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일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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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한글승정원일기
영어The Diaries of the Royal Secretariat
프랑스어Les Journaux du Secrétariat Royal
국가·위치대한민국 서울
소장·관리서울대학교 규장각
등재유형기록유산
등재연도2001년
제작시기1623~1894년
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공식명칭한글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한자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
영어The Diaries of the Royal Secretariat
분류번호국보 303호
소재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103호 동, 서울대 규장각
분류기록유산 / 전적류/ 필사본/ 일기류
시설3,243책
지정연도1999년 4월 9일
제작시기조선, 1623년~1894년

한민족 기록 문화의 정수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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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대표적인 기록유산이자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국사 교육과정에서 조선의 분량을 늘린 원흉. 조선왕조실록과 더불어 조선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꼭 봐야 하는 기록물. 헌데 양이 실록보다도 많은데 다 볼 수나 있을까? 전공자들도 이건 물리적으로 다 볼 수 가 없어 검색해서 본다. 어찌보면 한문 번역계의 최종보스.

조선에서는 승정원이라는 기구가 있었는데 이 기구는 지금으로 따지면 대통령 비서실과 같은 곳이었다. 다시 말해 왕명의 출납을 관할하던 기구로써 왕과 부서들 간의 소통을 맡아 각종 서류들을 정리해 왕에게 올려 보고하고, 왕이 내린 명령을 부서들에 전달하는 비서실의 역할을 맡았다.

이렇게 승정원에서 왕이나 부서들에서 올라온 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기록물이 승정원일기이며 조선왕조가 시작된 이후부터 작성되어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도 명칭만 몇 번 바뀌었을 뿐 계속 기록되었고, 역사가들도 편의를 위해 그냥 통칭해서 승정원일기로 분류한다.

국보 303호로 등록되어있다.

2 방대함

안타깝게도 승정원일기는 완전하게 후대에 전해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조선 전기의 기록들은 망할 놈의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화재로 모조리 불타버렸기 때문. 그나마 다시 기록되던 기록들도 이괄의 난이 일어나면서 또 타버렸고 영조 시대에 또 불타 일부 기록이 또 소실되었으며 세손의 요청으로 사도세자 사건이 기록된 승정원일기가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현재까지 남은 기록은 인조 1년(1623년)에서 순종 4년(1910년)까지의 287년 정도 분량이다. 이전 일기들과 중간중간 있었던 기록들의 소실은 후대의 연구자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토록 소실된 결정적 이유는 실록은 같은 책을 여러 권 만들어 서너 곳의 사고에 보관했던 것에 비해 승정원 일기는 필사본 1부만 제작 보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양이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승정원일기는 엄청난 분량을 자랑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글자 수가 49,646,667자인데 현재 남은 승정원일기는 대략 242,500,000자(!)[1]다. 글자 수도 다 못 세봤다. 전부 다 무사히 전해졌다면 글자 수가 얼마일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이 정도로 한 나라의 역사를 꼼꼼히 기록한 기록유산은 승정원일기 이외엔 없다. 현대 국가들도 이 정도로 기록 남긴 경우가 드문 판인데...당연히 그 기록의 세세함과 정밀함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승정원일기는 1차 사료인데다[2] 기록도 매우 세세하고 공문서의 성향이 강해서 사관의 성향에 따라 기록이 첨삭될 우려가 있는 실록보다도 실제 역사에 더 근접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의 모든 국정을 기록한 자료이니만큼 조선사뿐만이 아니라 조선 주변국들의 정세까지도 세세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그 역사적 가치는 매우 높다. 유네스코에서도 승정원일기를 2001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했다.

3 구성과 내용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쓰고 사서를 만들기 위한 1차 공문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굉장히 세분화되고 쓰는 방법이 체계화 되어있었다.

일단 가장 서두엔 일기답게 당연히 날짜가 들어간다. 여기엔 연호, 갑자년, 월일시, 날씨까지 기록하였다. 매시간대마다 새로 하였으며 날씨의 변화정도와 측우기를 통한 강수량의 정도까지 세밀하게 기록한다. 이런 내용이 들어가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기본적으로는 왕이 거한 궁을 중심으로 기록하지만 행궁으로 행차시에는 행궁과 본궁 양쪽을 기록하여 조선의 날씨 연구에 매우 큰 도움이 된다. 또한 해무리가 끼었다 안개가 어디부터 어디까지 가시거리 어느정도로 끼었다 몇시에 개었다 등 날씨의 수준도 대단히 세밀하게 작성되어있다.

또 임금의 경연 장면에서는 왕이 언제, 어디서, 어떤 신하들과(모든 신하 이름은 다 나열된다) 경연을 하였고, 저번에 읽다 만 어떤 책의 어디에 나오는 어떤 구절을 읽었고 이에 임금이 평한 내용과 신하가 평한 내용, 그리고 왕과 신하들이 계속해서 책 내용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공부하는 과정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사에 나온 것을 읊으면 그냥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과 같다. 이쯤되면 무섭다 의원이 임금의 건강을 살피는 대목에서는 어제 왕의 건강상태가 어떠어떠하였으며 요즘 날씨가 환절기라 일찍 기침을 하면 몸에 안 좋을 수가 있다는 내용과 그날 임금의 맥박이 어떠어떠했다는 등의 내용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이 다음 칸에는 근무일지라면 당연히 들어가는이 시간대의 근무한 승지와 일기를 작성한 주서의 이름이 적히는데 이를 좌목(座目)이라고 한다.

좌목의 다음에는 국왕의 위치와 현재 업무 상황[3]이 적히고 중요 왕족이라고 할 수 있는 왕비, 대비, 세자 등의 안부가 나온다. 날짜와 좌목에 이어서 여기까지도 정형화 된 불변정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기의 본문인 그날의 국정이 대화와 처결 여부를 포함하여 기록된다. 여기에 포함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각 관서에서 국왕에게 올린 문서와 거기에 대한 국왕의 결재여부와 후속처치
  • 의정부의 인사행정, 여러 상소와 장계
  • 당일에 근무하는 승정원 소속 관리 명단
  • 당일 국왕의 행적
  • 국왕 & 신하 간 모든 토론 대화내용(!)
  • 그 날 임금의 진료여부와 처방받은 약의 약방문

공문서 성격을 띠는 터라 사도세자 신원을 상소하는 유생 1만57명의 이름을 적어놓은 사례도 있으니 이것만 3만자 그날 당직은 뭔죄여 할말 다한셈. 영조대 청계천 공사에 대해선, 실록이 홍봉한 등과 대화한것을 몇줄로 간략히 처리했다면 승정원일기에서는 대화 내용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기록 분량만 비교해도 몇자 vs 몇장의 차이.

임금이 말씀하시길

"저번에 광충교를 보니 금년 들어 더욱 흙이 메워져 있다. 가히 걱정이 된다.
홍봉한이 말하길
"하천 도랑의 준설이 매우 시급합니다. 만약 홍수를 만나면 강가의 집들은 대부분 떠내려 가는 화를 입을 것입니다(중략)
임금이 말씀하길
"서울의 백성들을 불러 물은 후에 실시하는 것이 옳은 듯 하다. 설령 하천을 준설한다 해도 모래와 흙을 둘 곳이 없지 않은가?"
홍봉한이 말하길
"어떤 이는 배로 운반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수레나 말로 실어 나른다고 하는데, 한번 시험해 보면 알맞은 방도가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웃으며 말씀하시길
"한성 안으로 배를 들일 수 있는가?"
홍봉한이 말하길
"배로 운반한다는 것은 큰비가 내린다면 가능한 방법인 듯 합니다."
임금이 말씀하시길
"사관들은 의견이 다를 수도 있으니 각자 소견을 말해 보라."
ㅡ 《승정원일기》 영조 34년 5월 2일.

임금이 준천의 가부를 물었다.

ㅡ 《조선왕조실록》 영조 34년 5월 2일.


1777년 7월 28일, 새벽에 궁궐에 자객이 들자[4] 이를 발각된후의 기사를 비교해 보자.

(홍국영이 "자객이 새나 짐승이 아니면 궁궐 담장을 넘지 못했을 터이니, 대궐 안을 두루 수색하길 청합니다."라고하자)

임금이 말씀하시길
"조금 전에 별감들에게 먼저 차비문 안밖을 수색하게 하였는데 의 말이 매우 옳다. 경은 금위대장도 맡고 있으니 금군 20명을 인솔하여 승헌문에서부터 무덕문에 이르기까지 두루 수색하고, 또 연화문에 숙직하는 군사 20명에게 궁궐의 담장 안을 순검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홍국영이 말하길
"그러면 연화문에 숙직하는 군사는 표신을 풀어 보냅니까?"
임금이 말씀하시길,
"일이 급박하니 지체할 수 없다. 이 영전으로 인솔하면 되겠다."
ㅡ 《승정원일기》 정조 1년(1777) 7월 28일

(홍국영이 "자객이 새나 짐승이 아니면 궁궐 담장을 넘지 못했을 터이니, 대궐 안을 두루 수색하길 청합니다."라고하자)

임금이 그것을 옳게 여겼다.
ㅡ 《조선왕조실록》 정조 1년 7월 28일.

4 작성 방법

이름은 승정원 일기라서 승정원의 핵심인 승지가 작성할거 같지만 승정원 일기는 주서 2명[5]이 주로 작성했다.

두사람이 2부제로 하루 업무의 반씩을 담당해 국왕의 모든 행정처리와 회의에 참여하여 속기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속기록이 초책(草冊). 당연히 혼자서 하다보니 모자라는 부분이 있게 되는데 이 경우는 다른 승정원 직원들이나 사관들에게 물어서 채워넣었다고 한다. 속기 외에 올라온 상소문과 같은 자료는 주서가 아닌 서리가 베껴서 첨부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루에 두개씩 나오는 초책들을 모아서 한달 혹은 반달마다 모아서 책[6]으로 만들어 일월년을 기록해 승정원에 보관하였다.

5 번역과 전산화

이렇게 엄청난 기록유산임에도, 번역이 완료된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승정원일기는 일반인이 접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1. 위에서 말한 엄청난 분량. 조선왕조실록만으로도 번역이 몇 년은 넘게 걸렸는데 적게 잡아도 실록의 5배는 될 엄청난 분량을 번역하려면 얼마나 오래 걸리겠는가.
2. 초서의 압박. 승정원일기는 임금이 바뀔 때마다 최종정리를 위해 역사서로 정리된 것이 아니라 그날 그날의 각종 공무에 대한 누적된 기록에 가깝다. 그래서 승정원일기에는 초서가 많이 쓰이는데 초서를 이해하는 데는 별도의 교육이 필요하기 때문에 해독이 쉽지 않다. 지금도 수많은 학자들이 승정원일기를 한국어로 번역중이지만 완전히 번역되려면 앞으로도 최소한 수십년에서 길게는 백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승정원일기의 번역이 완전히 끝난다면 조선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엄청난 변혁이 일어날 것은 확실하다. 게다가 외국 사절 방문과 그 내용 그리고 당시 조선에 떠돌던 외국의 뜬소문까지 포함된다면 일본, 중국, 오키나와의 역사도 어느 정도 다시 써야 할 정도로... 더불어 모든 작업이 완료된다면 조선 말의 실록 중 순조실록, 헌종실록, 철종실록은 분량 자체가 적은 데다가 기록이 워낙 부실하고, 고종 순종실록은 일제가 만들어서 역사왜곡이 상당히 심하기에 일기가 주요 사료가 되고 실록이 보충하게 될지도 모른다. 세도정치기 연구가 더욱 활발해질 가능성이 크다. 지금 배우는 것도 많은데 여기에서 더 배워야 한다고 울부짖을 후대의 역사학도들에게 묵념.

승정원 일기의 본문의 전산화는 2015년에 마무리 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2001년부터 시작한 승정원일기 DB 구축을 완료했으며 2015년 12월까지 홈페이지 업데이트를 완료했다. 이 작업을 위해 한학자, 역사학자 등 전문인력이 연 130∼140명씩 투입됐다. 국편은 DB 작업을 마친 책부터 업데이트를 해왔고, 철종과 고종대 일부가 포함된 남은 책도 2015년내에 모두 업데이트 되었다. 승정원일기가 워낙 방대한 역사물이어서 이 정도 규모의 사료가 DB화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

물론 이건 원문이 다 데이터베이스화 되었다는 소리지 국문화까진 아직 먼 얘기, 승정원일기 번역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진행 중이며 위에서도 나왔듯이 수십년이 더 걸릴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 인조 시기의 승정원일기의 번역이 끝났으며 현재는 영조시기의 승정원일기가 번역중이다. 해석본은 한국고전종합DB라는 곳에서 볼 수 있다. 번역작업 외에 방점이 없이 적힌 한문에 표점을 찍어서 문장구별을 한 승정원일기 정보화 작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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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기타

국내 최초의 전기는 고종이 경복궁에 설치한 전구인데 이것은 에디슨 전기회사에서 구입하였다. 이 때 에디슨을 의대손(宜代孫)이라 적었다고 한다. 에디슨 본인은 동양의 궁궐에 자신의 전구가 달린다는 사실[7]에 상당히 기뻐했다고 한다. 다만 전구를 켤 발전기를 식히느라 하필이면 궁궐 연못 물(!)을 끌어쓴 탓에 물이 말라 잉어가 집단폐사(...)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래서 당대의 조선 사람들은 그 전구를 '증어'라고 불렀다. 직역하면, 연못을 증발시켜 물고기를 죽이는 물건이라는 의미.
  1. 순수하게 글자 수로만 462.5메가. CD한장을 거의 다 차지한다.
  2. 승정원일기와 비교할 만한 1차 사료 중 사관들이 매일매일 기록한 사초는 실록이 편찬된 후 파기되었고(세초)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은 승정원일기에 비해 분량이 적다.
  3. 현재 있는 궁이나 부서의 위치, 상참(常參)=회의, 경연(經筵)=연구회의 참석 상황 등이 기록된다.
  4. 궁궐 옥상에서 기와조각을 던지고 모래를 지어 던지는 소리가 들렸고 이를 기이하게 여긴 정조가 나와서 수색하게 했는데 사람이 기와를 차서 깬 듯한 자국이나 모래를 밟은 자국이 발각되었다.
  5. 승지는 정3품 주서는 정7품
  6. 조선왕조실록과 마찬가지로 1책=1권이 된다.
  7. 다만 에디슨 본인은 '조선이 어디 붙어있는 나라임?'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