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종(13대)

남송의 역대 황제
12대 광종 자황제 조돈13대 영종 공황제 조확14대 이종 안황제 조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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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영종(寧宗)
시호법천비도순덕무공인문철무성예공효황제
(法天備道純德茂功仁文哲武聖睿恭孝皇帝)
연호경원(慶元, 1195년 ~ 1201년)
가태(嘉泰, 1201년 ~ 1205년)
개희(開禧, 1205년 ~ 1208년)
가정(嘉定, 1208년 ~ 1225년)
조(趙)
확(擴)
생몰기간1168년 11월 18일 ~ 1224년 9월 18일


宋寧宗

송광종의 차남으로 자의황후 이씨(이봉랑) 소생이다. 시호는 법천비도순덕무공인문철무성예공효황제(法天備道純德茂功仁文哲武聖睿恭孝皇帝).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으며 병풍찬 음식을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고 을 많이 마시면 병이 나니 적절히 하자라고 적어 놓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 이 때문에 신하들이 감탄했으나, 사실은 아버지 광종처럼 어리석었다. 정신병자였던 광종이 재상 조여우(趙汝愚)[1], 한탁주(韓侂胄)[2] 등에 의해 퇴위당하고 상황이 되자 즉위했다. 한탁주는 이 공적으로 권력의 자리에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이라 생각했으나, 한탁주의 인격을 좋아하지 않은 조여우 등은 한탁주을 멀리했다.

이것에 원한을 품은 한탁주는 조여우 등을 몰아내기 위한 운동을 시작해 조여우를 몰아내고 조여우 편에 섰던 주희, 주필대, 유정, 왕란, 팽귀년 등 59명을 금고형에 처했다. 거기다 주자학을 거짓 학금이라고 탄압하니 이 사건들을 '경원의 당금'이라고 부른다. 이 무렵 칭기즈 칸몽골을 통일하고 나라를 침공했으며 금나라가 점차 망국의 길로 빠졌다.

재상이 된 한탁주는 금나라가 비실비실하다고 얕보고 무리하게 금나라 북벌을 강행하다 오히려 대패했다. 이에 대노한 금나라 장종이 한탁주의 머리를 요구하자 사미원(史弥遠)은 이 틈을 타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영종에게 그렇게 할 것을 권했다. 한탁주는 참수되어 금나라로 보내졌으며 그의 머리는 수도 연경의 깃대에 내걸렸다. 이 때 장종은 종묘에 가서 조상들에게 다시 한 번 송나라에 대한 승리를 고했다. 이 때 사미원은 그 후 26년 동안 재상의 지위를 차지해 실권을 장악했다. 남송의 조정이 이런 당파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금나라를 차차 기울고 몽골은 나날이 강성해지고 있었다.

영종은 아들이 9명이나 있었지만 모두 요절해 버렸다. 더구나 당시에는 할아버지 효종과 아버지 광종의 자손이 자신 외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태조의 아들 조덕소의 10세손 조순(趙詢)[3]을 뽑아 양자로 삼고 황태자로 삼았으나, 먼저 죽는 바람에[4] 태조의 아들 조덕방의 9세손 조횡[5]을 뽑아 새로 양자로 삼았다. 조횡은 원래 광종의 손자 위(魏)왕 조병[6]의 양자였으므로 영종은 사촌뻘인 조횡을 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재상 사미원이 조횡과 불화하여 태후와 짜고 태조의 11대손 조여겨를 다시 양자로 뽑아 태자로 삼게 했으며 조횡은 이후 사미원에 의해 자진을 강요당한다. 조여거는 태자가 된 후 이름을 조윤으로 개명했는데 그가 바로 영종의 사후 즉위한 이종이며, 영종은 1224년 죽은 뒤 영무릉에 안장되었다.

  1. 태종의 장남인 한공헌왕 조원좌의 7대손이다
  2. 북송의 명신 한기의 증손자이며, 영종의 황후인 공숙황후(恭淑皇后)의 종조부이다
  3. 본명은 조여원(趙与愿)
  4. 시호는 경헌태자
  5. 본명은 조귀화(趙貴和)
  6. 광종의 차남 조개의 외아들로 후사없이 요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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