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우미양가


1 개요

일본에서 유래된 대한민국고등학교에서 통용되던 일종의 학점 제도.

100점 만점을 기준으로 90점 이상에서 100점까지가 수, 80점에서 90점까지가 우, 70점에서 80점까지가 미, 60점에서 70점까지가 양, 60점까지가 가로 명명된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수우미양가 대신 秀, 優, 良, 可, 不可(수, 우, 양, 가, 불가너무 잔인한거 아닌가) 5단계를 썼다.

학생이 시간표를 직접 짜고 과목별로 학사 생활이 관리되는 대학교서구권의 고등학교와는 다르게 한국과 일본의 고등학교는 시간표가 미리 짜여 나오는 제도라 대학교의 학점제에 비해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다. 그나마 옛날에는 의대처럼 유급 제도란 게 있어서 의미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요즘은 유급 제도 자체가 흑역사가 된 덕분에...

원래 의미는 ''는 빼어날 수(秀), ''는 우량할 우(優), ''는 아름다울 미(美), ''은 훌륭하다라는 뜻의 양(良), ''는 가능하다의 뜻의 가(可)라고 한다. 현실은 시궁창 실제로는 미 이하는 잘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많이 통용되었다. 간혹 양이나 가밖에 못 받는 성적부진 여학생들을 '양가집 규수'(...)라고 놀리기도 했다.

절대평가이기 때문에 시험의 난이도 차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므로 평가요소로서는 다소 맹점이 있어서 정확한 평가를 위해서는 수우미양가보단 석차백분율 쪽이 좀더 바람직하다. 수능의 탐구영역에서 원점수가 아닌 백분위를 쓰는 이유와 같은 취지.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이 점수로는 국어가 95점, 수학이 85점이라서 국어는 수, 수학은 우를 받았는데 석차로는 국어가 상위 20%, 수학이 상위 10%라 한다면, 수우미양가로는 국어를 더 잘한 것 같아 보이나 국어 문제가 쉬워서 점수가 높게 나온 것일 뿐이므로 실제로 이 학생은 수를 받은 국어보다 우를 받은 수학을 더 잘 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러한 문제는 수우미양가 시대에도 상대평가인 석차백분율을 쓰는 대학이 존재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07년도까지는 많은[1] 대학에서 수우미양가로 내신을 반영했지만, 절대평가라서 내신 부풀리기가 성행한다는 지적에 따라 그 악명높은 수능 등급제와 같은 제도를 내신에 적용했으므로, 05년도 고등학교 입학생부터는 수우미양가 제도 자체가 흑역사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내신등급제가 학생간의 경쟁을 조장하는 등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여 내신등급제는 폐지되고 평어제로 다시 환원된다. 참고로 수능은 등급의 정규비율을 초과하더라도 등급구분점수만 넘으면 상위등급을 부여하지만 내신은 그런 거 없다. 만점을 맞아도 그 비율이 5% 이상 되면 다 2등급이다. 등급블랭크는 맞는데, 1등급이 비는 등급블랭크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대학교들이 내신을 믿을 거라는 노무현 前 대통령의 판단과는 달리 서울대학교를 제외하고는 내신 반영 공식을 아주 괴악하게 만들어서 이러나 저러나 내신을 반영하지 않는 것은 똑같게 되어 버렸다. 교육부 지못미. 당시엔 수능- 내신 - 논술을 모두 신경써야 한다고 해서 죽음의 삼각형이란 말까지 돌았지만 정작 대입 뚜껑을 열어 보니 내신으로 갈 사람은 내신수능만, 수능으로 갈 사람은 수능만, 논술로 갈 사람은 수능논술만 대비하면 되는 구조였던 것이다.[2]

흔히 일제의 잔재식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있는데, 사정은 꽤 복잡하다. 일본 교육제도에서 평가단계가 등장한 것은 1897년. 갑을병정(甲乙丙丁)이라는 단계를 정책적으로 택해 전국적으로 쓰면서부터이다. 그리고 이는 일본 에도시대의 평가단계(甲乙)에 기원을 둔 표현이었다고 한다.
1900년에는 학적부에 성적을 기재하는 것이 의무화되고 일부 현에서는 통지표가 발송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8년에는 일본 정부(문부성)차원에서 성적표기방법을 통일하여 10점법(상대평가)을 만들어 학적부 성적을 기입하는 방식이 제시되었고 이때 優,良,可평가방식은 '품행'성적에서만 사용되었다. '갑을병정'방식도 동시에 사용되기는 된 모양. 자세히 하는 분은 추가바람.
그리고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1941년에 들어서야 절대평가로서 우리가 아는 '수우미양가' 표기가 전면에 등장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아는 '수우미양가'평가방식과는 다르다. 1941년 도입된 절대평가방법은 優,良,可라는 3단계 평가였고 1943년 들어서야 秀,優,良,可,不可라는 5단계 평가가 등장했다.[3]
즉, 애초에 일본에서는 '수우미양가'라는 표현을 하지 않았다.

당시의 권위적인 일본 교육계와 절대평가방법이라는 최악의 컴비네이션은 전쟁후 반성의 대상이 되었고 전쟁후에는 일본 사회 전반의 민주화에 발맞춰 학생의 각 재능별(친화력이나 글쓰기 실력 등)로 좋고 나쁨의 정도를 평가하는 독특한 평가방식이 도입되었으나 이런 평가방식으로는 당시 일본사회가 원하던 '일률적인 서열화'가 곤란하다고 하여 1955년 초중고 전부 통일하여 1~5점으로 학생의 성취를 채점하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이때의 5점법은 정규분포 7%,24%,38%,24%,7%에 해당하는 학생에게 5,4,3,2,1점 하는 식으로 점수 부여하는 것.

즉, 일본 초중등학교에서 優,良,可 또는 秀,優,良,可,不可같은 평가방법은 길어봤자 4년정도 사용한, 대단히 마이너 of 마이너한 평가방식이고 일본웹에서 한자 검색하면 한국어 페이지가 더 많이 나온다 해방후 한국에서 '수우미양가'방식을 사용한 것은 일제의 잔재라기보다 '수우미양가'라는 단어에 내포된 교육적 의미를 당시 한국의 교육자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에 가까울 것이다.[4]

여담으로 일본에서는 여전히 와세다대학교 등 사립대학교에서는 바리에이션을 넣어 자주 쓰이고(예를 들어 가장 기본형인 優,良,可에서부터 秀,優,免,良,可 식의 변형까지) 대개 영어 성적(A,B,C,F)과 같이 쓰인다. 학교마다 달라서 콕 집어 얘기할 수 없다.
초등, 중등교육에서는 사라졌지만 대학에서는 아직 쓰이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안 하는 일제의 잔재를 왜 우리는 아직도 하냐'식으로 수우미양가 폐지론을 펼치는 것은 반만 옳은 소리다. 물론 일본에서 해당 등급방식을 두고 일본 전국시대니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라느니 하는 소리는 없다.

현재에는 절대평가제에 따라 A, B, C, D, E등급으로 변경되었다.

Academic grading in Japan

자기는 우,양,가,불가만 알고 있었는데 이 세상에 '수'라는 등급도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는 일본 여성 귀엽다 사실은 본인이 '수'등급을 못받았기 때문에 몰랐을 수도...

2 유래에 대한 설

오직 김문길만이 제시한 추측망상일 뿐 자료 및 증거가 없다.

김문길 저 <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다>라는 저서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신하들에게 적을 베어 온 증표를 보고 사무라이의 등급을 지정했다는것을 그 유래로 들고 있다. 이윤옥 저 《사쿠라 훈민정음》에서도 수우미양가의 어원을 설명할 때 김문길의 주장을 인용하고 김문길에게 문의한 결과를 실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이름도 그가 전쟁에서 적을 많이 죽이고 코와 귀를 많이 베어냈다 하여 오다 노부나가가 하사 해준 이름이다. 당시 오다 노부나가는 신하들이 잘라 온 적의 머리수로 등급을 매겨서 "수우미"로 판정했는데, 도요토미는 수(秀)에 속하니 히데요시(秀吉)이라 했으며 가장 뛰어난 가신이라 하여 도요토미(豊臣)라는 성을 주었다.
《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다》 본문인용
(중략) 수우미양가의 정체를 찾아 헤매던 중 의외의 자료를 얻게 되어 확인 차 《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다》의 저자인 부산외국어대학 김문길 교수에게 문의한 결과 "히데요시의 秀, 優, 良, 可라는 용어는 센코쿠시대 무사들의 용어로서 무사가(武士家) 문서에 자주 나온다." 라는 답변을 얻을 수 있었다.(후략)

[5]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오다 노부나가 휘하에서 전투가 아닌 내정과 건설(하루만에 성 세우기 등)로 인정을 받았다는 점과, 도요토미(豊臣)라는 성도 노부나가에게서 받은 것이 아닌 노부나가 사후 1585년 일본 천황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상기한 책들의 주장은 대단히 현실성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6]

그리고 옛 이름 '도키치로(藤吉郎)'와 새 이름 '히데요시(秀吉)'를 한동안 병기한 것으로 보이는데(秀吉라는 이름이 가장 최초로 발견되는 문헌적 근거는 1565년 11월경 노부나가가 미노(美濃)의 토호에게 보내는 문서. 木下藤吉郎秀吉라고 기재되어있다. -일본어 위키피디아 참조) 주군(노부나가)로부터 이름을 새로 하사받는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기록에 남았을 것이고 새 이름을 전면에 쓰는 것이 합리적일텐데 별다른 근거없이 그냥 '木下藤吉郎秀吉'라는, 옛이름, 새이름을 동시에 한동안 사용된 것을 보면(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름을 하사했다는 노부나가가 직접 보내는 문서에서도...) 오히려 자기 스스로 이름을 만들어 상당기간 사용(홍보)했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노부나가가 '히데요시'라는 이름을 정말 하사했고 이에 대한 1차적 사료가 남아있다면 (수우미양가 논쟁을 떠나서) 전국시대가 인기많은 일본에서도 어느정도 '히데요시'라는 이름의 유래로서 얘깃거리가 되었을 것인데 정작 그런 자료를 찾을 수 없는 것도 의문이다.

  1. "모든"은 아님. 07년 이전에도 상대평가에 의한 석차백분율로 내신을 매기는 대학들이 있었다. 일례로 서울대학교는 최소한 00~07년의 기간 동안엔 항상 석차백분율을 썼다.
  2. 수시 입학 전형이 아예 내신 전형과 논술 전형, 특기자 전형으로 나뉘어 있다. (입학사정관 전형을 논술 전형과 특기자 전형이 섞인 형태로 본다면) 이들 중 일부 전형에선 수능을 아예 안 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수능 점수로 자기 대학의 정시 커트라인보다 한참 낮은 점수를 최저등급 커트라인으로 걸어 둔다.
  3. '수우미양가'의 히데요시 유래설이 타당하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도 드러난다. '수우미'에서 '미'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고 우수함을 표시하는 방식은 秀가 아니라 優가 오히려 일반적이었다. 優가 A라면 秀은 A로도 표현될 수 없이 매우 뛰어난 S등급에 가깝다.
  4. 이건 국민학교도 마찬가지다. '보통'보다는 '국민'이 당시 해방직후의 대한민국 교육자에겐 교육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학교의 경우, 황국 이데올로기적 측면이 반영된 결과물로 여겨져서 결국 한국에서 사라진 것에 비하여 '수우미양가'에는 그런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이 거의 없으며 오히려 교육에 부정적인 측면마저 교육적인 면으로 탈바꿈시킨 측면이 크다. 일본 평가방식에서는 不可에 해당하는 등급을 可로 바꾸고(요즘에는 '가'의 의미가 퇴색되었지만 不可와 可라는 단어 자체의 의미차이는 어마어마하다.) 원래는 없던 美등급을 추가한 것이 그것.
  5. 이윤옥, 《사쿠라 훈민정음》, pp. 83-84, 인물과사상사
  6. 애초에 豊臣이란 성 자체도 그리 좋은 뜻이 아니다. 당시 천황이 천민출신 히데요시에게 신하는 많은데 자식이 적다는 것을 비꼬기 위해서라는 속설이 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