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송의 역대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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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 이종(理宗) | |
시호 | 건도비덕대공복흥열문인무성명안효황제 (建道備德大功復興烈文仁武聖明安孝皇帝) | |
연호 | 보경(寶慶, 1225년 ~ 1227년) 소정(紹定, 1228년 ~ 1233년) 단평(端平, 1234년 ~ 1236년) 가희(嘉熙, 1237년 ~ 1240년) 순우(淳祐, 1241녀 ~ 1252년) 보우(寶祐, 1253년 ~ 1258년) 개경(開慶, 1259년) 경정(景定, 1260년 ~ 1264년) | |
성 | 조(趙) | |
휘 | 윤(昀) | |
생몰기간 | 1205년 1월 26일 ~ 1264년 11월 16일 | |
재위기간 | 1224년 9월 17일 ~ 1264년 11월 16일 |
역대제왕묘 배향자 |
송의 14대 황제. 송태조의 아들 조덕소의 10대손으로 영왕 조희로와 자헌부인 전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조여거로 시호는 건도비덕대공부흥열문인무성명안효황제(建道備德大功復興烈文仁武聖明安孝皇帝).
송영종이 9명의 아들을 모두 잃은 후, 원래는 조횡을 양자로 삼았다가 폐하고 대신 이 사람을 조귀성으로 개명시키고 태자로 삼았다. 영종의 건강이 나빠지자 조귀성은 즉위할 것을 대비해 피휘를 위해 조윤으로 개명했다.
당시에는 금나라는 쇠퇴하고 몽골이 급속하게 세력을 확대했다. 사미원이 죽자 이종은 친정을 시작했으며 몽골은 금나라의 수도 개봉을 점령했다. 이에 금나라 애종은 채주로 달아났으며 몽골은 1232년 12월 양양에 주둔해 있는 남송의 경호제치사(京湖制置使) 사숭지(史嵩之)에게 사신을 보내 금 공격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였다. 금의 채주를 남송과 연합하여 공격하자는 것, 그리고 남송에게 군량을 제공해달라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사숭지는 이 제의를 수도 임안에 즉시 보고하였는데 남송 조정에서는 그 수락여부를 둘러싸고 쟁론이 벌어졌다. 일부 신하들은 과거 북송 때 금과 연합하여 요를 멸망시켰다가, 뒤를 이어 금의 공격을 받아 화북을 빼앗겼던 전철을 밟는 것 아닌가 하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의견은 금을 멸망시켜 옛 원수를 갚자는 압도적 다수의 주장에 묻혀버렸다. 결국 남송은 1233년 6월 몽골측에 사자를 보내 그 제의의 수락을 통보하였다.
금의 사자는 이미 남송이 몽골의 제의를 수락한 이후인 1233년 8월에야 찾아왔다. 금은 남송과 몽고 사이에 맹약이 체결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금의 사자는 남송에 대해 호소하였다.
몽고는 40개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마침내 서하에 이르렀습니다. 서하를 멸망시키고 나서는 우리에게 왔습니다. 우리가 망한다면 그 다음은 반드시 송국(남송)일 것입니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것, 이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송국(남송)이 우리와 동맹하는 것은 우리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송국(남송)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남송은 이미 방침을 정한 후였다. 애당최 금선종이 몽골의 공격을 받았을 때 남송과 연대하는게 아닌 공격하여 영토를 흡수하는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남송은 금의 연대 제의를 일축하고 몽골와의 체결한 맹약에 따라 이 해 10월 명장 맹공(孟珙)을 파견하여 타차르가 이끄는 몽골의 금 공격을 지원토록 하였다. 맹공은 군대 3만 명을 이끌고 채주에 당도하였다. 결국 애종은 자살했으며 뒤를 이은 말제마저 포로가 되어 처형되었고 이렇게 금나라는 멸망했다. 맹공은 자살한 금 애종의 두개골을 지니고 개선하였다. 남송의 조야는 상하 할 것 없이 원수를 갚고 국치를 씻었다는 기쁨에 휩싸였다. 이종은 애종의 두개골을 종묘에 모셔진 송휘종, 송흠종 두 황제의 초상화 앞에 바치고 그들의 영령을 위로하였다. 이어 성대한 연회가 베풀어졌으며 금 멸망의 전투에 참여했던 장수들에게 논공행상이 행해졌다.
이러한 흥분이 가시고 난 후 이제 몽골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대한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내외 대신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대략 사숭지를 중심으로 하는 신중론자들과 재상 정청지(鄭淸之)를 중심으로 하는 적극론자들이 팽팽히 맞섰다. 신중론자들은 몽골을 자극하지 말고 국경에 대한 방비에 진력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적극론자들은 화북 일대로 진군하여 옛 북송의 영역을 수복하여야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 적극론자들의 주장은 ‘몽골군은 이미 북쪽으로 귀환했고 하남 일대에는 아무런 군대도 배치되어 있지 않습니다.’는 군사정보에 의거하고 있었다. 이러한 의견 대립 속에서 이종은 적극론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는데 그는 자신의 치세 동안 옛 북송의 수도권이었던 하남을 회복한다는 대업을 이루고 싶어했다.
이에 따라 1234년 6월 하남 일대를 수복하기 위한 군대가 파견되었다. 남송의 군대는 무인지경을 달려 북송의 옛 수도 개봉과 낙양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북송시대 화려한 문화를 꽃 피웠던 이들 도시는 오랜 전란의 끝에 거의 폐허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거기다가 남송군의 진주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군량 부족에 허덕였던 데다가 무단 침공에 분노한 몽골군의 역습을 받아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기껏 손에 넣은 하남을 도로 뱉고 빈 손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종의 출정 명령을 받고 당당히 출발한 지 불과 2개월도 지나지 않은 시점의 일이었다. 이러한 하남 일대에 대한 진공을 ‘단평입락(端平入洛)’이라 부른다.
이종은 영종의 양자 시절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첫 닭이 울 때 일어나 잠들 때까지 제왕학 수업과 예절 수업, 그리고 유학에 관한 공부를 했다. 그래서인지 황제가 된 후 이종은 유학 장려에 힘을 썼다. 그러나 머지 않아 이종은 사치향락에 빠지고 가사도에게 모든 정사를 위임했으며 잔인한 고문을 만들어 뼈가 드러나도록 고통을 주는 등 폭군이 되었다.[1] 이종은 40년 동안 통치했으나, 요절한 외아들 외에 후사가 없어 자신의 조카 조맹계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키웠다. 이 조맹계가 이종 사후 즉위한 도종이다. 이종은 1264년 죽었으며 영목릉에 안장되었다.
그 후 1275년 원나라 라마승이자 강남석교총통 양련진가에 의해 다른 남송 황제, 황후, 제왕릉과 더불어 도굴되었으며 이종의 시신은 밖으로 끌려나와 거꾸로 매달리는 수모를 겪었다.[2] 그리고 이종의 머리는 잘려 술잔으로 사용되었다.
- ↑ 이 고문은 뒤를 이은 송도종이 폐지했는데 도종도 암군이라는 점을 볼 때 이게 얼마나 잔인했는지 알 수 있다.
- ↑ 시신 방부 처리에 사용한 수은을 빼내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도 있고 야명주를 빼내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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