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모노세키의 해안포대를 점령한 프랑스 군대 |
1 개요
에도 막부 말기 유항[1]의 일원인 조슈 번이 시모노세키 해협을 봉쇄하고 미국 및 유럽 상선에 포격을 가하면서 1863년과 64년에 걸쳐 촉발된 전쟁.
2 배경
당시 조슈 번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교토를 접수하고 고메이 덴노의 조정을 장악해 정치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는데 양이운동의 중심에 선 조슈는 서양과 일본의 주요 무역로인 시모노세키 해협에 포대를 설치하고 병사 1000명과 증기선을 포함한 4척의 함선을 상주시켜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상선을 무차별 공격했다.
시모노세키 해협 지도 |
특히 프랑스 상선의 경우 영문도 모른 채 공격을 당하자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서기관과 선원 3명을 해안으로 보냈으나 모두 조슈군에 의해 사살 당했다. 네덜란드 상선은 자신들과 에도 막부가 우호관계에 있고 쇄국시에도 계속 교류를 했었던 사례가 있는만큼 공격 받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조슈군은 상관없이 공격했고 결국 4명의 사상자와 선체에 큰 피해를 입은 채 겨우 빠져나와 도주했다.
이런 무차별 공격에는 과격한 존왕양이[2] 집단인 코메이지당이 참가했는데, 문제는 이 집단의 수장이 쿠게인 나카야마 타다미츠로 메이지 덴노의 외숙부 되는 사람이다(...). 그는 쿠사카 겐즈이, 타케치 한페이타 같은 존왕양이론자들과 교류했고 그 결과 이런 짓을 벌인 것이다.
3 1차 전투
1863년 6월 1일, 미국 공사관은 즉각 보복을 결의하고 요코하마에 기항하고 있던 전함 USS 와이오밍호를 시모노세키 해협으로 파견했다. 와이오밍호는 혼자서 시모노세키에 배치된 조슈군 함선 4척을 궤멸시키고 해안포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는 무쌍을 찍고 복귀한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수병 6명이 사망하고 4명의 부상자를 냈고, 조슈군은 사망자 8명, 부상자 7명의 피해를 냈다.[3]
사흘 후 프랑스 동양함대 소속 함선 2척이 시모노세키 해협에 들어와 맹포격으로 해안 포대를 침묵 시키고 해병대를 상륙시켜 점거했다. 그러나 조슈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프랑스군이 물러가자마자 포대를 복구하고 제멋대로 다른 번의 영지를 점령해 새로운 포대를 만드는 등 해안봉쇄를 이어갔다.
4 조슈의 실각
사쓰에이 전쟁 이후 양이 정책을 철회한 사쓰마는 영국으로부터 최신 정보와 무기를 공급받아 충실한 전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1863년 8월 18일, 사쓰마는 이러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친위 쿠데타를 획책하여 조슈 일파를 교토에서 축출하는데 성공한다.(8.18 정변) 조슈는 반격을 시도해보았지만 실패, 감히 덴노가 살고 있는 교토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조적(朝敵 - 조정의 적)으로 낙인 찍힌데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조슈번 내의 영지에서 봉기가 일어나 일부 영민이 외국군에 협조하는 사태가 발생했으나 조슈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양이 정책을 버리지 않았다.
5 2차 전투
1864년 7월, 조슈의 해안봉쇄로 인해 요코하마와 나가사키 무역이 마비되어가고 일본의 양이 성향이 점차 강화되어가자 영국 공사관은 서양의 군사력을 제대로 알릴 수 있는 본보기의 필요성을 느끼고 미국, 네덜란드, 프랑스에 조슈 응징을 위한 연합군 결성을 호소한다. 이에 따라 시코쿠에서 영국 9척, 프랑스 3척, 네덜란드 4척, 미국 1척 등 총 17척, 해병대 2000명 포함 총 병력 5000명으로 이루어진 4개국 연합함대가 편성되었고 총사령관으로는 사쓰에이 전쟁에 참전한 바 있었던 영국의 큐퍼 제독이 임명되었다.
조슈는 전쟁을 각오했지만 교토에 주력을 보냈기에 수비병력도 2000명 내외로 소수였고 대포 수량도 모자라 나무로 대포 모형을 만들기도 할 만큼 비참했다. 8월 5일,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연합함대는 저항하는 조슈의 해안포대를 차례차례 분쇄하고 해병대를 상륙시켜 철저하게 대포를 파괴했다. 또한 일부 부대는 내륙의 시모노세키 시내로 진격해서 조슈의 수비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사흘 후인 8일, 조슈군은 패배했고 모든 해안포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피해는 연합군이 더 컸는데 72명의 사상자와 2척의 전함에 손실을 입은 반면 조슈는 해안포대를 죄다 말아먹긴 했지만47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는 은엄폐가 불가능한 바다에 떠있는 거대한 군함과 흙과 돌 등으로 차폐물을 구축해놓은 해안 포대와의 싸움이기 때문인데, 이러한 지상포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군함이 불리한 특수성 때문에 프랑스 대혁명중 벌어진 툴롱 포위전의 경우 나폴레옹의 포병대가 영국군 함대에 포격을 가할 수 있는 위치로 진출하자 영국 함대가 주저없이 툴롱을 포기하고 떠나기도 했다.
6 이후
조슈는 300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는데 자신들은 그런 거액을 지불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막부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항변하여 오히려 이 배상금은 구경하고 있던 에도 막부가 지불하게 되었다(...).
여하튼 서양의 힘을 뼈저리게 실감한 조슈는 결국 서양을 배워야 한다는 쪽으로 선회하여 사쓰마와 같은 입장에 서게 된다.
1865년, 에도 막부는 싸울 여력이 없는 조슈 번에 쳐들어가 도막파(막부 타도를 주장하는 일파)를 쫓아냈으나 막부군이 철수하자마자 타카스기 신사쿠가 기헤타이를 동원 궐기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도막파가 조슈의 정권을 잡았다. 막부는 2차 토벌을 계획하고 다시 조슈에 군대를 보냈지만, 그 유명한 사카모토 료마에 의해 사쓰마와 삿초동맹이 결성되어 막부군을 이기게 되고 이는 보신전쟁에 의한 에도 막부 멸망과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진다.
여담으로 4개국 연합군 결성을 주도한 주일 영국 공사는 일본에서의 군사행동을 금지하는 정부의 훈령에 불복종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어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프랑스는 기념품으로 이 전쟁에서 얻은 대포 몇 기를 박물관에 갖다 놓았는데, 이후 일본이 시모노세키의 해안포대를 재현하면서 여기에 전시하고자 대포들을 반환해줄 것을 요구했었던 적이 있다. 물론 이는 거부되었고 결국 일본은 복제품을 만들어 전시해야만 했다.
한편, 코메이지당 수령인 나카야마 타다미츠의 처분 때문에 에도 막부는 골치를 썩혀야 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이 인간이 차기 덴노의 외숙이니까 함부로 처리할 수 없어서 일단 유배를 보냈는데 그 곳 관리의 도움으로 탈옥, 또다시 존왕양이 운동을 벌이다 결국 1864년 막부가 보낸 자객들에 의해 암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