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손통

전한박사. 유학자로 진시황 때부터 문학에 뛰어났다 해서 조정에 불려가 박사 후보자가 되어 의 조정에 몸을 담았다.

진시황이 죽고 진승이 산동에서 군사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보고 받은 2세황제 호해는 박사들과 여러 유생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박사들과 유생 30여 명이 일제히 진승 저 놈은 반란군이니 당장 없애버려야 한다고 말하자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숙손통이 황제의 얼굴을 보니, 그는 크게 노하여 얼굴빛이 변해 있었다. 숙손통은 곧 황제가 자신이 정치를 못해 반란이 일어났다고 해석해 유생들의 말에 못마땅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을 판단하고, 앞으로 나아가 공손하게 말했다.

저들의 말은 다 틀린 것입니다. 진승은 일개 좀도둑일 뿐이니 지방에 관리들이 알아서 처벌할 것입니다. 자애로우신 황제 폐하의 은총으로 모든 백성이 법을 지키고 직분에 충실한데 무슨 반란이란 말입니까?

그렇게 똥꼬를 빨아대자 얘기하자 호해의 얼굴은 밝아졌다. 그리고 숙손통에게 옷과 비단을 하사하고 박사의 벼슬에 임명하였다. 궁에서 나온 후, 다른 유생들이 숙손통에게 "어찌 그리 똥꼬를 잘 빠냐 아첨을 잘 떠냐"고 묻자 "아오 이 눈새들아 내가 그렇게 아첨을 하지 않았으면 우리 모두 호랑이 아가리에서 못 나왔을 것"이라고 말하며 냅다 줄행랑을 치라고 대꾸한다.[1]

숙손통 역시 변장을 하고 고향인 설(薛) 땅[2]으로 돌아왔는데 항량이 그 곳을 점령한 상태였으므로 항량에게 몸을 맡겼고, 그를 따라 회왕을 모셨다가 회왕이 의제로 추대되고 강남으로 옮겨가자 그냥 남아 항우를 섬겼다. 그러다가 또 항우의 세력이 약화되자 유방에게 항복하고 정착하게 된다.[3]
원래 유학자들이 입는 길고 치렁치렁한 도포를 입고 있었으나 유방이 이를 싫어하는[4] 기미를 보이자 도포를 벗어버리고 일부러 초나라 풍습의 짧은 옷을 입어 유방의 기분에 영합했다고 한다. 애널 서킹 계의 메시 그런 노력으로 유방의 신임을 받게 되자 인물들을 몇 추천했는데 어째 도둑이나 건달 출신밖에 없어서 제자들이 툴툴댔다는 기록도 있다.

제자들: 스승님 우리도 좀 천거해 주세요. 어째서 제자들은 무시하고 저런 놈들만 자꾸 부르시는 겁니까?

숙손통: 지금 전쟁 중인 거 안 보이냐? 늬들이 전쟁터에서 구르면서 적장 목 따고 무쌍 찍을래? 좋은 때가 오면 잊지 않고 불러주마.

초한대전이 끝난 후 위의 대화처럼 알맞은 기회가 오자 숙손통은 한나라의 예법을 대대적으로 정비한다. 유방부터 한미한 출신이고 추종자들의 상당수도 예의범절 같은 것과 거리가 멀고, 진나라의 복잡한 예식을 냅다 잘라내버리니 당시 한나라의 궁중 예절은 그야말로 개판 5분 전이었던 것. 자신들끼리 공적 다툼을 하거나 술을 마시고 꽐라가 되는 것도 모잘라서 몸싸움을 벌이고 심지어 칼을 뽑아 대궐의 기둥을 찍는 견공자제분도 있을 정도. 이는 아무리 편한 것을 좋아한다지만 유방도 굉장히 골치 아파 하는 상황이었다. 숙손통은 이렇게 골치 아파하던 유방에게 "유학자는 쌈박질엔 젬병이지만 쌈박질해서 얻는 것을 정리하고 지키는 덴 상당히 쓸모가 있으니 내가 궁중 예절을 간소하게 정리해보겠다"라고 조언했고 유방의 명을 받아 나라의 예법을 새로이 만들었다. 이 예법에 따라 조회에서 모두가 황제를 공경하자 유방이 비로소 내가 이제야 황제 좋은 줄 알겠구나 하고 기뻐했다고 한다. 그 공로로 벼슬과 함께 500근의 황금을 받았는데, 함께 고생했던 30명의 유생과 제자들이 있음을 귀띔하여 그들에게도 벼슬을 내리게 했으며 500근의 황금도 모두에게 나누어 주는 미덕을 보였다.

그토록 시세에 영합하고 아첨한다고 욕을 들어먹었던 숙손통이지만 난세의 혼란이 가라앉고 치세의 안정기에 접어들자 원리원칙을 지키는 강직한 면모도 많이 보였다. 유방이 말년에 여후의 아들인 혜제 대신 척희의 아들을 황태자로 삼으려 하자 진시황의 고사를 예로 들어 내 피를 궁궐 바닥에 흩뿌린 후에 태자를 바꾸라는 강경 발언을 해 장자 승계의 원칙을 고수하기도 했다.

그의 처세술과 유학, 예법을 제정한 능력에 사마천도 감탄해 "숙손통은 시대의 요구에 맞춰 급한 일부터 순서대로 처리하고 예법을 정비했다. 그의 물러가고 나아감은 모두 시대의 변화를 정확히 따랐으며 마침내 한나라의 큰 유학자가 되었다.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며, 길은 원래 구불구불한 것(大直若詘 道固委蛇)[5]이라는 얘기는 숙손통의 경우에 딱 맞는다"는 평을 남겼다.

초한전기에도 나와 위에 나온 진나라 말기 반란군을 좀도둑이라고 말하는 일화가 나오고, 유생들이 이를 질책하자 "이것들이 살려준 것도 모르고…이 재물 너희랑 나눠 먹으려 했는데 니들 보니 안 되겠다"고 말한 뒤 도망친다. 이후로 간간히 등장은 하나 큰 비중은 없고 가장 중요한 한나라의 예법을 만든 일마저 해하전투 후의 상황이 대폭 축소, 생략되었기에 안 나왔다.
  1. 호해가 반역자라고 대답한 사람들을 어사에게 넘겨 조사 후 처형하게 했기 때문이다.
  2. 영주가 맹상군이었던 그 곳 맞다. 이곳은 맹상군 이후 별의별 사람들이 마구 모여들어 사마천이 그 땅의 풍속을 두고 '문란하다'라고 서술했을 정도의 동네였는데, 유학자이면서도 특이한 행보를 보인 숙손통의 면모는 고향의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3. 이런 숙손통의 행적은 의리와 충성을 중요시 하던 유생과 협객들에게 엄청난 비난거리가 되기도 했다. 심지어 바꿔가며 섬긴 군주가 10여 명이나 된다라고 당대에 공공연히 까일 정도.
  4. 무식한 건달 출신에 가까웠던 유방은 열등감 때문인지 역이기나 육가 같은 지식인들에게 일부러 꼬장(…)을 부리는 경향이 있었다(이걸로 끝이었다면 찌질이를 못 면했겠지만, 제대로 된 반론을 마주하면 바로 수긍하는 면도 보여줬다).
  5. 노자의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