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

辛未洋擾[1]
영어 : United States expedition to Korea

신미양요
날짜
1871년 6월 1일[2] ~ 1871년 6월 11일[3]
조선 강화도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조선아메리카 합중국
지휘관어재연†
정기원
이현학†
김현경†
존 로저스
윈필드 스콧 슐레이
병력보병 약 1,000명USS 콜로라도
USS 알래스카
USS 팔로스
USS 모노캐시
USS 베니치아
해군, 해병 900명
피해 규모243명 전사
100명 익사
20명 포로
3명 전사
10명 부상
결과
미국의 군사적 승리, 전략적 실패(한반도 포기)
기타
조선의 통상수교 거부 정책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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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함락 직후 '어재연 장군 수(帥)자기'
앞에서 인증샷을 찍은 미 해병대원들[4]

1 개요

이교도우리의 작은 전쟁(Our little war with the heathen)[5]

조선 왕조와 미국의 최초이자 마지막 교전이자 서구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킨 사건.[6]

1866년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 공격 및 만행을 저지르던 제너럴 셔먼호를 불살라 버린 사건에 대한 항의 + 은근슬쩍 강제 개항 의도로 미국이 1871년 강화도를 침공한 사건(이 때 미국은 남북전쟁의 진통을 겪고 있던 때라 5년의 시간차가 생기게 되었다).

미국은 1871년 2월 21일에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을 공동 조사하자는 의견을 피력한 바가 있다. 미국은 이미 흑선 사건이라는 경험을 통해 포함외교(gunship diplomacy)에 맛을 들이고 있었고, 조선도 마찬가지로 수월하게 개항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판단에는 조선군의 전투력이 별 볼일 없으리라는 판단도 한몫했는데, 대체로 맞는 사실이었으나 조선군의 전투 의지에서만큼은 예측이 틀렸고, 이는 나중에 원정군을 이끄는 로저스 제독을 당황하게 한 사실이 된다.

“미국 사신이 보낸 서신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순전히 병인년(1866)에 그 나라의 상선(商船) 두 척(隻)이 우리나라의 경내에 들어왔다가 한 척은 풍랑을 만났다 구원되었으나 한 척은 사람도 죽고 화물도 없어졌는데, 이처럼 서로 판이하게 하나는 구원되고 하나는 피해를 당한 까닭을 알 수 없으니 그 원인을 알고 싶으며, 뒷날 그 나라의 상선이 혹시 우리나라 영해에서 조난당할 경우 원칙에 입각하여 구해주고 화목하게 서로 대우하자는 등의 말이었습니다."

조선은 청나라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데 조난당하여 와서 정박하는 다른 나라의 여객선의 경우에는 혹 양식을 원조하고 필수품을 대준 뒤에 순풍을 기다려 돌려보내기도 하고, 혹 배가 파손되어 완전치 못하면 육로로 호송하여 각각 그들의 소원대로 해 주고 아울러 지장이 없게 해 주었습니다.

(중략)

이번에 온 편지에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자고 희망하였는데, 바다 건너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로서 호의를 가지고 서로 관계를 맺자면 접대해서 보내는 도리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들이 의논해서 판명하고 교섭하자고 하는데 의논하여 판명할 것이 무슨 일이고 교섭하자는 것은 어떤 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조난당한 객선이 있으면 돌보아 주고, 호송해 보내는 문제는 의논하여 판명하지 않아도 의심할 것이 없다는 것을 보장합니다. 혹시 호의를 품지 않고 와서 함부로 멸시하고 학대한다면 방어하고 소멸해버릴 것이니 미국 관리와 통역들은 그저 우리 백성들이나 통제하고 도리에 어긋나게 행동하지 말도록 해야 할 것인데 교섭 여부에 대해서야 다시 더 논할 여지가 있습니까?

종전에 다른 나라들이 조선의 풍토와 물산을 알지 못하고 매번 통상 문제를 가지고 여러 차례 교섭하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으며, 외국 장사치들도 이득을 볼 것이 없을 것이라는데 대해서는 이미 동치 5년의 공문에서 진술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바닷가의 한 구석에 있는 작은 나라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일입니다. 백성들은 가난하고 물산은 변변치 못하며 금은(金銀)·주옥(珠玉)은 원래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는 것이고 미속(米粟)과 포백(布帛)은 넉넉했던 적이 없으니, 국내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국내의 소비도 감당할 수 없는데 만약 다시 다른 나라와 유통하여 나라 안을 고갈시킨다면 이 조그만한 강토는 틀림없이 위기에 빠져 보존되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나라의 풍속이 검박하고 기술이 조잡하여 한 가지 물건도 다른 나라와 교역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절대로 교역할 수 없음이 이와 같고 외국 장사치들이 이득 볼 것이 없음이 또한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매번 통상할 의사를 가지는 것은 대체로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똑똑히 알지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이번 미국 사신의 편지에서 아직 문제를 끄집어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관리들과 의논하여 판명하고 교섭하자고 요청한 것도 혹시 이러한 일들을 하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난당한 객선은 전례에 따라 구호할 것이니 다시 번거롭게 의논할 필요가 없으며, 기타 문제도 따로 토의하여 판명할 것이 없으니 오가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러한 내용으로 그 나라 사신을 잘 타일러서 의혹을 풀어줌으로써 각각 편안하고 무사하게 지내게 한다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요약하면 "국적선 조난문제면 구호해서 해당 국가로 보낼 테니 걱정할 것도 없고, 교역 문제는 만들어낼 물건도 없고 팔 물건도 그렇게 넉넉지도 않고 그나마 우리 쓸 것도 많지 않으니 장사 못함다."란 얘기.

하지만 미국은 이에 대한 답신을 보내지 않았고, 1871년 4월 9일에 함대를 배치하고 편지를 보냈다.

서양 사람의 편지에서, ‘회답을 올립니다. 어제 영업선에서 편지를 받아보니, 「우리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여기에 온 것은 무슨 일 때문이냐?」고 하였고, 「여기로 온 경위를 알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등의 내용이었는데, 이미 이 문제들을 우리 흠차대인(欽差大人)과 제독대인(提督大人)에게 편지로 알렸고, 회답을 해주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 배는 대아메리카합중국(大亞美理駕合衆國), 즉 대미국(大美國)의 배이며 여기에 온 것은 우리 흠차대인이 조선의 높은 관리와 협상할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약을 체결하려면 아직도 날짜가 필요하므로 우리 배는 이 바다 한 지역에서 정박하고 있으면서 조약이 체결되기를 기다렸다가 돌아가겠습니다. 배에 머물러 있는 두 대인은 다 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미국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는 어전회의 기록에서 엿볼 수 있다. 고종은 영의정 김병학에게 "미리견(미국)이라는 나라는 어떠한 나라인가?"라고 질문하였다. 그러자 김병학은 "미리견이란 나라에는 작은 부락만 있으며, 화성돈(워싱턴)이란 촌장이 나와서 영길리(영국)와 교섭하면서 만든 촌락 정도의 나라"라면서 "바다를 왕래할 때 약탈하는 습성이 있는 해적과 다를 바 없는 이들"이라고 답하였다. 이에 고종은 "그렇다면 오랑캐와 통교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2 접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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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이 개항 요구가 끝내 실패로 돌아가자 미국은 로저스 제독을 지휘관으로 하는 원정대를 편성했으며, 프랑스에도 연합 제의를 했으나, 프랑스는 병인양요 당시 작성한 지도 정도만 넘겨주고 협력을 거부했다. 결국 미국 단독으로 5월 14일 나가사키에서 출항해 5월 21일 수원 인근에서 조선 측에 포착된다. 조선은 5월 31일에 문정관을 파견해 이들의 접근 의도를 추궁했으나, 미군은 문정관의 추궁에 딴청으로 일관하며 고위 관료를 만나게 해 달라는 요구만 반복한다[7]. 조선 측은 협상을 하자면서 군대를 끌고 온 것은 무슨 도리이며 개항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고 이를 일축한다.

3 전투 발발 : 손돌목 포격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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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진을 함락시킨 미군들

첫 접촉이 허사로 끝난 이후 미합중국 해군함대한강의 수심을 측정하면서 6월 1일 강화도와 본토 사이의 수로인 손돌목에 접근하여 오자, 강화도의 조선군이 경고 포격을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남북전쟁 참전자인 당시 함장들 중 한 사람이 남북전쟁 때도 이렇게 맹렬한 포화를 받은 적은 없었다고 술회할 정도로 치열한 화망사격으로, 공식 역사는 이 사건을 손돌목 포격사건이라고 부른다. 400문에 달하는 양측 화포가 불을 뿜었으나, 피해는 미군 부상 1, 조선군 전사 1명에 불과했다. 서로 그냥 맹목적으로 쏴댄 후 미군이 먼저 물러난 것으로 결말지어졌기 때문이다.[8]

한차례 교전을 벌인 미군은 대원군과 글을 주고 받는다.

“올봄에 북경(北京) 예부(禮部)에서 자문(咨文)을 보내어 귀국 사신의 편지를 전해왔기에 우리 조정에서는 이미 의논하고 회답 자문을 보낸 동시에 귀 대인에게 전해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또 생각건대 귀국은 예의를 숭상하는 풍속이 본래 이름난 나라로 다른 나라들보다 뛰어났습니다.

귀 대인은 아마도 사리에 밝아서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을 터인데, 이번에 어찌하여 멀리 바다를 건너와서 남의 나라에 깊이 들어왔습니까? 설사 서로 살해하는 일은 없었다고 하지만 누구인들 의심하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요새지에 갑자기 외선(外船)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모든 나라의 일반적 규범으로써 처지를 바꾸어놓고 보아도 모두 그러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귀선(貴船)이 바닷가 요새지를 거슬러 올라와서 피차간에 대포를 쏘며 서로 경계하는 조치까지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미 호의로 대하자고 말하고서도 한바탕 이런 사단이 있게 되었으니 매우 개탄할 노릇입니다. 귀선이 오고부터 연해의 관리들과 무관들에게 절대로 사단을 일으켜 사이가 나빠지게 하지 말라고 경계하여 타일렀습니다. 그렇지만 귀선이 다른 나라의 규례를 아랑곳하지 않고 요새지 어구까지 깊이 들어온 이상 변경을 방비하는 신하들로 말하면 그 임무가 방어인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 일에 대해 괴이하게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혹시 북경 예부에서 우리의 회답 자문을 미처 전하지 못하여 귀 대인이 우리나라의 제반 사정을 잘 알지 못하여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닙니까? 이제 회답 자문 부본을 보내니 한번 보게 되면 남김없이 다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외국과 서로 교통(交通)하지 않는 것은 바로 500년 동안 조종(祖宗)이 지켜온 확고한 법으로서 천하가 다 아는 바이며, 청나라 황제도 옛 법을 파괴할 수는 없다는 데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귀국 사신이 협상하려고 하는 문제로 말하면 어떤 일이나 어떤 문제이거나를 막론하고 애초에 협상할 것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높은 관리와 서로 만날 것을 기다리겠습니까?

넓은 천지에서 만방의 생명들이 그 안에서 살면서 다 제대로 자기의 생활을 이루어가니 동방이나 서양은 각기 자기의 정치를 잘하고 자기의 백성들을 안정시켜 화목하게 살아가며 서로 침략하고 약탈하는 일이 없도록 하니, 이것은 바로 천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혹시 그렇지 못해서 위로 하늘을 노하게 한다면 더없이 상서롭지 못할 것입니다. 귀 대인이 어찌 이 이치를 모르겠습니까?

풍파만리에 고생하였으리라 생각하면서 변변치 못한 물품으로 여행의 음식물로 쓰도록 도와주는 것은 주인의 예절이니 거절하지 말고 받아주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대아메리카합중국[大亞美理駕合衆國〕 찬리(贊理) 흠차(欽差)인 영어, 한어 문건을 맡아보는 총판두(總辦杜)는【이름은 덕수(德綏), 중국인이다.】 회답합니다. 며칠 전에 군주가 파견한 우리나라 관리에게 보내온 공문과 대청(大淸) 나라 예부(禮部)에 회답한 자문 부본에 대해 다 같이 군주가 파견한 우리 제헌(提憲)에게 전하였으며 명령을 받들어 이렇게 회답합니다. 당신들에게서 온 편지에서 언급한 내용에 의하면 귀 조정이 우리나라 군주가 파견한 관리와 그가 와서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에 대하여 우의를 가지고 협상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군주가 파견한 우리 제헌이 매우 안타까워하는 문제입니다.

까닭 없이 공격한 문제에 대해서는 잘못을 책망하지 않고 도리어 비호하면서 변경을 책임진 신하의 직책으로서는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제헌은 원래 포를 쏜 행위는 군사와 백성들의 망동에서 생긴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귀 조정에서 이것을 알고 꼭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높은 관리를 파견하여 협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서둘러 행동하지 않고 기일을 늦추어가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만일 귀 조정에서 3, 4일내에 만나서 협상할 의사가 없이 기한이 되기만 기다린다면 전적으로 군주가 파견한 우리 제헌이 처리하는 대로 할 것입니다. 기일이 매우 촉박하므로 대략 이와 같이 적습니다.

보내준 많은 진귀한 물건들을 받고 은혜와 사랑을 충분히 알 수 있으며 무엇이라 감사를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보내온 예물을 돌려보냅니다. 이와 같이 회답합니다.”

4 처절한 저항 : 광성보 전투

미국은 대원군의 주장에 포격한 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하면서 거듭 고위 관리를 보내서 협상할 것을 요구했지만 대원군은 당연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에 로저스 제독이 지휘하는 미 해군은 6월 10일에 상륙해 덕진진과 초지진을 점령, 이어 어재연이 지키던 광성보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조선과 미국의 전력 및 피해를 비교해 보면...

미군

군함
- USS Colorado(1856년 건조/3425톤/10인치 포 2문, 9인치 포 28문, 8인치포 14문)
- USS Alaska(1868년 건조/2394톤/11인치 활강포 1문, 60파운드 포 1문, 20파운드 포 2문)
- USS Palos(1865년 건조/420톤/포 2문)
- USS Monocacy(1864년 건조/1370톤/13인치 구포 1문, 32파운드 포 2문)
- USS Benicia(1868년 건조/2400톤/11인치 활강포 1문, 9인치 활강포 10문, 60파운드 강선포 1문, 20파운드 후장식 강선포 1문)

병력
- 해군 및 해병대 1,230명,[9] 12파운드 곡사포 85문

조선군

지상병력
- 500여명.[10] 주무장은 화승총[11]

양측 피해

미군 : 전사 3명, 부상 10명[12]

조선군 : 전사 243명, 익사 100여명, 포로 20명[13] 초지진, 덕진진 및 광성보 시설 함락 및 조직적인 파괴와 요새 중장비 전량 노획 및 파괴, 수자기 약탈

강력한 근대식 신식 화기로 무장하고 인디언 전쟁남북전쟁 등을 거치며 단련된 미 해군에게 병력과 화력 모두 열세였던 조선군은 그야말로 참패했다.

조선군의 경우 미 해군의 상륙작전 3일 전에야 가까스로 파견된 중앙군 3개 초(오늘날의 중대급)를 광성보에 집중 배치, 미군의 공격을 강화부에서 광성보로 유도하려 했다. 이를 위해 조선군은 미군 상륙 당일 지방군 소병력을 초지진 야습에 투입해서 미군의 반격을 유도했고, 이후 해안도로를 따라 북상하는 미군 앞에서 소규모 척후 병력을 수시로 투입해 미군의 관심을 광성보 쪽으로 돌리려는 두드러진 시도를 반복했다.

이후의 전투에서도 조선군은 예하 3개 초가 모두 타 군영 소속[14]이어서 제대로 된 전투 조직을 구축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여기에 이들은 지휘관 어재연을 제외하고는 강화도에 와 본 적이 아예 없어[15] 유리한 방어 위치가 어디인지조차 모르는 말 그대로 눈뜬 장님 상태였다. 여기에 화력조차 열세인데다 화력 집중을 위한 훈련도감 기반의 기초 훈련조차 제대로 돼 있지 않은 것이 19세기 후반 조선군의 현실이었던 탓에, 미군이 본격적으로 광성보를 공격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조선군은 조직적인 화망을 구성하지도 못했고 그저 개별적으로 총격을 가했기 때문에 미군에게 사실상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무려 200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천천히 전진하는 동안 조선군 200여 명에게 집중사격을 당했음에도, 총에 맞은 미군은 단 2명(해군 견습수병(Landsman)과 해병상병(Corporal) 제임스 도허티 포함 각 1명)[16] 뿐이었다. 나머지 미군 사상자는 모두 성벽 위에 기어오른 뒤에야 발생했는데 미군 전사자 가운데 가장 계급이 높은 휴 맥키 해군 대위(추서 계급, 전사 당시 중위)는 다 죽어가던 조선군이 마지막 힘을 다하여 찌른 창에 배가 뚫려 치명상을 입고 후송되었다가 USS Monocacy 함에서 죽었다. 미군 측 기록에 의하면 다 죽어가던 조선군이 맥키를 찌르고 자신들을 노려보면서 그도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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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멸한 광성보의 조선군 주검.

하지만 이런 참패의 와중에서도 조선군은 물러서지 않고 결사항전 했다. 패배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단 한 명의 탈영병도 없었고,[17] 거의 학살 수준에 달한 광성보 전투에서도 미군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몰아붙여도 끝까지 싸웠고 무기가 없는 자는 돌을 던기거나 흙을 뿌려서 저항했다. 함락 직후 패잔병들에게 말을 걸려고 시도했으나, 바로 자살하는 이도 있었다. 미군들을 노려보며 투신 자살하거나 아니면 미군의 총검을 잡고 자기 목을 찌르라는 투로 대던 조선군도 있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피투성이 조선군을 고통없이 죽여주자던 미군도 있었을 지경.

일단 위의 전사자와 부상자 수 비교를 보면 저게 정상적인 전투에서 나올 수 있는 비율이 아니다. 공격 측에서 사람이란 사람은 다 죽일 각오로 하거나 방어 측에서 다 죽을 각오로 싸우지 않는 한 나올 수 없는 수치. 그 전에 저 정도 전사비 자체가 왠만한 전력 차이로는 불가능한 비율이기도 하다.

남북전쟁의 베테랑들도 독종같이 달라붙는데 질릴 대로 질린 모양. 전투 개시 전, 조선군의 군가를 들은 한 미군 수병"무섭도록 구슬프고 장엄하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전후 기록들도 대개 완전히 바르긴 했는데... 뭐야 이 놈들 뭐하는 놈들이야... 그저 충공깽에 가깝다.[18]

참고로 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서도 로저스 제독이 손돌목 포격전에서 조선군을 제압하지 못하고 돌아온 미군 장교에게 이게 뭐하는거냐며 강력히 질책하자 그 장교는 남북전쟁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렇게 강력한 포격전은 경험한 적이 없다고 보고한다. 그 말에 로저스 제독이 그걸 말이라고 하냐며 미국군 장교에게 분노하자 로우 공사가 나서서 말리는 장면이 있다.[19]

그러나 군인들의 기강 문제와는 별개로 전략적인 측면에선 시작부터 실패한 일이기도 했다.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최소한의 병력이라도 수습해서 후를 도모하는 것이 기본이므로 당시 조선군의 지휘 체계가 얼마나 망가져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투 중간에 지휘관 자리에 있는 어재연이 전사[20]해 지도력의 부재가 있었고,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해군의 상륙을 허용해 왕실과 직접 연결된 기관인 외규장각이 탈탈 털린 경험이 있는 조선 입장에서는 상륙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제1 방책이었을 테니 유연한 대처를 기대하기 어렵기도 했다.

조선군은 광성보가 함락된 후에도 초지진 등지에서 첨사 이렴의 지휘아래 야간기습을 가했고 미 해군 함정 한 척을 패퇴시키는데 성공한다. 미군은 악착같이 덤벼드는 조선군에게 질려버린데다가 한양까지 점령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광성보를 점령한 바로 다음날인 6월 11일에 철군해버렸고 조정은 3일 후인 6월 14일에 그것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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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로 잡힌 조선군 사진.

미국은 마지막으로 사로잡은 포로들로 협상을 시도하나, 조선 조정은 수치스럽게 살아 포로로 잡힌 이들은 알 바 아니라고 딱 잘라거절했고 미국은 별 수 없이 이들을 그냥 석방해 버렸다. 이들을 찍은 사진이 미국에 남아있다. 포로로 잡혔던 그들은 미군이 주는 밥[21]을 내던지며 일절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냉담한 말과는 달리 조선 조정은 포로들이 귀환하자 치료와 구휼을 베푸는 등 잘 대우했다. (흔한 조선 조정의 츤데레)

미 해군이 철수한 이유는 다른 것도 있었는데 광성보를 공격하느라 탄약의 반 정도를 소모했고, 식수도 부족했으며, 풍토병이 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후 로저스 제독은 미국으로 귀환 후에 대체 그 비싼 원정비용 쓰고 얻은게 뭐냐고 크게 질책당했다. 불안정한 일본의 경우 신미양요와 같은 사건으로 정권이 붕괴할 가능성을 고려해 개항을 진행하였지만, 조선은 통치권이 아직 견고한 중앙 집권 상태였기 때문. 미군은 철수하면서 조선군 시신을 일부 수습해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장교진은 그대로 매장, 일부 조선병사들은 화장을 했는데 이후 시신 수습을 위해 도착한 강화도 진무사 정기원은 얼굴도 알아볼 수 없게 병사들을 불로 태워 화형시켰다며 분노하는 장계를 올리기도 했다.[22]

5 역사적 결과

5.1 미국 측

미군 전사자는 불과 3명 뿐이었지만, 전사자 수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미국의 목표는 최소한의 피해로, 단기간에, 조선을 개항시키려던 것이었기 때문. 베이징 주재 미국 공사 프레드릭 로우는 이같은 목표에 충실하게 움직여, 무력 충돌 전후에 조선과 대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군사적인 이득이나 피해와는 상관없이 결과는 조선의 개항 거부였다. 따라서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다음 두가지 중 하나. 본격적으로 침략하거나, 그냥 포기하고 물러서거나.

결과적으로 미국은 이 이상의 출혈을 감수하여 침략할만한 가치는 없다고 생각하여 한반도를 포기한다.

미국 입장에선 남북전쟁이 끝난 지도 얼마 안 되어서 더이상 외부에서 전쟁을 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한번 건드려 봤는데 예상보다 저항이 심각하고, 자기들의 병력과 식량도 부족한 상태여서 더이상 뭘 할 수가 없었다.

5.2 조선 측

전투 이후 대원군은 지지세력의 결속을 위해 척화 전쟁의 승리(...)를 괜찮아 막아냈다 선전하고, 척화비를 전국에 세운다. 덤으로 기세를 몰아 서원 철폐도 단행한다.

문제는, 조선인들도 바보는 아니었다는 것. 미국이 물러가긴 했지만 조선군 전멸이라는 결과는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박규수를 비롯한 개화파는 통상 거부 정책의 한계성을 재인식했고, 위정척사파는 위정척사파대로 흥선군의 개혁 정치 및 남인 등용으로는 양이의 군대를 막아낼 수 없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결국 단기적으로 신미양요는 대원군의 쇄국 정책에 힘을 실어주었으나, 내적으로 쌓이는 반발과 불안감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사건 불과 2년 뒤, 대원군은 최익현의 탄핵으로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하게 된다.

그런데 정작 집권한 고종은 개국, 개화파에 힘을 실어주었다(...). 신미양요가 일어난지 불과 4년 뒤, 일본이 미국을 흉내내어 운요호를 보내자, 별다른 충돌없이 냅다 개국해버린다(...).

어쨌든 그 결과로 조선은 근대화가 늦어서 결국 일제시기를 겪게된다.

6 뒷이야기

신미양요는 면제배갑이 활용된 전투이기도 하다. 의외로 총검이 면제배갑을 잘 뚫지 못해 미군을 당황하게 만들었다고. 미군은 이걸 노획해서 전시하기도 했다. 현재 단 1개만 남았는데, 한동안 미국에 있었다가 임대형식으로 반환받았다. 자세한 항목은 면제배갑 참고.

참고로, 이 당시 남북전쟁을 겪었던 미 해군 베테랑들에게도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던 조선군의 끈질김은 겨우 4년 후에 벌어진 운요호 사건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상대는 미군 베테랑보다 몇수 아래 실력에 숫자도 훨씬 적었는데 말이다. 이유는 군수품 문제. 그 당시 고종이 일대 군영의 주요 수입원이던 경강수세를 갑자기 혁파하는 병크를 저질러서, 몇달씩이나 군수 지원이 끊겼었다[23].

다른 국가와 비교해보자면,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에도 막부데꿀멍해서 전쟁은 피했다. 베트남은 프랑스의 선교사 살해를 명분으로 한 침공에 어설프게 전쟁을 벌였다가 국가적으로 망했다.[24] 그 밖에도 무수한 나라들이 서구 열강들에게 비슷하게 밀렸다.

신미양요 당시 미 해군에게 빼앗긴 어재연 수자기는 2007년부터 '10년 대여' 조건으로 국내에 들어와 있다. 이 유물은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 시대 실물 군기유물이다.[25] '10년'이라는 기간제한과 '대여'라는 표현에 피약탈국으로서 반감이 드는 건 어쩔수 없겠지만, 약탈문화재의 세계에서는 10년 대여 조건도 결코 박하다고 할 수 없으니(오히려 후한 조건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달갑지 않으나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열악하기 그지없는 한국의 군사유물 보존 실태를 고려하면[26] 냉정하게 말해 저 깃발은 미군이 가져가서 잘 보존해준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지, 안 그랬으면 우리는 수자기를 영영 그림으로나 봤을 것이다. 게다가 전시 교전으로 인해 얻은 정당한 노획품(민간에서 약탈한 물건이 아닌 병기나 군 피복, 서류 등 군사 및 정부 물품들.)은 국제법상 따로 조약으로 규정하지 않는 이상 상대국에 반납할 의무도 없다.[27]

그리고 내용을 읽어봤으면 알겠지만, 병인양요와 함께 국사한국근현대사 교육 과정을 비판할 때 빠지지 않는 사례이기도 하다. 서술 자체가 상세내용을 생략한 채 거의 승전처럼 되어 있으니. 일단 정치적으로 미국이 원하는 것을 하나도 얻지 못하고 돌아갔으니 완벽한 승리는 아니다. 단순 전과로 따지면 베트남,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은 승리를 거둔 것이고 소련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이기고 온 것이라 볼 수 있으니. 정리하자면 미국이 조선을 군사적으로는 압승을 거두었으나 조선의 개항이라는 정치적 목표의 달성에는 실패했다.

7 미디어

일본도 아니고 미국과의 전투라는 측면에서 그렇게 크게 다루어지지는 않았다. 한미통상 조약 이후 보빙사 파견까지 밀도 있게 다룬 80년대 사극 "풍운"에서도 그냥 나레이션으로 처리할 정도였다.

90년대 이후에 간간히 드러내기는 하는데 MBC 조선왕조 500년 대원군에선 병인양요와 함께 다루고 있는데 조선군이 처절하게 처발렸다는 걸 소름끼치게 잘 묘사했다. 극중 조선군들은 프랑스 및 미군 사격에 추풍낙엽 신세였다.

반대로 찬란한 여명에서는 수십의 미군이 죽는 장면이 묘사된다. 어재연 혼자 죽인 미군만 수십명이며 미군이 물러날때도 수십명의 시체가 쌓여있는 묘사가 있다. 이쯤되면 환타지.. 참고로 동 드라마에서 병인양요에 대한 묘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제마를 다룬 KBS 드라마 '태양인 이제마'의 후반부에 이 사건이 묘사되는데 때가 때인지라[28] 미군이 상당히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죽은 미군이 너무 많다. 막판 육반전에서 조선군 지휘관의 칼에 맞아죽는 미군과 조선군 졸병이 돌로 내려 찍어 죽이는 미군, 이제마가 당시 한국 사극의 단골 고증 오류였던 반자동 조총으로 쏴죽인 미군들만 쳐도 전체 전사자 수를 가볍게 넘긴다. 작품 전개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이때 스승을 잃은[29] 이제마는 조금이라도 백성들에게 보탬이 되고자 관직 생활을 시작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명성황후(드라마)에서는 18화에서 잠시 등장하는데 문제의 광성진 전투에서 미군이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나는 내용으로 나온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드라마들 모두 병인양요 때와 마찬가지로 전투에 투입된 미군은 해군과 해병대 병력이었음에도, 드라마에서는 어설프게 재현된 육군만 나온다는 공통된 비고증 요소가 있다. 제대로 해군과 해병대 병력이 나오는 건 강화도에 있는 기념관의 디오라마 정도이다.

한제국 건국사에서는 대체역사소설인 만큼 여기에 해당하는 사건은 나오는데, 실제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1만 명에 달하는 미국-영국-프랑스 연합군이 강화도로, 3천 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남부지방으로 침입하여 '양요'라고는 부를 수 없는 수준인 대규모 전쟁으로 일어난다. 여기서 조선이 승리한 덕분에 다른 아시아 국가와 달리 거의 대등한 조건으로 문호개방을 한다. 다만 전쟁이 크게 확대된 만큼 피해 역시 커졌다. 특히 강화도는 아주 궤멸적 피해를 입는다.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 영종진 등 포대들이 역사대로, 아니 역사 이상의 피해를 입고, 강화부성마저 떨어진다. 어재연 역시 역사대로 가지만, 정기원은 역사와 달리 죽는다.(어?)

나이트메어도 알고 있는 듯하다. 물론 대마귀.

  1. 미국(美國)과 일어난 교전이므로 '미'를 美로 착각할 수 있는데, "신미(辛未)"년에 일어난 교전이라는 뜻이므로 未가 맞다.
  2. 광성진 포격전을 기준
  3. 교전 종료 날짜
  4. 저 수자기는 136년후인 2007년에 10년 임대 형식으로 반환 받았다.
  5. 미국의 시카고 트리뷴에서 이 전쟁을 다룬 기사에서 사용한 헤드라인이다. 이는 미군 제독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기사 내용은 미국의 경제적 이권을 위한 조선 개입이 미군 목숨을 소모적으로 대한다고 비판적으로 보도하였다.
  6. 다른 의미의 조선과는 79년 후에 또 싸우게 된다...
  7. 이때 문정관 일행과 동승한 월미도의 촌장이 콜로라도 함 안에서 미군한테서 맥주 여러 병을 선물받고 웃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 남아있는데, 이 사진이 인터넷상에선 엉뚱하게 조선군 포로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8. 참전했던 미 해병대 대위의 편지에는 "그들의 포는 매우 조잡하오. 통나무로 된 포가 얹혀 밧줄로 묶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미리 정해진 지점 외로는 사격을 할 수 없다고 하오. 그래서 우리 배들이 가까이 접근했을 때에야 포격을 했소. 커다란 포환이 날아왔는데 배에는 전혀 맞지도 않았소. 단지 총통이라고 불리우는 소형화기에서 발사된 조잡한 탄환 두어 개가 적중했다고 하오. 그 총통이라는 것은 두 명이 어깨에 걸쳐메고 화승으로 발사하는 것이라고 하오. 단지 세 명의 우리 승조원들이 맞았는데 가벼운 부상이라고 하오. 최신의 무기로 무장한 우리들에게 그들이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은 당신도 잘 알 수 있을 것이요."라고 되어 있다.
  9. 레밍턴 롤링블럭 소총스프링필드 M1861 전장식 라이플로 무장
  10. 전투개시 며칠전에 급파되어 지휘체계 엉망에 제대로 된 지원도 받지 못함.
  11. 분당 10발 사정거리 400m vs 1 ~ 2발 사정거리 100m으로 양군의 화력차이는 1:50
  12. 무려 전사자 3명 중에서도 1명은 낙사 1명은 아군의 오인사격으로인한 사망인걸 감안하면...
  13. 고종실록에서는 이날 전투의 사상자를 전사 53명, 부상 24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미군의 집계는 투입 병력과 비교할 때 오차가 거의 없고, 참전 군인들의 수기와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 등의 추가 기록이 남아있으며, 생포한 포로만 20명에 달한다는 점에서 조선 측의 기록은 축소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사실 부대가 전멸한 시점에서 패자 측이 정확한 사상자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승정원일기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고종이 매일 각 진지로부터 현황 보고를 받고 한두 명의 전사자는 이름과 유족에 대한 구휼 대책까지 상세히 지시하는 등 적은 병력에도 상당히 체계적이고 정확한 보고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4. 조선군은 지방에 중앙군을 파견할 때 다른 군영 부대를 뒤섞어 보내는 이상한 관습이 있었다.(아마 같은 군영 부대만을 보내면 반란을 일으킬 우려를 해서 그런 듯.) 그런데 하필 조선군은 각 군영마다 군령이 다르고 훈련 방식도 달랐다. 다만 이러한 방식이 조선만의 특이한 방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영국군도 현재까지 원정군을 파병하는 경우 각 지역에 위치한 육군 연대에서 대대를 하나씩 뽑아 여단을 구성해서 보내는 방식이다. 그리고 비효율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게 당시 중앙 군영이라는게 그냥 이름 다른 부대인 게 아니라 국가 체제(세금이나 부역등)과 긴밀히 연결된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 부대를 전체 보냈다가 전멸해 버리거나 대다수가 사망하거나 하면 국가 체제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15. 어재연은 병인양요 당시 초지진에서 근무했었다.
  16. 상륙군은 해병대 소령이 지휘했으며, 해군 병력을 선두로 하여 해병대가 뒤따라 진격했다.
  17. 미군의 작전 보고서란 것을 언급하며 성벽이 함락된 후 조선군 100명 가량이 도망치다가 하필 그 방향에 막 전개를 마친 더글러스 카셀(Douglass Cassel) 해병 소령의 암스트롱 야포 포대가 있어, 이들의 산탄 사격에 순식간에 전멸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1차 보고자인 로저스 제독의 보고서에는 그런 내용을 확인할 수 없으며 참전 미군인 앨버트 가스텔의 기록 또한 이들이 한강에 투신 자살했다고 적고 있으며 국내에선 이쪽이 정설이다.
  18. 미국에겐 이로부터 70년 후 악랄하고 비열하기로는 최악이었던 군대를 만나기 전까지는 동아시아에서 치룬 전쟁 중 가장 처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인디언 전쟁이나 남북전쟁 중에서도 이런 전쟁이 없었던게 아니고 의화단의 난 같은 경우도 존재했지만 이렇게 한쪽의 전세가 압도적으로 강한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저항한 경우는 드물었다.
  19. 근데 작가가 남북전쟁의 영어식 표현을 몰랐는지 War between the North and South라고 부른다(...)연방군 장교 입장이라면 War of the Rebellion이라고 하든가..
  20. 당시 지휘관 어재연을 전사시킨 것으로 알려진 미 해병(James Dougherty, 훗날 명예훈장 수여)의 계급은 이병이었다. 안습.
  21. 정말로 "삶은 쌀", 즉, 조선식의 밥이었는지 아니면 미군 측의 식량이었는지 추가바람.
  22. 한국에도 시신을 화장하는 문화는 불교의 영향으로 있긴 했지만, 조선 후기에는 성리학과 숭유억불의 영향으로 매장이 기본이었다.
  23. 물론 고종 항목에도 적혀 있지만, 경강수세를 혁파한 이유는 대원군 시기의 화폐정책 실패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발생한 조정의 재정문제가 컸기 때문에 이걸 병크라고 하기도 어렵고, 운요호사건 시기는 신미양요 시기와는 달리 본격적인 개전도 아니므로 단순 비교는 어렵다. 홍모이 혹은 도깨비 취급을 받았던 서양인에 대한 조선인들의 거부감과 초기 전투 양상 등 차이가 날 구석은 엄청나게 많은 것도 사실.
  24. 하지만 베트남은 동남아에서 서구의 침공에 가장 끈질기게 저항한 나라 중 하나다. 애초에 프랑스군은 베트남의 도성인 후에로 바로 침공하려 했으나 후에 앞 항구 다낭의 베트남군 방어선에 막혀서 몇 개월 동안 고생하다 사이공을 침공한 것이다. 그 이후에도 남부 베트남은 10여년간의 반불항쟁으로 전통적인 지주층이 전멸할 때까지 프랑스에 저항했다. 그리고 이런 저항의 역사는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 프랑스와 미국, 중국을 연속으로 상대하는 베트남의 위업으로 다시 등장한다.
  25. 프랑스 성 루이 성당에 있는 깃발을 비롯해서 조선 시대 실물 군기는 어재연 수자기 이외에도 여러 개가 남아있다.
  26. 조선시대의 무관심+일본의 총포화약단속법+6.25전쟁+현대의 무관심이 겹쳐져 살아남은 유물이 극히 적다.
  27. 비슷한 경우가 러시아의 군함 바리야크의 군기. 문화재 관리법에 따라 인천시청에서 러시아로 2년 간 대여하는 형태로 반환했으며 한 차례 기간 연장, 그리고 현재 인천 시청으로 반환된 상태.
  28. 2002년 7월~10월 방영. 미선이 효순이 사건이 일어난지 얼마 안된 시점이다.
  29. 미군이 일부러 죽인 건 아니고 조총 들고 미군이랑 싸우는 이제마를 말리다가 총에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