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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鎖國

1 개요

쇠사슬 쇄(鎖)를 쓴다. 쇠사슬로 걸어잠근 듯이 다른 나라와 교류를 하지 않는다는 뜻. 세간에서의 이미지는 하면 반드시 망하는 거. (...) 적어도 동양 근현대사를 볼 때 이걸 해서 잘 풀린 나라가 없다. 이해가 잘 안 간다면 파주시 바로 를 보면 된다

그런데 최근에는 여러 장점들이 보여 다시 재평가받기 시작해, 역덕들 사이에서 토론이 많이 벌어지고 있으며, 현재 국내의 교육과정에서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으로 부르도록 권고받고 있다.

현대 일본 넷 우익들이 애타게 열망하는 정책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2 각 국의 상황

2.1 조선의 쇄국정책

흔히 흥선 대원군을 쇄국정책의 대명사로 알지만 쇄국이란 단어 자체는 애당초 1880년대 일본에서 나온 단어다.

조선왕조가 대외무역을 억압했다는 모순인 주장이 나오는데 일본의 해외출국한 국민의 재입국 금지, 포르투갈 상인 추방과 중국의 공행 무역의 폐쇄성을 비교해보면 조선은 그다지 폐쇄적인 편은 아니었다. 다만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특성상 국교가 제한적이라 이에 따라 무역도 그랬을 뿐이다. 서양과 안 교류했냐는 의문이 든다면 세계지도 한 번 살펴봐라. 사방이 막혔고 그나마 뚫린 남중국해도 류큐와 대만이 있다. 아니, 사실 일부러 정책으로 억압할 필요도 별달리 없는데 국내 시장과 상공업이 극히 제한적으로 발달한 나라가 활발한 대외무역이 가능할 리가 없다.

하지만 대외무역을 크게 억압하지 않았다 뿐이지 굳이 하려고 들지도 않았고 겨우겨우 찾아온 이양선(異樣船)의 경우에는 우리는 청의 속국이다 드립까지 치면서 모조리 돌려보냈다. 흥선 대원군이 쇄국정책의 대명사 정도로 잘못 드러났어도 이러한 쇄국정책은 최소 정조, 길게는 하멜이 표류하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때도 이양선이 오면 그냥 내쫓았다. 네덜란드 상선 드 혼드 호가 우연히 조선에 정박했을 때는 지방 변장들이 36명의 군졸들을 데리고 무력 진압을 시도한 적도 있었고 정조 시절에도 이양선의 출현에 무력 진압을 시도하다가 이양선 선원들의 반격으로 군졸들이 놀라 달아나는 바람에 처참하게 깨지기도 했다.

이후 순조, 헌종, 철종 시대의 이양선의 출입에도 꿋꿋하게 교역할 생각 없다고 뻗댔다. 대원군이 전쟁불사까지 외치면서 강경하게 나간 것도 있지만 대원군 시절의 대표적인 이양선인 제너럴 셔먼 호의 경우에는 다른 이양선들이 가라고 하면 순순히 따랐던 데에 비해서 조선 군관을 억류하는 등 행패를 부리고 약탈과 살인을 저지르며 어그로를 팍팍 끌어서 제 명을 재촉한 격이다. 거기에 자극받은 서양이 줄줄이 개입하면서 일이 커졌고, 결국 그것 때문에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흥선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서 조선의 쇄국정책을 가속화했다가, 결국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으로 쇄국정책이 끝나게 된다.

2.2 에도막부의 쇄국정책

전국시대일본은 서양과 무역을 하고, 일본인이 동남아시아로 진출할 정도로 개방적인 국가였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쿠가와 막부가 나오면서 외세와의 교류를 꺼렸다. 그 까닭은 무역으로 부를 쌓고 신무기를 손에 넣은 각지의 지방 영주들이 막부에 대항할 지도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가사키데지마조선 통신사 같은 예외적인 몇몇 사례를 뺀 모든 교역을 중단했다. 그러나 막부말 흑선을 비롯한 열강의 출현으로 조선보다는 이른 시기에 개항했으며, 내전 과정에서 신식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했고, 운도 좋았던 편이라서 결과적으로는 러일전쟁 이후에는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강국으로 먼저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