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

1 개요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맡았던 임금 직속의 비서기관.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과 흡사한 성격이다.

국왕의 독자적인 비서기구는 고려 중기부터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고려 성종 때는 중국 송나라의 추밀원과 은대사를 모방해 중추원과 은대, 남북원을 두어 군사 기밀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도록 했다. 현종 때는 세 기관을 대신해 중대성을 두었는데, 이후 중대성을 혁파하고 중추원만을 설치해 군사와 왕명 출납을 관장하도록 했다. 이런 조직체계는 조선 정종 때까지 이어졌다.

조선 건국 직후 중추원은 왕명의 출납 보다는 태조와 개국공신들의 원탁회의와 같은 노릇을 했다. 정종 2년(1400년) 중추원을 혁파하고 개국공신 부분은 의흥삼군부에 넘긴 뒤 국왕 직속기관으로 승정원을 분리시키고 승지를 승정원 소속으로 하는 직제 변경이 이뤄졌다. 이듬해인 태종 1년(1401년) 태종이 의흥삼군부를 다시 승정원에 흡수시키고 승정원을 승추부로 확대개편했다. 또한 도승지, 좌·우 승지, 좌·우 부승지를 지신사[1], 좌·우 대언, 좌·우 부대언으로 개칭했으며 동부대언과 당후관을 새로 설치했다.

신설된 동부대언은 지신사와 4대언이 각각 이(吏)·호(戶)·예(禮)·병(兵)·공조(工曹)를 담당하는 것에 이어 형조(刑曹)를 담당하게 했다.

이어 태종 5년(1405년) 군사 관련 업무를 병조에 넘기고 국왕 직속 기관으로서 필요한 부분만 남기는 개편과 함께 이름을 다시 승정원으로 고쳤고, 세종 15년(1433년) 지신사를 도승지로, 대언을 승지로 개칭하며 승정원 제도가 거의 완성됐다. 이 체제는 이후 경국대전에 그대로 등재되어 조선 후기까지 이어진다.

갑오개혁(1894년) 이후로는 승선원으로 개편되었고, 1895년 궁내부 산하에 신설된 시종원에서 업무를 이어받았다.

2 승정원의 별칭들

가장 잘 알려진 별칭으로는 '후설(喉舌)'을 꼽을 수 있다. 인후와 혀라는 뜻이다. 임금의 명을 들이고 내가는 조직으로서 임금의 입 기능을 한다는 뜻이다. 시경에 나오는 "왕명을 출납하니 왕의 목이요 혀로다(出納王命 王之喉舌)"에서 유래했다. 여기에서 '후설지신(喉舌之臣)'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다른 말로 '은대(銀臺)'라고도 불렀는데, 승정원 승지 6인을 '은대학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중국 송나라에서 궁궐 은대문 안에 비변사를 두고 황제에게 올리는 문서를 주관한 데서 유래했다.

3 인적 구성과 업무

정 3품(正 三品)

도승지(都承旨) : 승지 중 첫번째 서열로 육조(六曹)이조(吏曹)에 해당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지금의 비서실장 & 인사 & 정책조정 수석

좌승지(左承旨) : 승지 중 두번째 서열로 육조(六曹)호조(戶曹)에 해당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지금의 경제수석

우승지(右承旨) : 승지 중 세번째 서열로 육조(六曹)예조(禮曹)에 해당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지금의 외교수석 & 교육문화 & 홍보

좌부승지(左副承旨) : 승지 중 네번째 서열로 육조(六曹)병조(兵曹)에 해당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지금의 안보수석

우부승지(右副承旨) : 승지 중 다섯번째 서열로 육조(六曹)형조(刑曹)에 해당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지금의 민정수석

동부승지(同副承旨) : 승지 중 말석으로 육조(六曹)공조(工曹)에 해당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지금의 국토교통 비서관다른 승지는 죄다 수석인데....서열 낮다고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2][3]

승지들간의 위계서열은 매우 엄격했다. 관품이 동일하다 해도 요즘 직장으로 치면 선임이나 선배가 아니라 상사 대접을 한다 해도 좋을 정도였다. 경연 석상에서 도승지보다 먼저 발언했다는 이유로 도승지가 다른 승지에게 불같이 화를 낸 사건도 있었다. 게다가 승지의 임명은 서열 순으로 이뤄져 이 서열을 뛰어넘는 임명은 불가능했다. 한 마디로 동부승지부터 위로 하나씩 올라가야 했다는 말.

근무규칙도 엄격해서 도승지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거나 관모를 벗어서는 안 됐다. 특히 이등병동부승지는 근무 1년간 병가를 포함해 어떤 사유로도 결근해서는 안 되는 근무규칙이 있어 이를 어기면 상사(...) 승지들로부터 대찬 까임을 받아야 했다.

정 7품(正 七品)

주서(注書) : 이름대로 기록을 담당하였으며, 국사학계의 백년떡밥인 승정원일기를 작성한 사람들이다. 정원은 2인이지만 워낙 빡센 관계로 가주서를 둘 때도 많았다.

이들은 하룻동안 일어난 모든 사건과 발언들을 기록해야 했으므로 승정원일기는 초서체에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구어체로 기록했다. 때로 놓친 부분이 있으면 춘추관 소속의 사관들과 서로 기록을 대조하며 채워나가기도 했다고 한다.

이밖에 경국대전 규정에 의거해 사인, 하례 등을 두었다. 자세한 것은 추가 바람

4 승정원이 취급하는 서류의 종류와 양식

추가바람

5 은대조례

이처럼 승정원의 업무가 많고 관련 규정과 절차 등도 복잡한 데 비해 승정원의 인원들은 빨리 회전되는 경향이 있었다.[4] 따라서 업무 숙지도가 중요했고, 업무 규정집도 따로 필요했다. 이를 위해 몇 차례 규정집이 만들어졌는데, 가장 마지막인 고종 7년(1870년) 흥선대원군의 명령으로 간행된 승정원 업무 규정집이 은대조례다.

은대조례에 앞서 은대편고라는 규정집도 있었는데, 은대조례는 은대편고가 너무 복잡하고 자세해서 업무에 참고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내용을 간추려 정리한 것이다. 상술한 승정원의 업무 규정 중 상당수는 은대조례에 실려있는 내용이다.

6 승정원일기

항목 참조.

7 승지 진급 사례

승지 이동이 잦은 경우라면 도승지가 정3품 당상 통정대부 자급이겠지만, 인사이동이 늦어지면 통정대부 자급을 뛰어넘는 경우가 발생한다.

성종조의 김승경(金升卿)의 승지임명 사례를 보면 임명일자가 몇몇 부정확하기는 하지만, 2년 2달만에 동부승지에서 도승지로 진급한다.
다른 승지들도 앞서서/뒤이어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 우승지, 좌승지, 도승지 순으로 진급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좌부승지 손비장이 우승지 홍귀달로 바뀐 건 예외.
성종 8년 8월 17일 동부승지
성종 8년 8월 26일 우부승지
성종 9년 4월 30일 좌부승지
성종 9년 9월 6일 우승지
성종 9년 11월 14일 좌승지
성종 10년 10월 25일 도승지

성종 12년 8월 25일 가선대부 행 도승지
  1. 태종 때 황희가 지냈던 지신사가 바로 이 지신사다.
  2. 해당하는 승지와 현 정부체계 내의 직급은 당연히 다르다. 어디까지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최대한 비슷한 것으로 적은 것일 뿐. 예를 들어 우승지가 담당하는 예조에서는 과거시험을 주관하기 때문에 인사업무와도 관련이 되어 있다.
  3. 업무에 따라 서열은 정해져 있으나, 같은 품계이다.하긴, 말석이라는 동부승지라고 해도 정 3품이면 당상관으로 무려 수군절도사와 같은 품계이다.
  4. 사실 인사이동이 너무 빠르고 잦다는 점은 조선시대 내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