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

역대 아폴로 계획
아폴로 17호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프로그램 종료
취소된 아폴로 미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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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에서 찍은 소유즈소유즈에서 찍은 아폴로미션 패치

영어 : Apollo–Soyuz Test Project (ASTP)
러시아어 : Экспериментальный полёт «Союз» — «Аполлон», Союз 19[1]

1 소개

역사상 최초의 국제 합동 우주 프로젝트이자, 1957년 스푸트니크 쇼크 이래 28년이나 지속된 돈지랄 병림픽 우주 경쟁의 종지부를 찍는 미션.

비록 과학적인 의미를 따지면 그다지 돋보이는 미션은 아니나, 이 때 처음으로 이뤄진 미국소련의 우주개발 교류는 훗날의 미르-셔틀 프로젝트와 ISS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역사상 큰 의의를 갖고 있는 우주 미션이다.

또한 아폴로 계획의 대미를 장식하는 미션. 하지만 소유즈는 지금까지 여러 번의 마개조를 통해 장수만세 현역 우주선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2 승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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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형에 올라탄 5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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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쪽은 토머스 스태퍼드(미국, 아폴로 사령관), 알렉세이 레오노프(소련, 소유즈 사령관)
앞쪽은 디크 슬레이튼(미국, 도킹 모듈 조종사), 밴스 브랜드(미국, 아폴로 사령선 조종사), 발레리 쿠바쇼프(소련, 소유즈 엔지니어)

스태퍼드는 제미니 계획 시절부터 활동하였던 베테랑이자 아폴로 10호의 사령관이었고, 레오노프는 보스호드 2호에서 인류 최초의 우주유영을 실시했고 그 과정에서 죽다 살았던 인물이다. 브랜드는 아폴로 18호의 사령선 조종사로 달에 갈 예정이었지만 프로그램이 17호를 끝으로 중단되어 새됐던 인물이고, 슬레이튼은 머큐리 세븐의 일원이었으나 미션 직전 심장박동 이상이 발견되며 십수년 넘게 우주비행사 훈련과 팀 구성 등의 업무에 종사하다가 각고의 노력으로 우주비행 자격을 되찾은 인물이다. 한편 상대적으로 신참내기였던 브랜드는 이후 셔틀 프로그램에서 핵심으로 활동했다. 4차례의 테스트 비행 이후 진행된 첫 정규 임무인 STS-5의 사령관을 맡았고, 사상 첫 무선 EVA가 시행된 STS-41-B, 사상 최고령 우주 비행사로 기록을 남긴 1990년 12월의 STS-35에서 사령관을 맡았다.[2]

3 배경

일단 우주개발사에 있어서는, 1971년 발생한 소유즈 11호의 사고와 관계가 있다. 게오르기 도브로볼스키(Георгий Добровольский) 사령관과 블라디슬라프 볼코프(Владислав Волков), 빅토르 파체예프(Виктор Пацаев)가 탑승했던 소유즈 11호는 최초의 우주정거장 살류트 1호에 도킹하고 최초로 승무원이 살류트에 진입한 미션이었는데, 이 미션은 귀환 도중 우주선이 좁다는 안습한 이유로 여압복을 착용하지 않고 평상복만 입고 대기권에 재돌입하다가 갑자기 선체에 균열이 생겨 공기가 빠져나가고 전 승무원이 질식사한 채로 발견되었다. 이에 소련에서는 이들에게 소비에트연방영웅 추서와 함께 국장을 치르고 유리 가가린의 옆에 안장하였는데, 이 당시 NASA에서도 조문사절을 보냈고, 우주비행사들의 관을 운구하며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했던 그 조문사절이 바로 아폴로 10호의 사령관으로 달에 갔다왔던 토머스 스태퍼드였다.

또한 소유즈 11호의 이 팀은 원래 정규 팀도 아니었다. 인류 최초의 우주유영을 수행했던 알렉세이 레오노프(Алексе́й Лео́нов)와 발레리 쿠바소프(Вале́рий Куба́сов), 표트르 콜로딘(Петр Колодин)의 팀이 내정되었다가 쿠바쇼프의 결핵 진단[3]으로 팀이 통째로 나가리되며 도브로볼스키의 팀으로 교체되었는데 이 팀이 귀환 도중 변고를 당한 것이었다. 결국 이들은 이후 큰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한편 이 1971년은 미국중화인민공화국의 관계가 급진전되는등 미국을 위시한 서방권과 공산권 국가들 간의 관계가 개선될 조짐을 보이는 시기였다. 하지만 소련과 미국은 베트남 전쟁 등에 관련하여 서로 까대는 분위기였고 인류 최초의 우주정거장 살류트 1호와 달로 향하는 우주선 아폴로 14호에 대해서도 서로를 깎아내리기 바빴다. 사실 소련도 중국과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는 않은 편이었는데 미국이 중국과 친하게 지내려는 움직임이 일자 더욱 민감해졌다. 다행히 베트남에 파병미군의 철수 논의가 시작된 뒤로 어느 정도 원만해지기는 했다만, 어쨌든 전통의 라이벌인 미/소라서...

그러던 1972년 1월, 헨리 키신저NASA 국장대행 조지 로를 만나 야 소련 과학원에서 예전에 합동 우주개발 드립 친 거 있다며?[4] 소련 우주국장이랑도 잘 얘기해봐ㅋ 하였고, 그렇게 키신저의 전폭적인 지지를 통해 NASA는 소련 우주국 높으신 분들과의 합의에 이르렀고, 급기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알렉세이 코시긴 소련 각료회의 의장이 1972년 5월 비용 지불에 대한 양해각서를 쓰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전까지 양국의 우주개발은 전혀 접점이 없었기 때문에 기술적인 난관이 한 둘이 아니었다. 가장 잘 알려진 문제가 바로 대기 문제. 아폴로가 순도 100%의 산소로 우주선을 채웠던 것과 달리 소유즈는 지상에서의 대기처럼 70% 질소, 30% 산소의 구성비로 호흡을 했던 것. 때문에 도킹 과정에서 서로간의 보정이 필요했다. 또한 서로 다른 도킹장치에 대한 문제때문에 상당히 골치아팠는데, 도킹을 위해서는 상호 우주선의 도킹장치를 하나로 통일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었으나, 서로 도킹장치의 변경은 거부하였다. 결국에는 여유가 되는 아폴로쪽에서 소유즈 도킹장치에 맞는 커플러를 제작하고, 이 커플러에 앞에 설명한 대기 문제를 해결하는 장치까지 달아서 도킹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주비행사들 외에 엔지니어들 또한 양국의 표준규격이나 우주선 디자인과 내부 구성 등이 다르다며 혼란을 많이 겪었는데,[5] NASA 관계자는 '아폴로는 다목적으로 만들어서 조종사의 조종 실력이 중요하지만 좀 쓸데없는 버튼과 기능들이 많았던 반면 소유즈는 하나만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서 하나라도 잘못되면 미션 포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지만 우주비행사들에게 주어진 부담이 적었다' 같은 평가를 했다. 양 측 모두 일장일단이 있지만 어째 공돌이들 눈에는 남의 떡이 더 커 보였나보다..

다만 아폴로가 여지껏 3인의 우주비행사로도 별 문제 없이 미션을 수행해온 것과 달리 이 당시의 소유즈는 3인이 모두 소콜 여압복을 입은채 들어앉기엔 좁다는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못했던지라[6] 결국 당초 소유즈 11호의 승무원으로 내정되었던 레오노프-쿠바쇼프-콜로딘 팀에서 콜로딘은 빠져야 했다.

아폴로와 소유즈의 두 사령관은 이 미션 이전에 각각 장군으로 진급[7]하였는데, 이에 따라 사상 초유의 우주 장성급 회담(...)으로도 기록되었다.

4 미션

소유즈 19호는 협정 세계시 기준 1975년 7월 15일 12시 20분에 바이코누르 우주기지 유리 가가린 발사대에서 발사되었고, 아폴로는 몇 시간 뒤인 19시 50분에 케네디 우주센터 LC-39 발사대[8]에서 발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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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악수.[9]

그리고 17일 16시 19분 9초에 아폴로와 소유즈는 역사적인 도킹을 이뤄낸 뒤 19일 15시 26분 12초를 끝으로 양측은 도킹을 해제했다. 약 이틀 조금 안되는 시간.

사실, 과학적인 성과를 논하자면 이 미션은 별 볼 일 없다. 어쨌든 이 미션은 공산권과 서방권의 냉전 분위기를 해빙하는 데탕트의 상징이자 양국이 장차 합동 우주개발에 나설 수 있는그 날이 언제가 될진 몰랐지만[10] 초석이 된다 정도의 정치적인 성격이 짙었을 뿐이다. 실제로 양국 평론가들은 이 미션은 서로에게 중요한 기밀정보들을 누출시킬 수 있다고 도리어 걱정부터 했을 정도. 그래도 다행히 이 미션 이후로 스타 워즈 우주 전투 같은 시츄에이션은 발생하지 않았다.[11]

미소중력에서의 송사리 부화, 미생물 채집, 균류 번식, 아폴로가 달이 되고 소유즈가 지구가 된 인공 일식 실험 등 생물학, 천문학, 지질학, 대기과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실험을 했는데, 사실 그것이 꼭 이번 미션이어야만 했던 실험들은 아니라 과학적으로 큰 의미는 없다. 하지만 양측 우주비행사들이 평화적 목적의 우주 개발을 추구한다는 선언문에 서명하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우주비행사들과 화상 대화를 하는 등 세계 멸망으로 이어질 대결구도를 타파해보자는 상징성에 초점이 맞춰졌다.

하지만 이 미션은 단순한 선전용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데, 훗날 소련이 해체된 뒤 소련 시절의 물건인 미르우주왕복선이 도킹하면서 이 시절의 연구는 다시금 크게 중요하게 여겨졌다. 특히 에네르기아에서 이 미션을 위해 개발한 중성 도킹(Androgynous Peripheral Assembly System, APAS)의 개념 등은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으며, 이 미션을 계기로 소련과 미국의 우주기술자들의 교류가 증진되어 훗날의 ISS를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소유즈는 이후 닐 암스트롱버즈 올드린이 달에 착륙한지 6주년째인 7월 21일에 무사히 지구로 귀환했고, 아폴로는 영광의 시대를 마지막으로 돌이켜보며 추가적인 실험과 활동을 하고 7월 24일 태평양에 착수했다. 다만 아폴로는 재진입 도중 로켓 산화제인 사산화질소가 사령선에 흘러들어와서 브랜드가 정신을 잃고 슬레이튼도 구토를 하는등 아폴로 우주비행사들은 끔살당할 뻔 했고, 결국 하와이호놀룰루에서 2주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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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에 전시된 도킹 모형.

5 뱀발

워낙에 상징성있는 역사적 순간이라 그런지 이것의 이름을 딴 담배 브랜드도 있다. 소유즈 아폴로라는 담배인데 러시아 현지에선 아저씨 담배 취급을 받는지 이걸 피는 젊은이는 눈코빼기도 안보이고 어르신들이나 좀 피는듯 하다.
  1. 소유즈의 19번째 미션이었다. 반면 아폴로는 비공식으로 아폴로 18호라는 명칭이 불리지만 이전에 스카이랩에 쓰였던 아폴로 우주선들도 있거니와 무엇보다 팀원 구성과 임무 일정도 다 계획했다가 파토난 아폴로 18호를 배려해야 했던 NASA에서는 그냥 ASTP라고 부른다.
  2. 59세의 나이로 세운 이 역사상 최고령 기록은 이후 STS-80의 61세 미션 스페셜리스트 스티브 머즈그레이브가 경신하고, 이후 STS-95의 페이로드 스페셜리스트이자 프렌드십 7호의 레전드인 77세의 존 글렌 상원의원이 경신한다.
  3. 그런데 사실 오진이었다.
  4. 소련 과학원장 므스티슬라프 켈듸쉬가 NASA의 3대 국장 토머스 페인에게 이런 답을 보냈고 한번 관계자들간 회담도 열렸지만 진전은 없었다.
  5. 예를 들면, 미국 쪽은 각종 기술적인 자료가 문서로 체계화되어 있어서 참고하기 편했지만, 소련쪽은 그런거 별로 없고 기술자의 경험이 주가 되어서 움직였다.
  6. 이 문제는 아예 소유즈 사이즈를 좀 키워서야 해결되었다.
  7. 레오노프는 소장(★)이 되었고, 스태퍼드는 준장(★)이 되었으며 이후 중장(★★★)까지 달았다.
  8. 아폴로 우주선을 달로 보냈던 이 발사대도 ASTP 미션을 끝으로 폐쇄되었다.
  9. 사실 이 순간도 선전용으로 타이밍을 딱 맞추려 했지만 아쉽게도 빗나갔다. 원래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소련군 병사가 처음 악수를 했던 엘베강 토르가우의 상공에서 만나려 했지만 실제로는 암스테르담 상공에서 이뤄졌다.
  10. 실제로 양국간 합동 우주미션은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나 다시 이뤄졌다.
  11. 폴류스SDI니 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프로젝트가 계속 이어지긴 했지만 다행히 '시도'로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