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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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손양원(孫良源)
본명손연준[1]
생몰년1902년 6월 3일~1950년 9월 28일
출신지경상남도 칠원군(현 함안군 칠원읍)
사망지전라남도 여수시
산돌[2]
별칭사랑의 원자탄
링크갓피아
종교개신교

사랑의 원자탄[3].

진정한 대인 중 한 분.

오늘날의 개신교 신자들이 보고 배워야 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본.

1 일생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에서 손종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손종일 씨가 개신교 장로인 독실한 개신교 집안이었다고 한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동방요배를 강요하자 신앙의 정신으로 불복종하다가 간신히 칠원보통공립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인 1919년에 서울 안국동에 있던 중동학교(지금의 중동고등학교)에 진학하게된다.

기록에 의하면 손양원은 이 중동학교에서 낮에는 학업에 열중하고 밤에는 만두를 팔면서 고학을 했다고한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부친이 고향에서 독립운동으로 징역을 살게 돼 손 목사는 심적인 고통은 물론 경제적 어려움까지 겪게 되었고, 결국 손양원 목사는 중동학교에서 키워가던 꿈을 포기하고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다. 손 목사의 학력은 중동학교 입학(1919년 4월)과 자퇴(1920년 4월 3일)로 기록되고 있다.

1938년 평양 신학교를 졸업한 뒤 전도사가 되어서 1939년 전라남도 여수시에 있는 애양원 교회에 재직했다. 애양원은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치료-수용 시설로 이곳에서 손 목사는 환자들에 대한 개신교 전도와 환자 구호를 위한 봉사 활동에 전념했다. 1940년에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가 체포되어 1945년 8.15 광복 때까지 수감 생활을 하였다.당시 수감 생활로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서 실명 위기까지 왔었다고 한다.
그가 수감되어 있을 때 일제는 어떻게 해서든 그의 신앙을 바꿔보려고 했는데, 불교관련 책을 강제로 읽고 감상문을 쓰게 하거나 일본인 스님을 불러서 그가 불교신자로 바뀌도록 설득하게 하였다. 그러나 손 목사와의 종교 담론을 하던 그 스님은 전도(?)가 끝까지 먹히지 않고, 오히려 손 목사의 반론에 할말도 없어지자 결국 분노가 폭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손 목사의 뺨을 때리고 만다. 하지만 손 목사는 오히려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제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원수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도 내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자, 그러니 이쪽 뺨도 치십시오."하며 뺨을 내밀자 그 스님은 아예 이성을 잃고 덤벼드는 바람에 감방 간수들이 끌고 나가는 일도 있었다고. 애초에 땡중 불러다가 설득하려 했으니 됐을 턱이 있겠나만
해방 이후에는 목사가 되어서 다시 애양원에서 봉사 활동을 하였다. 출소한 뒤 최초로 설교자로 참여한 예배에서는 설교를 시작하려다가, 그때까지도 버젓이 예배실에 놓여있던 신토신상을 보고(!)[4]분노하여 그 자리에서 바닥에 던져 박살내고는 다시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와 설교를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948년 발생한 여순사건 때 큰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두 아들의 죽음이었다. 손양원의 두 아들인 손동인과 손동신 씨는 우익 학생 단체 중 하나인 전국학생연맹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반란 당시 반란군 세력이 이를 빌미 삼아서 두 사람을 순천의 동천 인근에서 살해한 것. 당연히 그들의 가족들과 애양원 사람들은 크게 슬퍼하고 있었는데 손양원 목사는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행동을 하였다. 두 사람의 장례 예배 때 손 목사는 감사 기도를 올린 것. (감사기도의 내용)

이 중에서 주위 사람들을 특히 놀라게 한 것은 바로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자신의 아들로 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손 목사는 실제로 이를 실천했다. 반란이 진압된 뒤 반란군 인사 중 안재선이란 사람이 손 형제를 살해했다고 자백하자,[5] 손 목사는 안재선 씨를 자신의 양자로 삼은 것이다.[6] 안재선 씨는 자신의 행동을 참회했고 진심으로 손양원 목사를 자신의 아버지로 따랐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고 북한군이 호남 지역으로 진격해 오자 모두들 피난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손양원 목사는 환자들을 내버려 두고 갈 수는 없다며 끝까지 애양원에 남았다. 당시 환자들은 한센병 환자인 자신들을 북한군이 해치지는 않을테니 손 목사에게 떠나라고 종용했으나 이를 듣지 않았다. 그리고 여수로 진격한 북한군에게 체포되었다.

북한군에게 붙잡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감금되어 있을 때에도, 식사 시간 때마다 들어오는 주먹밥 중 가장 작은 것을 집어먹었고 그마저도 반으로 쪼개서 감방의 사람들 중 가장 굶주리고 있던 사람에게 "나는 본래 소식가라서 이것만으로도 족합니다."라며 나눠주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같이 갇혀있던 사람들과 함께 1950년 9월 28일 총살당했다. 이때 북한군들이 총을 쏘던 순간, 젖먹던 힘으로 손에 묶인 밧줄을 기적적으로 풀고 정신없이 뛰어서 탈출한 김창수 씨는 다행히 살아남아 손 목사가 죽기 직전까지의 순간을 세상에 알렸다.

장례식 때 손양원 목사 장례의 상주를 맡았은 안재선 씨는 가장 슬퍼했으며 손 목사가 자신을 따라 목사가 되기를 희망했던 안재선 씨는 1979년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평신도로 남았고,[7] 그의 아들인 안경선 씨는 목사가 되었다.
손양원의 묘지는 그가 봉사했던 애양원 근처에 있으며 손양원이 총살당한 곳(여수시 둔덕동)에는 그를 추모하는 작은 공원이 만들어져 있다.

2 기타

손양원 목사가 활동한 애양원이 있는 여수시에는 그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으며, 이와 관련된 탓인지 여수를 비롯한 전남 동부권 지역은 개신교 성향이 비교적 강한 편이다. 기념관은 여수공항 뒷편 도성마을에 위치하고 있고, 여수 35번순천 96번의 종점이라서 쉽게 찾아올 수 있다.

손양원 목사의 생애를 다룬 책으로는 딸인 손동희 씨가 쓴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와 소설 <사랑의 원자탄>이 있다. 2012년에는 그의 생애를 다룬 창작 오페라 '손양원'이 제작되기도 했다. 다만 오페라의 경우엔 개신교의 색채가 강해서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2013년 12월 25일 성탄 특집으로 KBS가 특집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2015년 10월 고향인 함안군에 손양원 목사 기념관이 개관되었다.

  1.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손연준이 본명으로 여수 애양원에 교역자로 부임한 이후 애양원(愛養院)양원을 따서 손양원(孫良源)으로 개명을 하신것이다.
  2. 산돌은 '살아있는 돌'란 뜻이다. 신약성경의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3. 이것으로 검색 시 이 문서로 들어올 수 있다.
  4. 일제 시대에는 기독교 탄압이 심했고, 그나마도 예배를 보기 전에 신토신상에 참배를 하지 않으면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다. 그 악습이 해방이 된 뒤에도 태연하게 계속되고 있었던 것.
  5. 다만 손양원 목사의 딸 손동희씨가 쓴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목사를 보면 이때 안재선은 자신은 이 둘을 죽이지 않았고 단지 확인사살만 한것이라고자신의 범행을 강력하게 부인했는데 오히려 시민들은 한번죽인걸로도 모자라 죽은사람에 또 총을 쏘아 두번 죽였냐?며 크게 분노했다고이를 두고 혹떼려 하다 혹붙였다고 하는거다
  6. 참고로 안재선 씨의 처형이 마을 사람들과 애양원 환자들에 의해 집행되려 할 때, 손 목사는 설교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래서 당시 여고생이던 딸 손동희 씨에게 '빨리 가서 안재선 씨가 마을 사람들에게 처형당하는 것을 말리고 자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라'고 부탁했는데, 당연히 손동희 씨는 자신의 친오빠들을 죽인 자를 살리는 것도 모자라 한 가족이 되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처형장으로 가면서도 '이놈을 죽일까, 살릴까?'하고 수백번도 더 고민했다고.
  7. 안재선 씨는 손 목사의 양아들이란 위치 때문에 주위에서 지나친 관심을 가졌던 터라 크게 심적으로 괴로워해서 목사가 되는 것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