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묘호
고려는 3명, 조선은 2명의 왕이 각각 동일 왕조 내에서 같은 음의 묘호를 받았다.
1.1 정종의 묘호를 받은 군주들
성명 | 묘호 | 시호 | 재위기간 | 비고 |
왕요(王堯) | 고려정종(高麗定宗) | 정종지덕장경정숙문명대왕 (定宗至德章敬正肅文明大王) | 945~949 | 3대 왕 |
왕형(王亨) | 고려정종(高麗靖宗) | 정종홍효안의문경용혜대왕 (靖宗弘孝安毅文敬容惠大王) | 1034~1046 | 10대 왕 |
왕영(王韺) | 고려정종(高麗貞宗)[1] | 인목성효대왕(仁穆誠孝大王) | 1204 ~ 1211 | 21대 왕 |
이방과(李芳果) | 조선정종(朝鮮定宗) | 정종홍효안의문경용혜대왕 (靖宗弘孝安毅文敬容惠大王) | 1398~1400 | 2대 왕 |
이산(李祘) | 조선정종(朝鮮正宗)[2] | 정종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 (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3] | 1776~1800 | 22대 왕 |
패아지근귀유(孛兒只斤貴由) | 원정종(元定宗) | 간평황제(簡平皇帝) | 1246~1248 | 원세조 추존 |
2 문종의 부마 영양위 정종(鄭悰)
문종의 적녀인 경혜공주의 남편. 문종이 세자이던 시절에 경혜공주 (혼인 당시는 문종 즉위 전이므로 평창군주(平昌郡主)라 불리었다) 와 혼인하였으며, 후에 문종 즉위 후, 왕의 부마로서 영양위로 봉해졌다. 문종은 그와 경혜공주의 거처를 짓기 위해 당시 대표적인 부촌인 양덕방(陽德坊) 향교동에 약 30여채의 많은 집을 철거해 커다란 저택을 지어 내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문종이 얼마 못가 승하하고 즉위한 단종 역시, 하나뿐인 친누나[4]의 남편이니 단종의 신뢰도 두터웠을 것으로 보이며, 단종이 계유정난 당시 있었던 곳도 경혜공주의 집, 즉 그의 집이었다.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이곳 저곳으로 유배 생활을 하다가 승려인 '성탄' 등과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죄로 거열형을 당했다. 이때 국문을 당하면서도 어서 죽여달라고 당당한 태도로 일관했다고 한다. 영조 때 신원되어 순충적덕보조공신(順忠積德補祚功臣) 의정부 영의정(領議政) 영양부원군(寧陽府院君)에 추증되었다. 반역죄로 거열형에 처해져 시신을 수습할 수 없어서인지 묘는 실전되었고,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 있는 경혜공주 묘역에 가묘를 썼다.
경혜공주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얻었는데 아들 정미수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탄핵에도 불구하고[5] 정희왕후와 성종의 보호 하에 꾸준히 관직을 역임해 후에 반정공신의 반열에 올라 해평부원군에 봉해지기까지 하나 자손이 없어 문종의 핏줄은 여기서 끊어진다. [6]
2.1 미디어 속 정종의 모습
한명회, 왕과 비 등 단종과 세조 관련 사극들에서 조연들로 등장하다 공주의 남자에서는 주연급으로 등장한다. 영양위 정종이 최초로 부각된 사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이민우가 열연했는데 경혜공주 역의 홍수현과 더불어 작중 젊은 연기자들 중에선 연기력이 가장 뛰어난 편에 속하다 보니, 감정이입이 메인 커플보다 더 잘 된다는 얘기가 많았다.
일찍부터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명문가의 후손이라는 실제 역사적 사실과 달리, 드라마에서는 사채까지 끌어다 써야 할 정도로 몰락한 명문가의 자제로 허랑방탕하게 사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했다. 그러다 장터에서 몰래 궁 밖으로 나온 경혜공주와 우연히 마주치고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다. 얼마 뒤 그가 정치적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한미한 가문 출신인 것을 노린 수양대군의 배후조정 덕분에 경혜공주의 부마가 된다.[7]
부마가 된 뒤로는 몰락 양반으로 살던 때의 철없고 코믹한 모습을 점점 버리고 점점 진지한 모습으로 변하며, 경혜공주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과 단종에 대한 충성심을 보인다. 경혜공주는 처음에는 정종을 남편 대접은커녕 듣보잡 취급하지만[8] 힘없는 처지에서도 자신과 동생 단종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종의 모습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연다.
그러나 경혜공주의 사랑을 받게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사육신의 거사에 가담했다 사육신과 거열형에 처해질 위기에 놓인다.[9] 그러나 자신을 살리기 위해 세조에게 무릎을 꿇은 경혜공주 덕분에 경혜공주와 전라도 광주로 유배가게 된다. 그곳에서 잠시나마 신혼 생활을 누리고 경혜공주가 아이[10]까지 가지게 되지만, 금성대군의 역모에 가담한 것이 발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 거열형에 처해진다.[11]
거열형에 처해지기 전 세조에게 일갈하는 모습과 처형장에 온 경혜공주와 마지막으로 눈맞춤을 하는 애절한 모습, 거열형에 처해질 때의 처절한 모습까지 소화한 이민우의 열연으로, 평소에 공주의 남자를 보지 않는 시청자들에게까지 강한 인상을 남겼다. 정종이야말로 진정한 공주의 남자라는 평을 받을 정도.
3 일본산 사케 중 하나 正宗
일제강점기, 일본 정부는 문화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각 가정에서 전해 내려오던 가양주나 전통주의 주조를 금지시켰다. 이때부터 새롭게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 일본식 청주 중 하나인 정종(政宗)이다. 본래 이것은 특정 상표를 지칭하는 말이었지만, 근래 들어서는 하나의 일반명사로 취급 받고 있다.
한국에선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가문의 비전으로 만들어졌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정종(正宗)은 1840년 효고현에서 한 주조장인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술로 그 이름은 불교경전인 임제정종(臨濟正宗)에서 따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정종(正宗)에 딱히 종교적인 의미를 내포된 것은 아니고, 그저 청주(淸酒)와 정종(正宗)이 '세이슈'로 같은 발음이라는 것에서 착안한 일종의 말장난.[12]
문제는 전국시대 무장인 마사무네(政宗) 쪽이 너무 유명했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한자도 비슷한데다가 正宗도, 政宗도 모두 마사무네로 읽을 수 있던 탓에 결국 주조장인이 처음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正宗은 세이슈가 아닌 마사무네로 불리게 됐다.
이후 정종(正宗)이 크게 히트하면서 같은 사케를 주조하는 곳이 늘어났는데, 1884년 처음 상표조례가 제정되고 상표등록 신청을 받기 시작하자 이 정종(正宗)이란 이름의 상표 신청이 온갖 곳에서 쇄도했다고 한다. 이에 곤란해진 등록청은 할 수 없이 정종(正宗)을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로 지정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에 유독 正宗이란 이름이 붙은 사케 상표가 많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
더불어 1883년, 한 일본인이 부산에서 최초의 청주 공장을 세우고 정종(正宗)이란 이름의 청주를 발매했는데, 이 제품이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면서 당금에는 한국에서도 정종(正宗)이 곧 청주를 뜻하는 단어가 됐다.
여담이지만, 진짜 정종(正宗)은 사케 중에서도 비싼 축에 드는 술로 국내에선 맛보기 힘들다.
4 십간에 따른 등급 중 丁種
한자 사용국가에서 4등급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되며, 정(丁)종을 영문으로 바꾼다면 D급이다.
4.1 징병검사 신체등급 중 6급
지금 한국의 징병검사에서 신체등급을 1급, 2급, 3급, 4급, 5급, 6급, 7급이라고 하지만 1984년까지는 갑종, 1을종, 2을종, 3을종, 병종, 정종, 무종이라고 불렀다. 이 중에서 정종이 6급인데, 병역이 완전히 면제되는 신체등급이다.- ↑ 이후 희종(熙宗)으로 바뀌었다.
- ↑ 고종 때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직계 선조들이 황제로 추존되면서 "정조"가 되었다. 시호는 선황제. 마찬가지로 영조도 영종에서 추숭 된 것이다. 참고로 순조는 철종 때 이미 추숭되었다. 철종은 직계가 아니었으며, 고종은 익종(효명세자)의 양아들로 즉위했기 때문에 헌종 또한 시호는 추숭되지 않았다.(단, 이들은 1908년에 영조의 맏아들인 진종眞宗과 함께 황제로 추숭되었다.) 4대조까지 추숭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고종의 직계 4대조인 장종(사도세자)-정종-순조-익종(효명세자)이 각각 장조 의황제, 정조 선황제, 순조 숙황제, 문조 익황제로 추숭되었다. 사도세자와 효명세자는 이 시점에 각각 장종과 익종으로 추존된 상황에서 한번 더 추숭. 이 때문에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표지와 실록 속 표제에는 전부 정종대왕실록이라고 쓰여 있다. 또한 정조란 묘호가 황제로 추존되면서 새로 받은 것이므로, 흔히 불리는 정조대왕이란 호칭은 엄밀히 말하면 틀린 표현이 된다. 정종대왕의 경우 물론 같은 왕조의 2대 왕인 정종(定宗)과 음이 같으므로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정조대왕이라 부를 수도 있긴 하지만 정조황제가 사실 맞는 표현이다.
- ↑ 이후에 정조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正祖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로 바뀌었다.
- ↑ 문종의 후궁인 사측 양씨(司則 楊氏)의 딸인 경숙옹주가 더 있다.
- ↑ 성종실록에서 그와 관련된 기사는 대부분 그를 탄핵하는 내용이다.
- ↑ 물론 양자를 입양해 가문은 이어갔다.
- ↑ 앞서 기술하였듯이 실제 역사에선 문종이 즉위도 하기전인 세종대에 이미 결혼하였다. 중전을 잃고 홀로 남은 아버지 (세자 시절의) 문종이 애처로와서인지 경혜공주는 당시로서는 대개 12세 즈음에 혼인하는 왕족 여자들과 달리 16세에 이르기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할아버지인 세종의 건강이 악화됨에 따라 급히 결혼하게 된다. 이는 만약 세종이 승하하면, 국상을 3년상으로 치르는 동안 결혼할 수 없기 때문에, 3년 탈상을하고 나면 경혜공주의 나이가 20에 가까워 너무 과년하게 되기 때문...
- ↑ 자신에게 힘이 될 수 있는 김종서의 아들 김승유와의 혼인이 좌절돼서 낙심한 데다, 처음 만났을 때 사채업자들에게 끌려가던 찌질한 모습 때문에 정종을 한심하게 보고 있었다.
- ↑ 실제 역사상으로는 이미 경혜공주와 통진에 유배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드라마에서처럼 사육신의 거사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사육신과 함께 심문받는 장면도 역사 속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
- ↑ 드라마에서는 이 아이가 정미수로, 정종이 처형된 뒤 태어난 유복자로 나온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정종이 죽을 때 정미수는 이미 6살이었고, 당시 경혜공주가 가진 아이는 둘째인 딸이었다. 드라마의 전개 속도와 극적인 임팩트 때문에 딸은 생략되고 정미수가 유복자로 묘사된 것.
- ↑ 실제 역사로는 금성대군의 역모에 연루되지 않았고, 금성대군과 단종이 죽은 뒤 4년이나 지난 1461년 승려인 성탄 등과 함께 역모를 꾸미다 처형당한다. 치밀한 역모로 세조를 몰아내려 했다기보다는 세조가 다스리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거부했다고 보는 편이 옳을 듯. 드라마의 극적인 임팩트를 위해 목숨이 4년 단축된 드라마 속 정종 안습.
- ↑ 또한 다테 마사무네는 혼슈 북쪽 지방 사람이고, 정종이 처음 만들어진 효고현은 정 반대편인 혼슈 남쪽에 위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