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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고황후(高皇後) |
성 | 여(呂) |
휘 | 치(雉) |
생몰기간 | BC 241 ~ BC 180 |
재위기간 | BC 188 ~ BC 180 |
(BC 241~BC 180)
전한 고조(고제)인 유방의 처이자 황후. 명문 여(呂)씨의 후손이다. 시호는 남편인 유방의 시호 고황제에서 따와 고황후(高皇后). 그리고 중국 최초의 황후[1]이자 황후-최초의 황태후-최초의 태황태후 삼단코스를 밟은 여인이다.
1 건달의 부인에서 황후로
이름은 여치(呂雉)라고 한다.
보다시피 이름 자로 꿩 치 자를 쓴다. 때문에 한나라 당대에는 피휘하여 꿩을 가리킬 때 雉(치) 대신 野鷄(야계, 들닭이라는 의미)라는 표현을 썼다. 흔히 사기의 본기 제목으로 쓰인 여태후라는 성+지위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부유한 집안의 여식으로 태어났으나, 아버지인 여공(呂公)[2]이 할일 없이 패현에서 배때기나 벅벅 긁고 굴러다니는 유방을 보고 그의 몸에 서린 왕기를 간파, 억지로 주겠다 주겠다 애원해서 시집보냈다고 전한다.[3] 미인이지만 기질은 꺽달지고 내면에 무서울 정도의 야심을 지니고 있는 여성이었다. 심지어 포로가 되어서 항우 앞에 포박당해 있을 때도 '네놈이 뭘 어떻게 할거냐. 죽일 테면 죽여봐. 너 따위는 내 남편한테 개털릴 거임'이라는 태도를 유지해서, 같이 포로가 된 유방의 부모와 항우를 벙찌게 만들었을 정도로 담력이 출중했다.
유방이 완전 철저하게 개털릴 때에도 그냥 담담히 자기 할 일을 하며 확실히 집안 내조를 했으며, 결국 아버지가 바란대로 귀인의 자리에 이르렀지만… 그 때부터가 진짜 잔인무도함의 시작.
토사구팽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유방은 한신, 팽월, 경포 등 무위가 있는 개국공신 출신 이성제후왕들을 모조리 숙청한 후 거기에 유씨 황족들로 갈아치우는 계획을 꾸미고 있었지만, 사실 유방도 내심 마음이 편치 않았던지 대놓고 반란을 일으킨 게 아니라면 목숨만은 부지해주려 하였다. 팽월도, 한신도 직위를 빼앗기는 선에서 끝나려는 것을 최종적으로 여후가 나서서 처단했다. 또 다른 모반한 이성제후왕인, 옛 유방의 불알친구 노관은 '유방이 병들었고 여후는 왕들을 숙청하니...'라 하면서 여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모반을 철회하지 못했고, 유방이 쾌차하면 죄를 빌 생각이었으나 결국 유방이 죽자 흉노에 투항해버렸다. 거기에다 그녀는 한술 더 떠 유씨들마저 뽑아버리고 여씨 일족으로 채우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유방이 태자인 유영을 유약하다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총애하는 측실 척부인 소생인 유여의를 자기와 가장 닮았다고 치켜세우며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척부인도 여의를 태자로 만들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면서 여후와 대립각을 세웠다. 하지만 유방의 생각은 주창(周昌) 등 대신들의 반대에 부닥쳤으며, 여후는 신선술을 배운다는 명분을 세워 숙청의 피바람을 모면한 장량과 손을 잡고 당대의 은둔명사인 '상산사호'를 모셔와 유방 앞에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자기가 불러도 오지 않던 명사들이 태자를 따르는 것을 본 유방은, 결국 태자를 폐위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대신 여의를 조나라 왕에 봉하여 그의 모친인 척부인과 함께 가도록 했으며, 질투도 꽤 심한 여후가 자기가 죽은 후 여의 모자를 핍박할 것을 우려, 태자 폐위에 반대해 여후에게 도움을 준 주창을 조나라의 재상에 임명했다.
유방이 임종을 앞두고 있을 때 여후가 고명을 청하며, 재상인 소하가 연로하였으니 후임 재상을 누구로 할지 묻는다. 유방은 소하의 후임으로 조참을 지목한다. 여후가 조참 사후에는 누구를 재상으로 삼을까 물으니, 내정은 진평에게 맡기고 군사는 주발에게 맡기라고 말한다. 여후가 다시금 두 사람의 후임을 물으니, 유방은 기가 차다는 듯이 되받아쳤다.
"그 뒤는 당신이 알 바 아니오."
2 여인천하
그러나 유여의 모자는 여후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유방이 사망하고 아들인 혜제가 즉위하자, 여후는 우선 척부인을 영항(永巷)[4]에 감금하고 하루 종일 쌀을 찧는 형벌을 내렸다. 그 다음에 조왕을 장안으로 소환한 후 제거하고자 했다. 조나라 재상이 된 주창은 여치의 의도를 파악하고 3번에 걸친 소환 명령을 조왕의 병환을 핑계로 모두 거절했다. 이에 여후는 주창을 소환한 후 조왕을 소환했다. 여의는 계모의 명을 어길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장안으로 출발했고, 궁궐에 입궐한다.
모친과 달리 인자한 성격이었던 혜제는 이런 어머니의 속셈을 간파하고서는, 미리 이복 동생을 마중나가 바로 자신이 기거하던 건물로 데려와 침식을 같이 하며 자신의 옆에 끼고 보호했다. 혜제의 혼신을 다한 선방에도 불구하고, 여의는 혜제가 아침 일찍 사냥을 나가 자리를 잠시 비운 사이에 독살당했다. 여의의 사망으로 모든 기반이 사라진 척부인 또한 산 채로 수족을 자르고, 눈을 뽑고, 음약을 먹여 벙어리로 만든 다음 귀에 유황을 부어 귀머거리로 만들어서 돼지우리(뒷간을 겸하는)에 던져놓고 이를 가리켜 사람돼지란 뜻인 '인체(人彘)'라고 불렸다.[5][6]
그런데 그 꼬라지를 자기 아들인 혜제에게도 보여주었다. 아들이 척부인과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쎄빠지게 노력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광경을 보고 만 혜제는 "사람이 되어가지고 이럴 수는 없습니다"라고 어머니에게 말한 후 슬슬 정치에서 손을 놓기 시작했고, 이 엄청난 트라우마로 인해 폐인과 다름없이 지내다가 23살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고 만다.[7]
아들 혜제가 죽은 이후, 혜제의 양자인 소제 유공이 즉위하지만 나이가 어렸기에 섭정으로서 국가 권력을 좌지우지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남편 유방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연나라 왕의 자리를 자신의 친족인 여통에게 물려주고, 군대의 수장들도 대부분 여록과 여산과 같은 자신의 친족들에게 맡겼다. 이 탓에 유공이 성장하면 보복할 것을 이야기하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 유공을 폐위시키고 유홍을 즉위시켰다. 이 때는 명목상 새 황제가 즉위했는데도 연호조차 바꾸지 않았다.
주무기(?)는 짐주(鴆酒)라는 이름의 술을 가장한 독. 독사를 먹고 사는 새인 짐새의 깃털로 담근 술이라고 한다. 유여의도 이것으로 죽였고, 서장자인 제왕 유비도 혜제와 건배할 때 짐주로 바꿔치기 해서 먹이려다 되려 자기 아들내미가 그 잔을 잡고 마시려고 하자 무시무시한 속도로 잔을 엎어버렸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유비는 여후의 친딸인 노원공주에게 봉지의 상당부분을 헌납하는 것으로 여후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나마 제도혜왕은 운이 좋은 편. 조은왕 유여의는 짐주에 갔고 또 다른 유방의 서자 조유왕 유우는 조나라에서 말 한번 잘못 했다가 여태후에게 잡혀서 굶어죽는 비참한 신세가 됐다. 여태후는 조유왕을 죽이고 또 다른 유방의 서자 조공왕 유회를 양나라에서 조나라로 옮겼으며 또 여씨의 사위로 삼았는데, 조공왕이 딴 여자를 사랑하자 이 여씨 왕후가 그 여자를 죽였다. 조공왕은 상심이 커서 자결했고 여태후는 조공왕이 여자 때문에 목숨을 버렸다며 조나라를 조공왕에게서 뺏어 자기 조카 여록에게 주었다. 유방에게는 또 다른 서자 연영왕 유건이 있었는데, 서자를 남겨놓고 죽었지만 여태후는 그를 죽이고 또 다른 자기 조카 여통에게 연나라를 주었다.
결국 유방의 아들 중 여후의 친아들 혜제에다 유비, 유여의, 유회, 유우, 유건 모두 여섯 명이 여후 때문에 여러모로 불행을 당한 셈. 그나마 문제와 회남여왕 유장만이 멀쩡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어머니 박씨가 유방에게서 사랑받지 못했기에 질투를 피해갔었고, 두 동생 조유왕과 조공왕이 횡사한 후 여태후가 조나라 왕위를 제안하자 겸손하게 거절함으로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회남여왕은 어머니 조씨가 여태후의 독한 질투에 자결로 응수하는 바람에 여태후가 키워줘 그나마 정이 있었던 듯.
3 죽음과 여씨 천하의 몰락
실로 무섭지만 추진력 있는 여장부였는데, 말년에는 갑자기 나타난 투명한 푸른 개에 물리는 환상체험 후에 병을 앓더니만 죽었다. 죽으며 자기가 없어지면 다른 유씨나 기타 추종세력이 달려들테니 조심하라는 유지를 남겼지만, 뒤를 잇는다는 놈들이 모조리 함량 미달 찌끄레기들. 결국 숙청당하지 않고 살아남아 때를 기다리고 있던 왕릉-주발-진평 등의 유방 직속 공신과 다른 유씨들이 들고 일어나 일족이 몰살당했다. 이 때 같은 개국공신인 번쾌의 아내인 여동생 여수도 죽고 말았다.
이 때 주발이 그를 따르던 병사들의 충성심을 알기 위해서 "여씨를 계속 따를 자는 오른쪽 어깨갑옷을 벗고, 유씨를 따를 자는 왼쪽 어깨갑옷을 벗어라." 라고 명령하자 군사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왼쪽 어깨갑옷을 벗었다고 한다. 여후의 악명이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이 가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분위기를 봐도 오른쪽 어깨갑옷을 벗을수가 없었겠지만.[8]
후일 한나라가 멸망한 후 혼란기에 적미군이 장안에 들어와 역대 한나라 황릉을 대거 도굴할 때 유방과 여후가 묻힌 장릉도 도굴당했는데 이때 시체가 훼손되었다고 한다.
4 흉노와의 관계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다 간 여걸이었으나, 당시 한나라의 대외적인 국력은 바닥을 기고 있었으며 변방에서는 이민족들이 득세하여 세력을 불려나갔다. 매일같이 식량을 빼앗기고 백성들이 납치당했으나, 약해질대로 약해진 한나라 군대는 답이 없었다. 유방과 여후의 2번에 걸친 숙청으로 인한 인재풀의 악화도 있었지만 일단 초한대전의 타격이 너무 심각했기 때문이다. 장수가 타고다닐 말이 없어서 소로 대신했다고 할 정도이니...심지어는 흉노의 선우 묵특으로부터 "우리 둘 다 마누라랑 서방이 없는데, 서로 부족한 것을 채우면 어떨까"[9] 같은 편지를 받기도 했다. 분노한 여후는 묵특을 죽이려고 원정군까지 조직하지만, 장수들이 선황제도 졌다며 말리는 바람에 꾹꾹 눌러 참았다고 한다.
이 때 번쾌가 자신있게 10만 군사를 내달라고 했는데, 계포[10]가 나서서 "선황제조차 10만이 넘는 병력과 명장들을 이끌고 원정했지만 다 죽다가 겨우 살아왔는데, 번쾌 따위가 혼자서 뭘 할 수 있습니까? 저따위 헛소리를 계속 내뱉으면 목을 쳐버려야 합니다."이라는 발언으로 닥버로우시켜 버렸다. 모두들 여태후의 총애를 받던 번쾌에게 저랬으니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여태후는 이 일을 불문에 부치고 다시는 흉노 정벌을 입에 담지 않았다 한다. 계포가 워낙 신의에서 명성이 높았던 인물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선황제 시절, 대패한 고제가 흉노에게 화친하고자 딸아이를 바치려고 하던 기억도 생각났을 듯 하다. 이 여태후의 한을 풀어준것은 한나라 7대 황제인 한무제 유철이지만 항목보면 알 수 있듯이 한나라도 흉노군과 전투 와중에 엄청난 피해를 입고 경제적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5 후세의 평가
세간의 평가는 서태후, 가남풍과 함께 (가끔 측천무후와 함께)[11] 중국 3대 악녀.
그러나 실상을 보면 이와 조금 다르다. 사마천은 여후의 치세에 천하가 평안했다고 평했는데, 그 이유는 첫째로 전쟁에 시달리던 전국시대 ~ 초한전의 난세보다는 황실이 집안싸움하는 것이 더 나았고, 둘째로 한나라 초기는 진나라의 억압 통치에 대한 반동으로 되는대로 놔두는 정치, 즉 '무위지치'를 추구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직무를 방기한다는 뜻이 아니라, 백성들을 피로하게 하는 정책을 세우지 않는 황로(黃老)[12] 사상에 기반을 둔 정책. 게다가 사마천은 여태후를 제왕들의 행적을 다룬 본기에 편입하는 놀라운 파격까지 보여주었다.[13][14] 그는 여태후 시절에는 형벌을 가하는 일이 드물었고, 죄인도 드물어서 치안이 좋았으며 백성들이 농사일에만 힘쓰니 입고 먹는 것이 갈수록 넉넉해지는 태평성대라고 여태후의 공로를 칭송했다. 게다가 권력층 내부에서는 피터지는 권력싸움의 연속이었지만, 여태후가 치세를 나름대로 잘한 덕분인지 한나라의 기틀을 그녀가 다졌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후한이 세워지고 한나라의 정통을 이어받은 광무제에 의해 황후의 칭호가 박탈당한 이후, 여후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중국 역사를 대표하는 악녀로 통해왔으나 최근에는 여후의 치세는 황실은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치열한 시대였을지 몰라도 일반 백성들에게는 특별한 전쟁도 없고 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든 매우 평화로운 시대였다는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학자에 따라서는 그녀의 시대를 문경지치의 기초를 이룩한 시대였다고 평가하는 이도 있을 정도.
잔인한 성격으로 평가하자면 그녀는 악한 사람이 맞겠지만 그런 성격과는 별개로 그녀는 측천무후처럼 국가 통치에는 유능했다고 볼 수 있겠다.
6 대중 매체에서
고우영 화백의 십팔사략에서 악녀 자체로 나오는데, 실질적인 정권을 잡을 땐 아주 지옥같이 나라를 다스렸으며 여씨 성을 가진 무사들이 길거리에 있어서 태후에 대한 불만을 표하면 그 자리에서 누구라도 가차없이 베어죽였다고 그리고 있다.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에서는 정적에게 악랄해도 정치적으로 그리 나쁘지 않았다. 선황 치세를 이어받았고, 백성들을 배려한 편이다. 그저 정치적으로 저랬으니 유씨가 다시 권력을 잡으며 여씨를 숙청했기에 더더욱 악랄하게 있는 말 없는 말지어가며 그녀를 악랄하게 묘사했으리라 분석한다.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에선 직접적으로 묘사되진 않지만, 결코 좋게만은 볼 수 없는 차갑고 표독스러운 인물로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가령, 하후영의 아내 간간은 여치를 기분 나쁜 여자라고 생각할 정도.
영화 <서초패왕>에선 공리가 연기했다.[15] 범증이 천하의 둘도 없는 여우라고 비난하는데 후반부에 항우가 범증을 멀리 내보낼 때, 그 자리에 여후가 있다는 걸로 창작했다. 여기서도 범증이 분하듯이 "넌, 천하도 둘도 없는 계집이지, 넌… 넌!" 이라고 이를 가는데 여후는 가소롭다는 듯이 "그래, 난 악독한 여우라는 거겠죠?" 라고 말하는데 범증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아니! 넌, 머지않아 태후가 될거야! 세상을 주무르겠지!" 라는 말을 하며 나간다.
뭐 어차피 창작 영화인지라 여후와 항우 플래그가 서는 장면을 넣는 것 등과 같이 여러 모로 창작했다. 여기서도 엄청 악랄한 점이 강조되었다. 초반부에 진나라군이 약탈을 벌일 때 쫓기는데, 같이 달아나던 시어머니가 뒤쳐지자[16]가차없이 시어머니를 넘어뜨려 뒤쫓아온 진나라군에게 끔살당하게 하곤 피신한다. 이웃들이 '그래도 시어머니잖아?'라며 경악하고 여후를 마귀 같다고 피하는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어머니라서 그런 걸지도
이 영화에서는 항우와 묘한 플래그가 서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항우를 차지하기 위해 우미인을 죽이려고 하는 묘사가 있다. 항우도 어느 정도 끌리는 바람에 억류 상태에서도 죽이지는 않고 넘어가며, 항우가 죽은 후의 그의 시체를 안고 통곡하는 장면이 영화의 마지막. 오묘하게도 이 장면을 본 장량이 한신에게 "천하를 얻었으니 지금 물러나지 않으면 토사구팽 당할 것"이라는 대사를 한다. 그리고 자막으로, 여치는 다음 황제가 되었다고 마무리.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항우와 유방에서는 등장 분량이 적어서 악녀같지 않지만, 같은 작가의 사기에서는 그야말로 천하의 개쌍년으로 등장. 심지어 항우와 유방에서는 미녀였지만, 사기에서는 비만녀다.
그리고 SBS 드라마 샐러리맨 초한지의 등장인물인 백여치 캐릭터가 여태후를 모티브로 따와서 등장 중. 16화 이전까지는 그냥 개싸가지에 성격만 비슷한 재벌녀였는데, 가상의 가족관계로 나온 외조부인 진시황이 사망한 14화와 모가비(=조고)한테 당해서 쫓겨난 15화 이후에는 여태후로 각성중이다. 알코올 중독인 척하면서 회사기밀 다 빼내고, 모가지 회장한테 복수하려고 뒷조사까지 하는 것을 보면 영락없는 여태후. 게다가 할아버지 사망원인까지 알아서, 드라마 최후반부에는 아예 여태후가 될 듯하다. 그리고 실제 여태후와 한고제의 관계와, 드라마 속 여치와 유방의 관계가 다른 것도 눈여겨 볼 만하다. [17]
중국 드라마 <초한쟁웅>에서는 권모술수를 갖춘 여장부로 묘사. 유방을 알아보고 아버지를 졸라 남편으로 맞이하였으며, 적절하게 유방에게 충고를 해주거나 직ㆍ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등 장량이나 소하도 감탄할 정도의 수완을 보인다.
6.1 초한전기
초반부 모습
황후가 된 뒤[18]
한편 중국 드라마 초한전기에서도 등장. 배우는 친란(진람). 한국 더빙판 성우 최정현. 초반부터 등장한다. 여문이 이사온 날 잔치에 허풍치며 들어온 유방과 투닥거리며 인연을 맺게 된다. 사실 여문네가 이사온 것은 여치 때문으로, 결혼 날짜까지 잡아놓고 난데없이 신랑감이 맘에 안든다고 파혼한 것. 그리하여 이사하게 되었고 신랑집 사람들이 와서 소란을 피우나 유방과 패거리들이 이 소란을 막아준다. 아무래도 이때 유방에게 플래그가 선 듯하다.
아주 당차고 활달한 여성으로 묘사된다. 가난을 충분히 각오하며 고된 일도 묵묵히 견뎌낸다. 게다가 틈틈히 놈팡이남편을 잘 챙기고 시아버지에게 예를 다하는 양처. 그럼에도 남편에 지지 않고 할말 다하는 당당한 마눌님이다. 다소 조용조용한 우미인 커플에 비해, 남편과 애정표현도 자주있는 끈끈한 커플이다. 기존 매체가 유방&여치 부부는 그다지 각별히 그리지 않는데 반해, 여기선 우미인 쪽에 뒤지지 않는 한쌍이다. 게다가 배우 진람의 미모도 결코 우미인 역의 리이샤오에게 밀리지 않는다! 한나라의 히로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드라마가 유방과 항우의 싸움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유방 사후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잔인무도한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초반에 자기 남편인 유방을 욕하는 형님(유방의 형수)의 뺨을 때리는 등 범상치 않은 모습은 보여주는편. 유방과 그의 거친 동생들과 살다보니 성질이 좀 거칠어 졌다. 노관과 혼인 예정이던 여동생이 번쾌가 NTR하자 유방이 화가나서 처제를 때렷는데, 그대로 언니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일렀더니 뭘 잘햇냐면서 몽둥이로 때려서 내쫗는다. 그리고 노관에게는 저런 지조 없는 애랑 결혼하지말고 좋은 낭자를 구해주겠다고 한다. 이런 여장부 같은 성질 때문에 유방의 패거리들도 잘따른다. 유방이 거병해 패현을 떠난 사이에는, 무능력한 아주버니들과 무식한 형님의 등쌀에 시달리며 홀로 집안 살림을 책임지고 있다. 눈물나게 고생하는 챙겨주는 사람은 시아버지 유태공 하나 뿐.
그 와중에 유방은 척부인을 들여서 희희낙락하고 있다. 유방이 한왕이 되자, 가족을 파촉 지방으로 불러 같이 살게 된다. 그러면서 이미 유방과 같이 살고 있던 척부인과의 갈등도 다루고 있다. 번쾌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 들이는 등 약간의 경계는 하고 있었지만 딱히 공격을 한다거나 그런 행동은 하지 않고 있었는데, 척부인 측에서 먼저 공격한 걸로 묘사하고 있다.[19] 덕분에 서로 간 갈등의 골의 깊어지는 도중, 척부인이 아들을 낳자 소하의 조언을 들어 유방을 떠난다.
그 이후엔 초나라 군에 잡혀 몸고생, 마음고생을 다 하다가 풀려나와 다시 유방을 만난다.[20] 전쟁이 끝난뒤 천하통일이 된 마지막 회에도 잠깐 나오며, 한신을 잡아와 "넌 너무 건방졌다"는 말과 함께 모반죄를 벌한답시고 "죽여라" 라는 말과 함께 퇴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 ↑ 최초의 황제인 시황제에게 아내가 있다면 이쪽이 최초의 황후이겠지만, 시황제의 아내에 대한 기록이나 고고학적 자료가 전혀 남아있지 않다.
- ↑ 여문숙평(呂文叔平)이라고도 불린다.
- ↑ 일설에는 그녀가 뒤에서 숨어서 이야기를 듣다가 유방이 계속 거절하니 직접 면담해서 혼인하였다고 한다.
- ↑ 궁녀를 가두는 감옥.
- ↑ 야사에는 고제와 몸을 섞었다고 하여 음부를 짓이겼다고도 하고, 남자 죄수들에게 던져주어 능욕 당하게 했다고도 한다. 또 조왕의 시체를 가져와 보여주며 농락했다고.
- ↑ 척부인이 언제 죽었다는 이야기는 사서에 전하지 않지만 아마 저렇게 심하게 당한 이상 당시의 의술로는 살아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아마 돼지 우리에 던져진지 얼마 못가서 죽었을 것으로 보인다.
- ↑ 정치에서 손을 놓은 이유는 당시 재상 조참의 의견을 따랐다는 견해도 있긴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후의 악행으로 인한 영향이 없다고 보기는 힘들겠지만
- ↑ 좌단(左袒) 이라는 고사의 유래가 되었다.
- ↑ 서로 섹스 파트너 하자는 이야기다. 이 정도로 무례한 편지였다.
- ↑ 항우의 휘하이던 그 계포 맞다.
- ↑ 다만 측천무후는 그녀의 치세에 안정적인 정치를 함으로써 당 현종 개원의 치의 기초를 닦았다는 점에서 악녀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후술하겠지만 여치 역시 문경의 치의 기반을 닦았기 때문에 악녀라고 부르기 어렵다. 그러나 서태후,가남풍 두 사람은 이견이 없는 희대의 악녀가 맞다. 무능한데다가 성격마저 잔인했으니...
- ↑ 도교가 종교화되기 전, 도교적인 정치를 추구했던 사상.
- ↑ 참고로 한서에서도 혜제기가 별도로 빠져있을 뿐, 소제시대는 한서에서마저 고후기(高后紀)라 해서 여후를 본기로 삼았다.
- ↑ 이는 사마천이 살던 시대가 다름아닌 계속된 전쟁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피폐해진 한무제의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 ↑ 1996년 MBC 방영 당시에는 공리를 전문으로 맡은 송도영이 더빙 연기를 했다.
- ↑ 여후가 단지 시어머니가 뒤쳐져서 패륜을 저질렀다는 것 보다 시어머니가 적이 코앞에 왔는데도 집안에 남은 재물을 챙기는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조금만 더 지체하면 가족 모두가 죽을 상황이었다. 여후는 몇번이나 시어머니에게 가자고 간청했지만 시어머니는 가족의 안중은 관심없이 재물을 챙기기 바빴고 여후는 다른 가족을 살릴 결심을 한 것이다. 이는 물론 꾸며진 이야기다. 영화 내에 유방이 어머니가 죽은 것을 알고 아내를 살인자라며 몰아세우는데 여후가 불쌍해 보인다.
- ↑ 드라마 초반에서 여후 포지션에 가까운 여캐는 차우희. 그리고 점점가면서 백여치가 되었고, 또 초한쟁패를 시작하는 것과 흡사해보이는 16-17화는 실제와는 거의 정반대다.
- ↑ 이 모습은 마지막회에서 한신을 처형할 때, 딱 한번만 나온다.
- ↑ 사실 척부인은 여치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는데, 옆에서 시중드는 척부인의 고모라는 사람이 "지금이야 괜찮지만, 나중에 한왕의 관심이 멀어지면 본처인 여치가 분명히 후처인 너를 가만히 안둘 것"이라고 그러면서 여치에게 누명을 씌워 공격한다.
- ↑ 석방되기 직전, 척부인은 유방이 항우의 화살에 맞고 한동안 위독했을 때 후계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다가 유방과 관료들의 신망을 잃고, 입지가 약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