어느 시점인 214년부터 219년 봄까지. 혹은 정남장군이 된 223년 이전까지도 가능하다.

2) 자치통감 : 조조의 한중 참전 전후로 최소 219년 봄 이전. 이 경우도 망라 기간이 길다.
3) 화양국지 : 유비 한중왕 등극에 맞춘 219년.

다만 유비가 219년 한중왕에 즉위하면서 대대적인 개편과 승진이 일어났으니 아마 화양국지의 명시가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여기서 익군장군은 기존에 없는 장군직이며, 후대에도 쓰이는 경우가 많지 않아서 그 정체가 아직까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다. 익군장군과 관련하여 주목해 볼만한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하자면, 먼저 익군장군은 유비가 생전에 직접 만든 두 가지 장군직(제갈량의 군사장군과 조운의 익군장군)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또한 이 시기는 장합, 하후연, 조조로 이어지는 위군과의 전투가 일어난 시기이다. 익군장군의 대략적인 역할에 대해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잡호장군이었다는 것이다. 잡호장군의 특성상 익군(翊軍), 즉 군을 돕는, 군을 보조하는 역할이었을 확률이 높아 보인다. 익(翊)의 특성상 본대 중앙군 기준으로 좌우익에 해당하는 위치였을 수도 있다. 혹은 익주를 장악하고 국정에 집중해야 했던 유비가 수족이자 그림자로서 움직여줄 조운을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 주었을 수도 있다.

한편, 익군장군의 모델이 전한의 익군교위라는 설이 있다. 익군교위는 남군 소속으로 황궁 수비를 전담하는 관직이었으며, 황궁 문들을 숙위하는 병사들의 지휘관이었다고 한다. 이 익군교위를 업그레이드 해서 익군장군이 되었고, 이 역할이 대충 군주 유비의 직속부대의 지휘관이라는 설이다. 별전에 의하면 그 유명한 일신시담 사건 당시, 유비가 조운의 진영을 시찰했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시찰이라는 표현이 꽤나 의미심장하다. 물론 익군교위 모델설은 흥미롭지만 증거가 부족한데, 일단 익군교위를 업그레이드 시켰을 거라는 점은 추측이며, 기록에서 아무런 연관 관계를 찾을 수 없다. 또 익군교위 자체가 전한 시대에 사용되고 후한 시대에는 보이지 않는데, 유비가 굳이 전한대의 익군교위를 끌어다가 쓸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도 의문이며, 이미 전한대에서 사라진 익군교위를 알고 있었을 지도 의문이다.

조운 이후로 촉에서는 곽익 정도만 임명되었을 정도로 익군장군은 임시직의 성향이 보이는데, 심지어 곽익의 익군장군 때도 대체 그 정체가 무엇인지 모호하다. 참고로 조운이 익군장군이던 시기에 관우는 전장군, 마초는 좌장군, 장비는 우장군, 황충은 후장군에 임명되었다.[4] 이에 따라 관장마황은 모두 어깨에 힘좀 줄 수 있는 요직으로 임명되었는데 조운은 임시직 성향이 짙은 익군장군에 임명된 것이 그의 능력이 생각보다 특출나지 않았다거나, 전공이 다른 이들에 비해 부족하기 때문에 중용되지 않은 것이 아니냐라는, 조운 평가 절하의 한 가지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저평가의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그렇게 따지면 제갈량의 군사장군도 유비가 만든 임시직이기 때문이다. 유비가 장군직을 만들어 줄 때는 그만한 이유와 중요도가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반대로 임시직 성향이 짙기 때문에 시국에 비추어 봤을 때 오히려 더 중요하다고 보는게 맞다. 비상대책위원회는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임시적인 성향이 짙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이다. 임시직이 괜히 임시직인가? 평시보다 위기에 필요하기 때문에 임시직인 것이다. 조운의 쓰임새가 애매 했다면 그냥 애매한 장군직을 주지, 굳이 없는 장군직을 새로 만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시기적으로 봤을 때에도 익주가 평정된 지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으며, 한중왕 즉위 이후였기 때문에 세력 내 융합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또 이 시기는 위의 대대적인 침공과 겹치는 기간이다. 따라서, 그런 시기에 유비가 최측근인 조운에게 맡긴 것이 익군장군이기 때문에 그것이 일반적인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했을 가능성이 있다.

조운의 익군장군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운의 위치와 영향력, 행적 등을 고려해보았을 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하찮게 여길만한 것이 결코 아니다. 조운은 무장이면서도 중요한 정치적인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유비의 최측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익군장군은 유비가 조운에게 맡기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서 준 것이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익군장군이라는 장군직 자체의 품계나 역할보다도 오히려 조운이 임명되었기 때문에 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익주가 평정된 뒤 당시 사람들이 의논하여 성도의 옥사(屋舍)와 성 바깥의 과수원, 뽕밭을 제장들에게 나누어주고자 했다. 조운이 이를 반대하며 말했다. "(한무제가 집을 하사하자) 곽거병흉노를 아직 멸하지 못했으니 집이 쓸모없다고 하였는데 또한 나라의 적이 비단 흉노만이 아니니 아직 안락을 구해서는 안됩니다. 천하가 모두 평정될 때를 기다려 각자 고향로 되돌아가 본래 땅에서 농사짓는 것이 마땅합니다. 익주(益州)의 인민(人民)들은 처음 전란을 겪었으니 논밭과 집들을 모두 되돌려주고 이제 이에 안거(安居)하며 생업에 복귀하게 한 뒤에 부역하게 하고 조(調)를 거둔다면 그들의 환심(歡心)을 얻을 것입니다." 이에 선주(유비)가 이를 따랐다. - 조운별전

익주가 평정된 이후에 조운이 중요한 회의에 참석해 발언권을 강력하게 어필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여기서 조운은 주목할만 하게도 성도의 토지를 하사하는 문제와 관련해 다수의 의견에 반대하여 그 뜻을 관철시킬 정도로 영향력이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 발언권은 중요한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 대다수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뒤집을 수 있을 만큼의 발언권이다. 익주 평정 후 성도 내의 주택, 과수원, 뽕밭을 제장들에게 나누어주려는 회의에서 조운은 반대하며, 유비가 이를 따르면서 마무리 된다. 이 일화는 보통 조운의 강직함과 공정함, 대국적인 안목, 사리사욕과 거리가 먼 성격 등과 관련되어 인용되곤 하지만, 사실 조운이 가진 엄청난 입지와 실질적인 영향력을 보여준다. 회의 자체가 제장들에게 상으로 나누어주려는 회의였고, 자치통감에 의하면 논의에 참여한 사람들 중 대다수가 그것을 상으로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조운의 발언은 반대라는 표현이 사용될 정도로 대부분의 제장들의 의견과는 정면으로 배치되었을 것이며, 이는 다른 이들에게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어이, 조장군, 대체 왜 그래? 그런 상황에서도 유비는 조운의 주장을 받아들이는데, 이는 분명 조운의 발언권에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조금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보면, 익주의 중심지인 성도의 주택, 그리고 과수원, 뽕밭을 나누어주는 것은 지극히 정치적인 사안인 것이다. 이것 자체가 주거지, 토지, 경제인데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특히 뽕나무는 당시에 익주를 부자 동네로 만들어주는, 부의 근원이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다. 일단 뽕나무의 열매는 오디라고 하여 식용으로 쓰이며, 약재로도 쓰인다. 또 나무는 가구 재료로 활용된다. 가장 중요한 쓰임새로 잎이 누에의 사료로 사용되는데, 비단이 핵심 수출품이었던 익주 입장에서 봤을 때 뽕나무가 부의 근원이라는 말은 결코 과언이 아니다. 뽕나무는 그야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버릴 게 없이 모두 활용되는 촉 경제의 근간이었다. 이것을 익주의 백성들에게서 빼앗아 공을 세운 제장들에게 나누어 줄 경우 유비의 중신들이 촉의 지주이면서 동시에 재벌이 되는 것인데, 이는 익주의 경제 체제를 흔들어버릴 수 있는 문제였다. 유비의 신하들에게 있어서 사리를 채우는게 나쁠 것이 없으니 대부분 동조했다는 건 이상할 것이 없는 문제다. 다시 말하지만 조운은 이런 상황에서 홀로 정면으로 배치되는 의견을 내고 군주의 최종 동의를 얻어냈을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과 발언권,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2.6 한중 공방전

하후연이 패하자 조공(조조)이 와서 한중 땅을 다투었고 북산(北山) 아래에 군량(米)을 운반하여 수천만 포대에 달했다. 황충이 가히 이를 탈취할 수 있다 하였고 조운의 병력이 황충을 수행하여 쌀을 탈취하려 했다.

황충이 기한을 넘겨도 돌아오지 않자 조운은 수십기를 거느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위(圍)를 나서 상황을 살펴보러 갔다. 곧 조조가 거병하여, 조운은 조조의 전열에 공격받았다. 이에 싸우는데, 적의 대군이 도착해 핍박받는 형세가 되자, 적에게 돌진하여 한편으론 싸우고 한편으론 물러섰다. 조조군이 패했다가 다시 합치자, 조운이 이를 파하고 위로 급히 되돌아왔다.

장수 장저가 부상당하자 조운이 다시 말을 달려 영(營)으로 가 장저를 맞이했다. 조조의 군사가 이를 추격하여 위에 이르자 위 안에 있던 면양장 장익이 문을 닫고 막으려 했다. 그러나 조운이 영 안으로 들어와 문을 활짝 열고 싸우지 않는 것처럼 군기를 눕히고 북을 멈추었다. 조조의 군사는 조운이 복병을 뒀을까 의심하여 물러났다. 조운이 하늘을 뒤흔들 듯 북을 올리며 뒤에서 조조의 군사들에게 융노를 쏘아대니 조조의 군사가 놀라고 어지러워 자기들끼리 서로 짓밟고 한수에 떨어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선주(유비)가 다음날 아침 조운의 영위(營圍)로 친히 와서 전날 싸운 곳을 둘러보고 말했다. "자룡(子龍)은 일신이 모두 담덩어리(膽)로다." 음악과 술자리를 베풀어 저녁까지 이어졌고, 군중(軍中)에서는 조운을 일컬어 호위장군(虎威將軍)이라 했다. - 조운별전

이후 한중 정벌전에서는 황충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기록에서 처럼 황충이 적의 군량을 탈취하기 위해 나갔으나 오랜 시간 돌아오지 않자 상황을 보러 경무장한 수십 기의 기병만 이끌고 나간다. 그런데 이 때 갑작스럽게 조조의 대군과 맞닥뜨리게 된다. 근데 이 상황에서 조운은 적진으로 돌진하여 싸운다. 경무장한 수십 기의 기병이 입힐 수 있는 피해가 한정적일테니, 경기병 특유의 게릴라 형식으로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며 적의 진형을 헤집어 놓는 정도였을 것이다.

이후 조운의 기병대를 잡으려고 조조군이 추적하자, 공성계로 물리쳤다. 조운은 이 일로 진영 내에서 호위장군(호랑이의 위세를 가진 장군)으로 불렸으며, 유비는 몸소 그곳을 시찰하며 조운이 일신시담(一身是膽)하다고 했다. 이는 조운의 대담함과 지략, 용맹함을 보여주는 기록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단 이 일화는 별전류의 기록이 그렇듯 장익전과 황충전에 모두 실려있지 않아 교차 기록이 전혀 안되며 사람에 따라서는 아예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별전류의 특성 상 적은 군사를 물리친 것을 조조의 대군이라 과장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한중 공방전 자체가 난전 양상이었으며, 언급된 조조의 대군은 조조의 본대가 아닐 확률도 있다. 사실 대군이라는 것도 당시 조운이 이끌고 나갔던 수십 기의 병력에 비해 대군이라는 표현인데, 그 규모가 수백 내지는 수천에 불과한 규모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진을 지키고 있던게 장익이라면 이 공은 매우 큰 공일텐데 장익전에서는 찾아볼 수 도 없으며 애초에 한중전 참여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이 일화는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도 분명 기재하고 있다. 별전의 내용을 신뢰했다는 의미이다. 물론 장익이나 장저, 면양장에 대해서는 내용을 삭제했지만[5], 황충을 구하러 갔다는 내용은 분명 기재되어 있다. 황충전에도 실려있지 않지만, 별전이나 자치통감에서도 조운이 황충을 구하러 나갔다고만 되어 있지, 황충을 실제로 구했다거나 중간에 황충과 만나 합쳤다거나 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 즉 황충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이 경우 황충전에 굳이 기록될 필요는 없다. 별전의 내용이 사실이라 쳐도 황충의 행동은 수많은 군사 작전의 일부에 불과할테고,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고 보여지니 굳이 기록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이기도 하다.

후출사표에서 조조가 북산에서 대패할 뻔했다는 사례를 위의 내용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존재한다.[6] 다만 자치통감에서는 후출사표에서는 북산(北山)이 아닌 백산(伯山)으로 명기하고 있다. 국내 자치통감 번역자인 권중달 교수는 이를 조조가 오환족을 토벌했던 백랑산 전투라는 주석을 달아 조운과는 무관한 전투로 해석하고 있다.

2.7 이릉대전

손권이 형주를 침범하자 선주는 대노하여 정벌하려 했다. 조운이 간하여 말했다. "국적은 손권이 아니고 조조입니다. 먼저 위를 멸하고 오는 스스로 항복하게 해야 합니다. 조조가 죽었지만 아들 조비가 한나라를 찬탈했습니다. 마땅히 민심을 따라 속히 관중을 도모하여 황하와 위수를 점거한다면 흉악한 역적을 토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관동의 뜻있는 선비들은 반드시 군량을 가지고 말을 달려와서 대왕을 맞이할 것입니다. 위를 놔두고 먼저 오나라와 싸우시면 아니되옵니다. 오와 싸우기 위해 병력을 일으켜 교전한다면 싸움은 간단히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선주는 듣지 않고 동쪽(오)을 정벌하러 진격했는데 조운은 강주를 감독하게 했다. 선주가 자귀에서 패하자 조운은 병사들을 이끌고 영안에 이르렀지만 오의 군대는 이미 물러난 뒤였다. - 조운별전

손권에 의해 관우가 죽고 형주를 빼앗기자 분노한 유비는 오나라를 치러 간다. 조운은 유비 옆에서 직접 동오 정벌을 만류할 수 있을 정도로 측근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데 조운은 여러 이유를 대며 유비를 만류한다. 한실복권이라는 대의를 내세우는 유비는 위를 멸하는 것이 우선해야 할 과제고, 조비의 찬탈 이후 아직 조위가 민심을 진정시키지 못한 틈에 위를 치면 유비의 위명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서북 지방의 호족, 백성들의 큰 호응을 얻을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7] 이 역시 조운이 가진 대국적인 안목과 정세에 대한 냉철한 판단력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거기에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진, 매우 분노한 군주에게 직언하는 깡 역시도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평생을 모셔 일한 군주의 불호령과 같은 결정에도, 이치에서 벗어날 경우 단호하게 안됩니다!를 외칠 수 있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인 것이다.

그러나 유비는 원정을 감행하고, 조운으로 하여금 강주를 감독하며 후방을 맡게 한다.[8] 이 강주는 성도와 형주를 잇는 길이었기 때문에, 보급과 후방 안정화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제갈량이 북벌에서 패배하지 않았음에도 여러 차례 군을 물려야 했던 것이 주로 군량과 보급 문제였음을 감안하면 조운이 후방인 강주에 머무르며 진수했다고 하여 결코 중요도가 낮은 것이 아니다.[9] 게다가 단순한 보급 차원의 후방이 아니라, 유사시 합류하여 참전이 가능할 정도로 규모와 전투력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실제로 합류하기도 했다.

다만 계한보신찬에 따르면 익주 평정 후 비관이 강주도독이었으며 223년 이후에는 이복이 강주독을 맡았기에 실제로 조운이 강주도독으로 있으며 실권을 가졌다고 보기는 매우 힘들다. (조운이 이 이후에도 지방을 관리하는 직책으로 빠진 것이 없는 것을 보면 명백하다.) 조운별전에서 독강주를 맡았다는 내용이 계한보신찬과 충돌하지만 이는 이릉전을 지원하기 위한 일시적인 임시 군사감독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2.8 남만 정벌?

건흥 원년(223년), 중호군(中護軍),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임명하고 영창정후(永昌亭侯)에 봉했다가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옮겼다. - 조운전

유선 즉위 후에는 중호군, 정남장군에 임명되었고 영창정후에 봉해진다. 여기서 중호군은 호군의 일종으로 고급 군대 요직이다. 중령군, 중도호 등과 함께 금군을 지휘하고, 무관을 선발하며, 무장들을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중호군은 중앙군의 성향이 매우 강하며, 무관을 선발하고 무장들을 감독했기 때문에 막강한 군권을 행사하는 핵심적인 요직이었다. 촉의 호군 제도는 동한의 대장군 제도를 답습했는데, 대장군 출정시 중호군 1인을 두었다고 한다. 이 당시 대장군 역할은 당연하게도 남만 정벌과 북벌의 총책임자였던 제갈량이었으므로 조운은 제갈량을 수행하며, 원정군 내에서 중앙군 역할을 하며 군권과 인사권을 행사한 것이다. 짬밥과 경력을 생각해보면 표현 그대로 당시 군중에서는 최고참일테니 무리는 아닐 것이다. 조운이 이릉 이후 강주에서 패잔병과 온전한 후방 병력을 감독하고 있을 때, 제갈량은 같은 탁고대신인 이엄을 강주로 로테이션시키며 조운을 데리고 가면서 중호군으로 삼아 군부의 핵심 요원이 되게 한 것.

정남장군은 국가의 남쪽 방면의 정벌 사업이 필요할 때 설치되는 장군직이다. 촉의 남쪽이라 하면 남만인데, 남만에서 일어난 반란을 제갈량 주도 하에 진압했으므로 중호군(원정군의 중앙군)이자 정남장군(남쪽 방면의 정벌사업을 주관하는 장군직)인 조운이 제갈량을 수행하여 참전했을 매우 확률이 높다. 물론 기록에서는 확실하게 남만 정벌에 참여한 사람이 제갈량과 마속 뿐이라서, 실제로 조운이 전방에서 종군했는 지, 아니면 살짝 후방에서 백업했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물론 정남장군이기 때문에 실제 통수권자는 제갈량이겠지만 명목상으로는 정남장군인 조운 역시 주장(主將)이고, 당시 촉이 조운 같은 노련한 구장을 놀게 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걸 감안하면 어떤 모습이었든 조운이 제갈량을 따라 남정에 종군한 것은 확실하다.

이후 정남장군에서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옮기는데, 이것이 226년이므로 시기상으로 남만 정벌이 끝난 뒤 보직을 옮긴 것이다. 정과 진의 차이는 정벌 사업이 필요할 때 정O장군을 임명하며, 진수하는 것이 우선시 될 때에는 진O장군을 임명한다. 사진장군보다 사정장군이 높은 것처럼 서열상의 고하는 있지만 애시당초 필요에 따라 설치하기 때문에 고하는 큰 의미 없다. 남만 정벌이 필요했기에 정남장군이었고, 동쪽 방면을 진수하는 것이 목표이기에 진동장군으로 옮긴 것이다. 촉의 동쪽은 오나라였고, 이 당시 촉은 오와 동맹을 맺었기에 정벌 사업을 주관하는 정동장군을 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2.9 제갈량의 1차 북벌

이후 제갈량이 기산에 출전하였을 때도 동행하였다. 제갈량은 기산으로 움직이고 조운은 등지와 함께 의병(疑兵), 즉 적을 속이기 위한 허위(기만) 부대로서 기곡으로 출진한다. 즉 조운이 기곡에서 조진을 상대로 시간을 끄는 동안 제갈량의 본대가 군사 배치를 마치고 기산을 제압한다는 것이다.

조운과 등지의 병사는 약하고 적은 강하여 기곡에서 패했으나, 군사들을 거두어 굳게 지켰으므로 대패에 이르지는 않았다. 군을 물린 후 진군장군으로 강등되었다. - 조운전
"대군이 기산과 기곡에 이르러 모두 적보다 수가 많았는데, 이를 능히 파하지 못하고 격파되었으니 이 과실은 군사가 적은 것에 있는 게 아니라 오직 한 사람(제갈량 본인)에게 있다" - 한진춘추

그리고 이 싸움에서 조운은 패한다. 중국어로 실리(失利)라는 말은 단순히 '불리하다'라는 뜻보다는 '시합이나 싸움에서 패하다'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조운전의 "조운과 등지의 병사는 약하고 적은 강하여(雲,芝兵弱敵彊)"라는 문구 때문에 후대의 창작물에서는 병력에서도 열세인 전력으로 분투했다는 식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한진춘추에서는 오히려 기곡에서 촉군의 병사가 더 많았다는 서술이 있다. 모순은 아니고 말그대로 조운의 군사가 수만 많은 미끼부대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둔전까지 하면서 허위 선전을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애초에 기록에서는 조운의 부대를 의병(疑兵), 즉 적을 속이기 위한 허위(기만) 부대로 표현한다. 게다가 조운과 등지의 병사가 약했고, 상대는 강했다라는 기록을 보자면 군사의 수이든 질이든 확실히 무게감이 차이가 있었고, 제갈량이 조운의 전후 수습에 대해서 고평가 한 것을 보면 불리한 상황에서 분투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군사를 물린 이후 진군장군으로 강등되었는데, 이 때문에 조운에게도 북벌 패전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조운이 당한 패배가 마속과 제갈량의 본대의 실패 때문에 더 이상 머무를 필요가 없게 되자 조운이 군을 물리는 와중에 추격을 받아 교전하여 패배를 한 것인지, 아니면 그것과 전혀 상관 없이 조진과 교전하여 패배를 한 것인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다만 촉서나 위서의 묘사에서 가정 쪽은 명백한 패배/대승으로 적는데 기곡 쪽은 제갈량 이외엔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고 조운의 상대였던 조진전에선 기곡의 전과를 자랑하지 않았다. 기곡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진 않았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제갈량이 말했다. "가정의 군이 퇴각할 때는 병장들을 서로 수습하지 못했는데 기곡군이 퇴각할 때는 병장이 처음처럼 잃은 바가 없으니 어찌된 까닭이요?" 등지가 말했다. "조운이 몸소 뒤를 끊고 군자와 집물조차 함부로 버린 일이 없으니 병장들을 잃을 까닭이 없었습니다."

조운의 군자(軍資)에 여유분의 비단이 있어 제갈량이 장졸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니 조운이 말했다. "군사에 이로움이 없었는데(이기지 못했는데) 어찌 하사품이 있을 수 있습니까? 청컨대 그 물건들은 모두 적안(赤岸)의 부고(府庫)에 넣어두었다 10월이 되길 기다려 겨울 하사품으로 삼으십시오." 제갈량이 이를 매우 옳게 여겼다. - 조운별전

그래도 대패는 면했고, 오히려 몸소 후미를 맡아서 병력과 물자의 손실을 최소화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다. 조운의 FM 성향은 유비 사후에도 이어져 1차 북벌에서 퇴각했을 때 군중에 남는 비단이 있어서 제갈량이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하자, 전투에서 패배했는데 포상을 줄 수는 없다고 반대하기도 했다.

"신이 재주가 없는데도 외람되게 과분한 자리를 차지하여 직접 모월을 잡고 삼군을 독려했으나, 능히 규율을 가르치지 못하고 법을 밝히지 못하고 일에 임해 두려워하여, 가정에서는 명을 어기는 허물을 범하고 기곡에서는 경계하지 못한 실책을 범했으니, 그 허물은 모두 신이 임무를 준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 제갈량전

일부 사람들은 조운이 제갈량과 함께 고참이므로 책임을 물었다고 주장하는데 제갈량은 유비의 유언을 직접 들은 고명대신 두 명 중 한 명으로[10] 군부의 요직에 있던 무장으로서 참가한 조운과는 그 직책과 권한이 비교할 수 없다. 신상필벌에 엄격한 제갈량이 고작 군부의 노장이라는 이유로 조운과 함께 벌을 받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발언이다. 차라리 조운이 유비 사후 주로 제갈량을 수행했으므로 그에 대한 책임과 기곡에서 패배한 책임을 같이 물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2.10 죽음

제갈량의 1차 북벌이 끝나고 그 이듬해인 229년에 사망한다. 아무래도 늙은 나이에 너무 무리해서 골병 들어 죽은 듯. 그리고 조운의 사망에 대한 언급 때문에 후출사표위작설이 제기되는데 228년작 후출사표에 229년의 조운의 사망이 언급되어 있다.

죽고 수년이 지나고 나서야 시호를 받았다.[11] 별전에 따르면 유선이 조운은 유비를 따르며 공적이 컸고 자신이 아기였을 적에 구해줬으니 그의 합당한 시호에 관해 의논하도록 했다.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조운의 시호를 지어다가 붙인 사람이 바로 강유로 강유는 조운의 시호를 제정할 때 당양에서의 일을 조운의 대표 일화로 소개한다.

시호법에 따르면 순(順)은 성품에 대한 찬양이다.

慈仁和民(자인화민) : 자비롭고 어질며 백성들에게 온화함.

慈和遍服(자화편복) : 자비롭고 온화하며 두루 복종시킴.
和比於理(화비어리) : 온화한 것이 이치에 비길만 함.

평(平)은 일처리에 있어 공정함을 뜻한다.

法度皆理(법도개리) : 법도가 다 이치에 맞음.

有剛治記(유강치기) : 정치를 행함에 강직하고 기강이 있음.
執事有制(집사유제) : 일을 맡아서 행함에 짜임새가 있음.
治而無省(치이무생) : 다스림에 허물이 없음.

조운의 시호는 순평후(順平侯)로 명백히 무관임에도 그는 인격과 성품, 공정함으로 고평가를 받았다.

3 평가

황충, 조운은 굳세고 사납고 씩씩하고 용맹하여 아울러 조아(爪牙-발톱과 어금니. 용맹한 무장을 비유)가 되었으니 (灌), (滕)의 무리로다. - 진수
정남장군(조운)은 성정이 후덕하고, 정서장군(진도)은 충성스럽고 강직하다. 당시 선발된 병사를 지휘하여 맹장으로써 공훈을 날렸다. - 계한보신찬

가장 인정받는 부분은 용맹함. 멀리 갈것도 없이 정사를 쓴 진수의 평가가 용맹했다는 것이다. 별전까지 인정하면 일신의 무력 뿐만 아니라 공성계 같은 일화를 가진 나름대로 임기응변을 갖춘 용장이었다고 볼 수 있는 여지는 된다. 일신시담(一身是膽), 언기식고(偃旗息鼓) 등의 고사성어가 이 조운별전 속에 등장하는 공성계 일화에서 유래한다.

독자적으로 한 전선을 맡은 것은 기곡전이 유일한데, 기곡전은 본질적으로 양동이었던데다 조운이 총사령관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곡에서 패한 책임을 조운에게 물은 것을 봤을 때 그 지역의 전투를 위임받은 듯하다. 병력 수에서의 우의는 있었지만 의군이었다는 기록보다는 당초 계획대로 양동을 위해 위의 주력을 묶어둘 수 있었는가 없었는가에 주목해야 하는데, 조운은 기산의 본대가 퇴각할 때까지 기곡에 있었다. 일단 적의 총사령관인 조진의 수비군을 잡아둔 사이 제갈량이 기산을 급습해 삼군을 취했다는 점은 평가할만 하지만 이후 위가 조운의 의군을 알아채고 기산에 대군을 투사 할 수 있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조운의 한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서의 커리어는 기록상 기곡에서의 전장 뿐이고, 이것이 비록 의군이고 조운이 몸소 막아 피해를 줄였다고는 하나 패배하였고, 그에 대한 책임까지 물었으니 대군을 지휘하는 부분에서는 사료가 부족한 이상 무작정 고평가를 주기에는 힘든 부분이다.

이는 유비 생전의 인사 배치와 유비 사후의 인사 배치에서도 알수 있는데 조운의 경우 모든 커리어에서 외곽 지역의 수비, 혹은 사령관의 직책이 거의 없고 유비 혹은 제갈량의 측근으로서만 행동했다. 인물평의 달인으로 알려진 유비가 직접 행한 조치였기에 당시에도 조운의 능력이 지휘력, 통솔력보다는 다른 측면에서 고평가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제갈량 시대에도 이는 마찬가지여서 유선 즉위 이후 조운은 주로 제갈량을 수행하며 중호군으로 금군을 지휘하고, 군권과 인사권을 행사하여, 무장들을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 조운이 주로 어디에서 역량을 발휘했는지 보여주는 부분이다. 즉 일군의 지휘관쪽이라기보단 유비, 제갈량 직속 돌격대장부터 황실 정예부대장, 후방 군정 등을 다방면으로 처리하던 역할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진수의 평가인 굳세고 사납고 씩씩하고 용맹하여 발톱과 어금니(爪牙)가 되었다, 등공의 무리라는 평가가 괜히 나온것이 아니라는 것.

성품에 대한 찬양을 받고 후덕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걸 보면, FM 성향임에도 의외로 주변 사람들에게 호감을 샀던 것 같다. 물론 성향과 성격은 다른 문제니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진수는 관우와 장비, 마초와 같은 당대의 이름난 장수들도 성격적 결함 때문에 박한 평가를 내렸지만, 조운은 고조 유방의 최측근이었던 하후영에 비유하며 고평가를 내린다. 촉의 신하인 양희의 계한보신찬에서도 조운은 성정이 후덕했다고 한다. 무장임에도 여러 평가에서는 인격과 성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케이스다. 거기에 용맹함과 냉철함을 겸비한 장수로도 평가 받았은 점도 무장으로서의 평가로도 플러스 포인트.

조운은 경력과 경험, 위치와 권한, 군주의 최측근으로서 신뢰를 받았던 인물이기 때문에 분명히 어깨에 힘이 들어갈 만도 한 존재였다. 그러나 당대의 평가, 사후 시호, 정사를 편찬한 진수의 견해, 사서에 보이는 행적을 보면, 오히려 인격과 성품, 공정함에 대한 고평가가 주를 이룬다. 그만큼 조운은 소위 경솔하게 뽐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삼가고 조심하며 겸손하며 공정하고 후덕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다는 것.

4 연의

행적의 큰 줄기는 따르나 유비군을 주인공 집단으로 묘사하다보니 정사에 없는 부분들이 대거 창작되었다. 특히나 관우, 장비급으로 일기토 묘사가 많아 수많은 가공인물의 인생을 끝장냈다. 어쩐지 주군이 위기에 빠졌을 때 바람처럼 달려와 구해주는 멋진 역할을 자주 맡는다. 공손찬 휘하로 들어갈때는 위기에 빠진 공손찬을 구하면서 문추와 일기토를 벌여 쫓아내는데 이 때부터 조운 버프가 시작된다.

연의에서는 유비군 합류가 더 늦춰져서 유비군에 합류하는 시기가 유비가 유표에게 의탁할 때로 변경되었고, 첫 만남과 재회의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각색되었다. 장판파에서는 아이까지 데리고 있으면서 홀로 무쌍난무를 찍는 조운을 위한 에피소드이다. 거기다 더해 기껏 구해내온 아두를 유비가 던지며 조운에게 말하길 아이는 또 낳을 수 있지만 그대 같은 장수는 또 구할 수 없다라는 간지폭풍 같은 대사까지 하면서 조운과 유비의 의리를 부각시킨다.

정사에서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이 사방장군에 임명되는데 여기서 조운은 빠져있다. 연의에서는 사방장군에 조운까지 포함되어 오호대장군이 된다.

소시민 두 명원수로도 유명하다.사실 두 명만 있는게 아니라 조운 손에 날아간 목 중에 소시민을 찾아보면 미친 듯이 많다. 그것도 대부분 뭐라 말도 하기 전에 댕겅. 국의는 정사에선 원소군의 객장으로 많은 공을 세웠으나 오만해져 처신을 잘못했다가 숙청당한 인물이다. 연의에서는 조운을 띄워주기 위한 희생양으로 조운에게 죽는다. 국의는 어느 쪽이 더 굴욕인지 애매하다.

고람은 원소군 장수였으나 관도대전 중 장합과 함께 조조에게 투항했다. 정사에서 이 사람은 이것으로 등장 끝. 연의에서는 여남에서 조운에게 죽는다. 그래도 고람은 분량은 챙겼으니 아주 손해는 아니다.

이릉에서 대패한 유비를 구하기도 했는데 주연을 죽인 것이 바로 이때의 일이다. 조운이 오의 명장중 하나인 주연을 죽이는데 이게 문제다. 이릉대전 이후의 오나라 분량 일부까지 죽여버렸다. 오나라팬들과 주연팬들의 천하의 둘도 없는 원수. 특히 국의, 고람은 일기토 묘사를 넣어서 확실히 버프캐라는 느낌을 주는데 주연은 그런 묘사도 없는걸보면 나관중이 주연까인 듯하다.

막판에는 한덕과 그의 아들들을 죽여 한 일가를 완벽히 파괴함으로써(...) 화려한 마무리를 했다.

물론 이런 사건들은 전부 허구다. 이밖에도 상산초옹 에피소드, 북벌에서의 제갈량과의 환상 듀오, 세심하고 꼼꼼한 이미지, 문앙의 조운재림 등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조운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다.

관우와 비교하면서 조운과 엮이면 손해라는 인식이 있는데 딱히 그런것도 없다. 특히 안량, 문추가 버프 받는건 관우만의 문제가 아니라 조조군 장수들 때문인데, 연의 상으로 안량, 문추가 조조군 장수들만으로 처리가능한 쩌리라면 굳이 관우를 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서 버프를 받는거다.

그리고 슈퍼맨 또는 고대(古代)판 슈퍼 솔져라는 평도 있는데 이건 과장을 깐다고 너무 오버한 표현이니 적당히 필터링하자. 유비군이 슈퍼 히어로 정도로 버프 받았다면 나머지는 최소 슈퍼 빌런급 버프는 받고 있다.

유비 사후 촉의 최고참 장수가 되고 나서 남만 정벌때 위연과 같이 멋대로 몰래 나가 금환삼결을 벤다던가 북벌때 남으라 하니 뒷방 늙은이 취급하냐며 제갈량에게 항명을 해 어거지로 선봉을 따내는 등 의외로 호기를 부리는 장면도 나온다.

5 가족 관계

조운의 아내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썸녀(?) 번씨와는 혼인은 거절했고 마운록이란 아내는 근대에 지어진 소설 반삼국지에서 나오는 가공인물로 거짓이다. 손연아(孫軟児)는 민간 설화에서만 나오는 조운의 아내다.

아들이 두 명 있었다. 장남 조통이 후사를 이었고 관직이 호분중랑(虎賁中郎), 독행령군(督行領軍)에 이르렀다. 차남 조광은 아문장(牙門將)으로 강유를 수행해 답중(沓中)에서 싸움에 임하다 전사했다.

사실 차남인 조광이 아문장으로 활동한 연도가 260년대 임을 생각해보면 이들의 출생년도가 입촉 이후 상당히 뒤였을 가능성도 있는데 왜냐면 다른 유비의 숙장들인 관장이나 미축 같은 공신들은 손자 대까지 촉한에서 뭔 벼슬을 했는지 기록이 있는 반면, 조운의 자손들은 아들 대에서 이후 얘기가 없는것을 보면 손자가 없거나 촉한 멸망 전에 벼슬을 할 만큼 자라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황충의 아들 황서의 예로 황충이 생각보다 젊었을 가능성이 언급되는데 조운의 자손들도 비슷하게 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한편 청대의 지리지인 강릉현지에 나오는 전설에 따르면 관평의 아내는 조운의 딸 조씨라고 한다.[12] 여기에 따르면 조씨와 관월은 형주가 함락되자 익주로 피신하지 못했고 오나라에 억류된 채로 관(關)씨에서 문(門)씨로 성을 바꾸고 평민이 되어 공안에 숨어 살았다. 이 때 여몽이 배려해준 덕분에 이들이 몰래 숨어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서진사마염이 오를 멸하고 삼국을 통일하자 칙서로 관씨로 복권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고 한다. 일단 관평의 후손들이 있다는 사실이나 관월의 존재 자체는 조작이 없다고 인정받고 있다.#

이 일설에 따르면 관평의 아들 관월(關樾)[13]은 조운의 외손자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삼국지연의라든가 평화, 진수의 기록, 자치통감, 배송지 주 등에는 이런 기록이 없어서 둘의 사돈 관계가 묘사되거나 언급되지 않는다. 실제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도 조운의 후손은 조통, 조광 형제만 언급하고 있으므로 확언은 어려울 듯하다. 대체 중국에는 삼국지 관련 전설이 얼마나 많은거야!

6 논란

6.1 나이 논란

사서에는 생년이 밝혀지지 않으므로, 연의와 대부분의 삼국지 관련 문학 작품에서 조운은 유비와 관우보다 나이가 어리게 묘사되고, 제갈량마초보다 조금 많게 그려진다.

현재 사천성 성도시 대읍현에 가면 조운의 묘가 있다. 그 묘비에는 조운(趙雲)이 한 환제 영흥 원년(153년) 출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조운은 관우여포보다 7살 더 많고 유비보다는 8살이 더 많다. 조조보다는 2살이 더 많고 손견보다 3살이 많다. 가장 경악할 만한 사실은 황충과의 나이차가 불과 8살밖에 안 난다는 점이다. 하지만 당대에 가까운 연대를 살아갔던 인물인 진수가 생년조차 표기 못할 정도로 이미 조운의 생년은 오래 전에 망각되었으며, 묘비는 청나라 강희제 연간에 세워지고 문화대혁명 때 파괴된 것을 1996년에 다시 건립하여 세운 것이다. 따라서 비문의 기록은 삼국지연의나 민간전승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사학계에서는 그를 170~171년생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운의 행적을 세세하게 기록한 조운별전에 생년에 기록이 없었거나 혹은 기록했지만 배송지가 신뢰도가 떨어진다고 생각해 기록하지 않은건지는 불명이다, 조운별전의 신뢰성에 의심을 두는 사람들은 이 점을 문제로 제기 하기도 한다.

6.2 호위무사 낭설

사실 유비가 조운과 같은 침실에 누웠다는 별전의 기록에 비추어봤을 때 이는 신선한 일은 아니다. 조운은 애초부터 유비의 지근거리에서 함께 했다. 물론 지근거리에서 유비의 호위 업무도 당연히 수행했을 수 있겠지만, 직할부대의 지휘관은 경호가 주업무가 아니기 때문에 경호관이나 호위무사로 보는 견해는 잘못된 견해이다. 조운은 유비의 손발이자 그림자로서 다양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에 보듯 일신도시담 호위장군(一身都是膽 虎威將軍)이라는 말 때문에 호위무사로 오인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본래 '온 몸이 간덩어리인 호랑이 같은 위세의 장군'이란 뜻이다. 조운별전에서 유래한 말로 관직명 같은 것은 아니고 일종의 별명이다. 애초의 호위무사의 호위(護衛)와는 한자 자체가 다르다.

애시당초 조운은 정사에 처음 등장할 때부터 기병지휘관으로 등장한다. 정말 호위 무장이었던 허저전위와의 차이는 단순히 기전만 놓고 비교해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허저나 전위의 경우에는 평시에도 조조를 수행하면서 경호원 역할을 수행했지만, 조운의 경우에는 군사 업무를 수행했다. 다만 진수의 기록이나 하후영에 비견된다는 평으로 미루어 볼 때, 전시에는 유비를 호위하는 정예부대를 지휘했을 가능성은 높다. 물론 수도방위사령관과 경호실장은 분명히 다르다.

지금은 까들도 이거 가지고 트집잡는 사람은 없다. 정확히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않는다. 별명 자체가 정사가 아니라 별전에서 언급되기 때문이다.

6.3 촉한에서의 위치

사천왕+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호대장군 막내 서열 정도의 위치.[14] 연의에서 흔히 오호대장군이라 불리는 이 5인의 위상이 무관으로 촉에서 제일 드높았으니 촉의 무관 중에서는 최상위권의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계급은 기곡 전투에서의 패배로 위연보다 낮거나 하는 등 변동이 좀 있다.

논란이 나온 이유는 복합적인데 연의에 묘사된 모습에 대한 반발과 관장마황과 조운이 같은 위치에 둘 만한가에 대한 문제, 조운보다 아래라 여겨졌던 다른 촉한 장수들의 재평가 등이 있다. 특히 위연을 재평가 하는 축에서 이러한 반론을 제기한다. 진도는 기록이 없고, 오의는 인지도가 떨어지고, 왕평은 1세대라기 보단 2세대 축에 드는 장수다. 거기에 오의, 위연 모두 최종 관직이 조운보다 높았다. [15]

여기에 더해서 정사로 보면 미축, 미방보다 빨리 유비군에 합류한 고참 중에 고참인데 전혀 고참에 대한 우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16] 미축은 실질적인 권위는 못해도 명분상으로는 제갈량보다 윗줄로 대우 받았고, 간옹과 손건도 미축에는 못 미쳐도 우대를 받았는데 조운은 이런 면에서 소외된 듯 보인다는 것이다.

거기에 유비의 한중왕 즉위와 더불어 황제에게 올리는 표를 보면 관장마황조로 묶이는 다섯명 중에 유일하게 조운의 이름만은 찾을 수 없다.

평서장군 도정후 신 마초, 좌장군 장사 영 진군장군 신 허정, 영사마 신 방희, 의조종사중랑 군의중랑장 신 사원, 군사장군 신 제갈량, 탕구장군 한수정후 신 관우, 정로장군 신정후 신 장비, 정서장군 신 황충, 진원장군 신 뇌공, 양무장군 신 법정, 흥업장군 신 이엄 등이 120인이 상언합니다. - 선주전

흔히 생각하는 촉한의 최고위 무관 5인 중 한명이라기에는 다른 넷에 비해 권위나 실질적인 네임밸류 그리고 관위 등 모든 것이 부족한 것을 알수 있다.

먼저 가장 높았을 때를 보면 관우, 장비 다음[17]이었고, 가장 낮았을 때도 위연, 진도보다 서열이 한단계 낮았지만 (당시 위연의 직책은 독전부 행 승상사마 2품 진북장군, 조운의 강등된 직책은 3품 진군장군) 이것도 기곡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강등되기 이전에는 조운의 직책이 2품 진동장군으로 위연, 진도보다 높았다. 실질적으로 위연의 직책이 조운을 뛰어넘게 되는 것은 조운이 죽은 이후인 230년 양계 전투에서 곽회를 격파하고 전군사 정서대장군 가절에 임명되었을 때부터다.

촉한의 장군직 서열은 거기장군, 표기장군 > 사방대장군 > 사진대장군 > 사정대장군 > 사방장군(전후좌우) > 사진장군 > 사정장군으로 분류 할 수 있다. 보통 사방사진사정대장군 등을 기존 장군직에 대(大)자를 붙여 높여부르는 칭호로 알고 있으나 엄연히 다른 관직이다. (위연이 230년에 임명된 직책은 사정대장군의 하나인 정서대장군으로 사정장군 중 하나인 정서장군[18]과는 엄연히 다른 직책이었다.) 참고로 촉한의 관직 서열에서는 사진장군이 사정장군보다 높다. 그 체계가 아래의 잡호장군에게까지 이어지는 모양이며 그 위의 서열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대장군(1품)을 제외하면 전부 다 서열상 2품 관직이다.

1차 북벌 당시 조운의 직책이었던 진동장군은 본래 후한의 관직 체계의 의하면 사진장군 중에 하나로 거기장군 바로 아래의 직책으로 결코 낮은 서열의 직책이 아니었다. 당연히 유비군(촉한)의 군부 내 투톱은 관우와 장비였다. 이후 마초가 합류하면서 둘과 동렬로 평가 받았다.

선주(유비)는 익주목을 겸했다. 제갈량을 고굉(股肱, 다리와 팔, 유능한 보좌관)으로 삼고, 법정을 모주(謀主, 모사)로, 관우, 장비, 마초를 조아(爪牙, 손톱과 이빨, 용맹한 장군)로, 허정, 미축, 간옹을 빈우(賓友, 손님과 친구, 친한 벗과 같은 사이)로 삼았다. 동화, 황권, 이엄 등은 본래 유장이 임용했고, 오일, 비관 등은 유장의 인척이고 팽양은 유장에게 배척받았고 유파는 예전에 시기받고 원망한 자이니, 이들 모두를 요직에 두어 재주를 다하게 하니, 뜻있는 선비가 다투어 힘쓰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선주전

유비가 한중왕에 오른 뒤 관우, 장비, 마초, 황충을 각각 전우좌후(前右左後)의 사방장군으로 임명하면서 황충도 같은 열에 서게 된다. 관우가 황충과는 동렬에 설 수 없다고 반발하기는 했지만 비시의 말을 듣고 곧 받아들인다.

이 부분만 보면 열전이 묶인 다른 4명과는 생전에 동렬에 서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입촉 전에는 관우, 장비 다음 가는 장수(편장군)였고 화양국지에서는 조운의 익군장군 직책을 사방장군(전장군, 후장군, 좌장군, 우장군)과 나란히 언급한다.

하지만 유비가 한중왕이 된 이후의 직위상으로는 조운이 다른 4명보다 직책이 낮은 건 사실이며, 이에 대해서 몇몇 사람은 원래 황충이 사방장군에 임명되기 전에는 본래 조운보다 지위나 명망이 낮았던 장수라는 점을 들어 유비가 한중왕에 즉위하기 전에 위상으로 따지면 관장마황조의 순서가 아니었고 유비가 한중왕에 즉위한 이후에 '관마장황조' 순으로 위상이 바뀌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며, 애초에 황충이 조운보다 명망이 낮았다는 근거 또한 없다. 유표 시기부터 형주목의 중랑장을 역임하고 조조 밑의 형주에서는 비장군(5품)을 대행한 황충이 형남을 정벌하며 편장군(5품)에 오른 조운보다 직위 상으로 먼저 5품에 장군 위에 있었다.[19] 실질적인 한중전 이후 촉한의 관장마황조의 위치는 '관우 (사방장군, 가절월[20]) > 마초, 장비 (사방장군, 가절) > 황충 (사방장군) > 조운'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래도 같이 묶인 5명 중에서 생전 지위가 가장 낮았을 뿐이지 대체로 위연보다는 서열이 높았다. 애초에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조운의 급을 나머지 4인에 버금간다고 여겨서 함께 열전에 묶은 것이다.

그리고 조운은 시호를 받았다고 밝혀진 12명 중 한명이다. 비록 까들은 가장 늦게 받은 것에 주목하거나 유선을 구했으니 당사자가 우대한 것 아니냐는 의심의 시선을 보내지만, 정말 총애 받은 진지는 사후 바로 받은데다 직설적으로 총애해서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6.4 조운별전 논란

조운별전은 배송지가 정사 삼국지에 주석을 달면서 참고한 사료 중 하나로 작자와 작성 시기는 모두 미상이다. 배송지가 주석으로 단 부분 이외에는 소실되어서 거의 남아있지 않다. 사실상 정사 삼국지에 주석으로 달린 부분이 현재 남은 조운별전의 전부라고 봐도 좋을 듯.

6.4.1 별전 비판론

조운별전의 신뢰성을 비판하는 입장은 다음과 같이 정사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전(삼국지 정사)에서 선주가 평원상일 때, 조운은 이미 수종하며 기병을 주관했다. 별전에서 이르길 "원소에게 나아가, 조운은 업에서 만났다.", 즉 건안 5년 후에 있는 것이니, 이는 어긋나고 뒤엎는 것이라, 믿을 수 없다. - 하작
조운의 미덕은 모두 별전에 보이나, 본전은 간략하여 이에 미치지 못하니, 어째서인가? - 이광지
제갈량의 상벌은 엄숙하여, 조운은 오히려 호(號)가 낮아졌는데, 그의 아랫사람이 어찌 과분하게 하사품을 받겠는가? 거듭 그것이 그렇지 않다고 밝히기에 충분하다. 별전 류는 모두 자손이 과분하게 미화하는 말이기에, 승조(진수)가 취하지 않은 것이다. - 하작

조운전의 기술이 매우 간략한 반면, 조운별전은 정사 조운전에서는 간략하게 쓰인 내용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조운의 활약을 찬양한 내용이 있어 청나라 사가 하작은 거의 많은 부분에서 비판을 했고, 이광지도 조운별전에 대해 의문을 표했으며 통감집람에서조차 조운별전의 몇몇 내용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하고 있을 정도다. 이렇게 촉한정통론자에 속하는 사가들의 비판도 있을 정도로 조운별전 자체의 신뢰도는 좋지 못한 편이라 교차 검증이 없이 그대로 믿어버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문제는 조운의 공적이 거의 모두 조운별전에서 유래된 것이 많다는 것이다. 주석으로 달린 조운별전을 제외하면 우리가 아는 조운의 공은 찾기 힘들다.

타 별전의 경우 그 인물의 일화나 공적을 보조해주는 경우가 많지만 조운의 경우 그 공적이나 공이 모두 조운별전에 기록된 것에서 문제를 삼을 수 있다. 한중전에서의 '호위장군' 일화같은 경우, 황충전, 장익전에서 어떠한 언급도 찾아볼수 없다. 하후란, 장저 등의 인물 또한 정사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기에 타 별전과 같은 신뢰성이나 명확성을 확신할 수가 없는 것이 조운별전의 현실이다.

조운별전을 비판하는 모든 사람들이 조운 자체의 능력이나 위치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삼국시대의 기록은 빠르게 열화되었고, 특히 촉의 경우 특히 기록이 적어 후주전 주석에는 '사관이 없어,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조차 나오고 있다. 이는 정통성의 입장에서 삼국을 통일한 서진과, 계보가 일치하는 위도 마찬가지라서 위의 오대장 같은 거물도(서황, 장료를 제외한) 정사평에서 사적과 행실이 부합되지 않는다는 진수의 평이 있을 정도다. 특히 무관의 경우는 초기 무장들의 기록이 굉장히 적을 수 밖에 없는데, 조운별전은 이 모든 것을 부정하고 '조운'의 공적을 세세하고 자세하게 서술해 놓았다. 이것만으로도 조운별전은 신뢰성이 낮아질 수 밖에 없다.

6.4.2 별전 옹호론

별전류에 대한 비판이 대부분 조운별전에만 집중되는 것은 문제다. 별전 류라면 화타별전, 순욱별전, 비의별전 등도 있는데 애당초 조운의 내용만 집중적으로 까는 것도 문제가 있다. 삼국지연의의 버프가 지나친 것에 대한 반동으로 조운별전의 내용을 무작정 신뢰하지 않으려는 경향도 있는 것이다.

진수가 비록 정사에서 조운별전을 제외했을지 모르나 조운별전을 의식한 기록이 많다. 관장마황조전에 조운을 다른 4명의 상장들과 같이 포함시킨 것과 진수가 조운을 후한의 개국공신인 하후영에 비한 것도 그렇다. 당시 조운의 위상이 관장마황에 버금가는 위상인 것도 있고 진수가 조운별전을 의식하지 않았으면 애당초 조운에 대한 상당히 후한 평가를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정사 삼국지 조운전에서 조운이 당양 전투에서 필마단기로 감부인과 아두를 구출한 일화가 하후영이 팽성 전투에서 유방의 아들과 딸들을 뛰어난 기마술로 구출한 일화와 비슷하지만, 인물평에 조운이 유비의 조아와도 같은 존재이며 강직하고 용맹한 장수라고 평을 내리는 것을 보면 정사의 내용만 가지고서는 진수가 왜 이런 평을 내렸는지는 이해가 안 간다는 것이다. 진수가 정사 삼국지 편찬 당시 조운별전에 해당하는 기록들을 읽어봤다는 얘기가 된다.

정사 삼국지 관장마황조전에서는 관우, 장비, 마초에 대한 평이 매우 박한 반면에 황충, 조운에 대한 평은 그냥 찬양 일색이다. 정사 조운전에 내용만 보고서는 왜 진수가 저렇게 찬양 일색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사 기록만 보면 진수가 관장마황조전을 저술할 때 조운별전은 물론이고 해당 장수들에 관련된 별전이나 가전류의 기록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애당초 기록도 없는데 그거라도 참고하지 않으면 아예 평가를 내리는 거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배송지가 조운별전을 인용할 때도 그나마 신뢰있는 내용들만 추려서 실은 것이다. 실제로는 저 내용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보이나 거의 민간 전설에 가까운 내용들이라 저 내용들만 싣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진수가 정사 삼국지를 편찬할 당시에는 조운별전도 비슷한 시기에 쓰여져서 내용이 훨씬 풍부했을 것이다.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도 조운별전의 굵직굵직한 내용들을 사용한다.

나무위키의 삼국지 관련 항목들을 보면, 배송지 자신이 주석을 달면서도 신빙성이 없다고 지적한 부분들을 제외하곤 대체로 그의 주석을 긍정하는 편인데 반해 유독 조운별전은 그 잣대가 엄격함을 알 수 있다. 물론 배송지의 주석이라고 맹신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것이 아니고 재평가 이전부터 조운별전의 신뢰성이 의심 받아온건 사실이지만 정말 객관적인 시각으로 별전의 내용을 평가하고 있는 것인지 연의에 대한 반발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도 조운별전 부분에 별전 비판에 대한 내용을 실었지만 해당 문단 말미에

그러나 이러한 류의 관점은 다수가 아니며 일부 사학자들에 의해 지나치게 의고한다고 지적받고 있다.

「然而,此類觀點並不多見考,並被一些史學者指過分疑古」

라는 내용으로 마무리했다.

조운이 무관이 아니라 문관이었다는 비판도 조운별전을 통해 나온 것이다. 조운별전을 무작정 부정하면 자신들이 조운별전에서 인용한 사료도 전부 부정해야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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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의 고향인 하북성 스자좡(石家庄) 시에 있는 조운의 사당.

후세에 그의 이미지는 과단성 있고 용감무쌍하며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미남에 행동 단정, 사생활 깔끔, 계급질서에 깍듯하고 과묵, 엄숙하여 모든 사람의 신임을 받는 이미지로 묘사된다. 그렇기 때문인지 현대에 조운을 주인공으로 한 게임, 조운을 주인공으로 한 잡극, 대접이 날이 갈수록 좋아지는 장수이기도 하다. 아예 신의 영역으로 넘어간 관우보다 일반(특히 젊은 사람들)의 인기는 높은 편.

옛날에도 인기가 있었는지 관우와 장비 다음으로 민간 설화가 많다. 모기랑 결판내는 것도 있고(...) 저승에 가서 손가락 안쪽 상처를 반지로 가리고 '난 전장에 나가서 상처 입은 적 없음ㅋㅋㅋ'이라고 사기치는 것도 있고, 집 뒤뜰에 샘물 파서 말을 목욕시켰더니 간지폭풍이 되었다는[21] 설화라든가 조운이 장수로 임관하기 전에 수많은 창을 못 쓰게 만들어가며 창 연습을 해서 결국 절벽을 부쉈다든지 하는 설화 등등 많다.

여담으로 나관중이 이렇게까지 조운을 띄워준 이유는 나관중의 고향이 조운과 같은 상산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나관중본에는 조운이 아두를 구하기 전에 주모를 핍박해 죽게 만들어 충신의 사당에 들어갈 자격을 잃었다고 써져 있다. 또 삼국지연의에서 북부 지방의 지리가 틀린 점이 많아 나관중 상산 출신설이 반박되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되었 듯이 조운에 관련된 설화가 많았고 그것이 연의에 반영된 점이 많았기에 조운의 활약상을 더 돋보이게 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삼갤에서 킬러조란 별명이 있다. 혹은 자룡대원군이라는 별명도 있다.[22]

동양에 비해 삼국지가 비교적 덜 알려진 서양에서도 이 이미지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리그 오브 레전드의 챔피언 신 짜오의 이름/설정/외형적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중국판에서는 조운과 성도 동자(同字)로 조신(趙信)[23]이라고 쓴다. 또한 국내에 "대장군 신 짜오"로 발매된 스킨은 중국판에선 대놓고 이름이 조자룡 스킨이다. 물론 "대장군 자르반"은 여포. 둘 다 표절 시비를 걸어도 될 정도로 코에이의 진삼국무쌍에서의 이미지와 굉장히 흡사하다.

관련(?) 속담으로 '조자룡 헌 창 쓰듯'이 있다. 원래 뜻은 어떤 것을 매우 익숙하게 다룬다는 것인데 어찌된 것인지 돈이나 물건을 헤프게 쓰는 경우에도 쓰이기도 한다.[24] [25]

역대제왕묘 배향자 중 한명이다.

8 미디어 믹스

  1. 그의 고향인 하북 기주의 상산은 원래는 항산(恒山)으로 불렸지만, 한문제의 이름을 피휘하여 상산으로 개명되었다.
  2. 보통 상산 조자룡이라 알려져있기도 하여, 삼국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자룡'이 그의 이름인 줄 알기도 한다.
  3. 본문에는 의종(義從)이라 적고 있다.
  4. 서열에 따라 배치한 것. 촉에서는 전, 좌, 우, 후가 순서였다.
  5. 이 경우 자치통감의 성격상 굵직한 부분만 기재하기 위해 삭제했을 확률도 있다. 이 사건이 한중전 자체만 놓고 봤을 때 규모상으로 그다지 커보이지는 않으니, 진위성이 의심됐다면 굳이 기재할 필요조차 없는 소규모 내지는 중규모 정도의 전투일 뿐이다.
  6. 대표적으로 제갈량집을 번역한 <와룡의 눈으로 세상을 읽다>의 경우 북산에서의 패배를 조운의 활약으로 해석하는 주석이 달려있다.
  7. 실제 유비 사후 제갈량이 북벌에 나서자 양주의 천수, 안정, 남안 3군이 촉에게 호응하기도 했다.
  8. 강주는 탁고대신인 이엄이 독강주로서 연고지로 삼아 4년여간 감독하면서 반란을 진압하는 등 공적을 쌓고 자신의 기반을 다진 곳이다.
  9. 제갈량은 북벌 때 같은 탁고대신인 이엄에게 후방 군량 보급을 맡겼다.
  10. 다른 한 사람은 이엄이다.
  11. 법정, 제갈량, 장완, 비의, 진지, 하후패는 죽은 뒤 바로,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은 260년, 조운은 261년에 시호를 받았다.
  12. 이게 사실이라면 관우와 조운은 사돈지간이 되는 것이다. 출처는 중국어 위키백과.
  13. 건안 18년(서기 213년) 생이라고 한다.
  14. 비슷하게 같이 묶인 인물들에 비교되서 까이는 인물로 순욱+순유와 엮인 가후가 있다.
  15. 오의의 경우, 황제의 외척에 유언 당시부터 이어지는 구 세력의 대표같은 존재이기에 관직이 낮았어도, 조운보다 낮은 위치라고는 볼 수 없었다.
  16. 단 이건 정사 본문만 봤을때 얘기고 배주를 따른다면 조운의 유비군 합류 시점은 관도대전 무렵으로 이 두 사람보다 뒤의 일이다.
  17. 유비가 입촉하기 전에는 관우, 장비 다음 서열(편장군)로 황충(비장군), 위연(6품관 이하)보다 직위가 높았다.
  18. 230년에 정서장군에 임명된 건 강유이다.
  19. 물론 명망이 있었다고 해도 그걸 전적으로 신뢰하는 가는 별개로 촉한 입장에서 정군산 전투는 그에 대한 검증이 되었을 것이고 유표군 시절 명성과 합쳐저 빠르게 지위를 높인 것으로 보인다.
  20. 가절보다 한 단계 높다. 삼국을 통틀어 이만한 권위를 가진 신하는 없었으며, 이는 관우가 유일하다.
  21. 여기서 조운의 말이 백마라고 나와서 이후 '조운의 말 = 백마'라는 공식이 설정되었다.
  22. 장판파에서 유선을 마치 자기 아들내미 지키듯 필사적으로 지킨 모습으로 인해 조운이 사실은 유선의 부친이라는 개드립 때문에 나온 말(...).
  23. 발음은 짜오 신.
  24. "한편으로는 한 행셋거리로, 또 한편으로는 구직꾼 격퇴의 수단으로 자룡이 헌 창 쓰듯 썼을 뿐이지." 레디메이드 인생: 채만식, 1934
  25. 여기서 '헌 창' 이라는 것은, 낡은 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매우 익숙한 물건을 지칭할 때 쓰는 '헌 것' 이라는 뜻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