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utnik crisis
< 1957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
190px |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서기장 |
미국이 이 문서를 싫어합니다
역사상 최대 돈지랄의 신호탄
1957년 10월 4일,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에 성공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 국가들이 겪은 과학기술·교육 부문의 충격. 20세기 이래의 세계사에서 진주만 공습과 9.11 테러가 미국을 빡돌게 한 사건이라면, 스푸트니크 쇼크는 미국을 열폭하게 만든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미국 뉴스:"새로운 뉴스가 나왔습니다! 물건들이 이제 우주로 갑니다,그런데 최초로 간 것이 빨갱이랍니다!"
더군다나 불과 한 달 뒤인 11월 3일에는 스푸트니크 2호에 살아있는 개를 태워서 쏘아올림으로서 그 기술력을 다시 한 번 과시했다. 반면에 미국은 급하게 뱅가드 위성을 아틀라스 로켓에 실어서 발사하지만 대기권 진입은 커녕 두차례 연속 폭발하면서 개망신을 당하고, 1958년 1월 30일 익스플로러 1호 발사에 성공하면서 간신히 체면치례에 성공했다. 그러나 불과 5kg인 익스플로어 1호를 비웃듯 소련은 2월 3일 무려 1.3톤짜리 과학탐사 위성 스푸트니크 3호를 발사한다. [1]
당시 소련 중심의 동구권 국가들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권 국가들은 직접적인 대립은 피하고 있었지만, 당시 전력의 핵심이던 핵무기는 미국쪽이 더 우위에 있었다 더 높게 치고 있었다. 왜나하면 이때까지 핵무기는 오로지 대형 폭격기를 이용한 항공폭격 말고는 없었고, 공군력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던 미국이 당연히 핵전력도 더 우위에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에 성공하면서 그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위성을 발사한 것뿐 아니라 이전부터 니키타 흐루쇼프가 말해왔던 대륙간 탄도 미사일의 위협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다시 말해, 이때까지 미국은 우세한 공군력으로 소련의 핵무기를 방어하고 자신들만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소련이 쏘아올리는 로켓에 스푸트니크 대신 핵폭탄을 넣는다면? 소련이 마음만 먹으면 지구 어디에서든, 언제든지 핵무기를 미국에 떨어트릴 수 있게 되었고 하늘이 아닌 우주공간에서 공격하기 때문에 아무리 뛰어난 공군이라도 절대 막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단순한 기술적 충격 수준이 아니었다.
어쨌든 이 사태 이후 미국은 전세를 뒤집기 위해 외계인 고문,공밀레기술 개발에 나서게 되는데 이는 우주 개발이나 군비 확장과 관련한 과학·기술 분야, 교육 분야에서도 다양한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 미항공우주국의 설립 : 대통령 직속기구로 설립되어 이후 무수한 우주개발을 이끈다.
- 교육철학의 변경 : 이때까지 미국은 존 듀이가 주장한 창의력과 개성을 중시하는 진보주의 교육사상이 중심이었지만,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로는
학생의 개성을 무시한 항존주의 교육이 대두되었다가 미국과 너무 맞지 않는 교육철학으로 묻히고, 이후 진보주의와 항존주의가 적절히 섞인기초 학문의 교육을 우선시하는 철저히 성과지향적인 본질주의 교육으로 변화한다. 이는 해방 후 미국 교육계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던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진화론과도 약간의 인연이 있다. 이 대규모의 교육 정책의 변화로 과학 교육의 중요도가 커지면서, 생물학 교과서에 진화론이 제대로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 인터넷의 등장 : 탄도 미사일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알파넷이 개발되었고 이는 현재의 인터넷으로 발전한다.
이 때 충격을 받았던 미국은 아폴로 계획을 성공시켜서 자신감을 회복하였다. 이후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를 기점으로 양국은 우주 경쟁은 인류의 평화와 발전을 위한 것임을 천명하고 적대적 관계를 탈피...했다기보다는 츤데레 관계로 전환한다.
- ↑ 실제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착륙 직전까지 모든 부분에서 항상 소련이 한발 앞서서 달성하면서 미국을 계속 엿 먹였다. 최초의 생명체 귀환, 최초의 유인 우주선, 최초의 우주 유영, 최초의 행성 무인탐사선, 최초의 달뒷면 탐사 등등 오로지 달착륙, 추가로 우주선간 도킹 정도를 제외하면 모든 유니크 타이틀은 소련의 차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