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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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憲 (1885년 ~ 1951년 8월)

1 소개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법조인, 북한의 정치가. 호는 긍인(兢人).

지금은 묻혔지만 일제강점기 때 허헌은 민족 변호사로 유명하였다. 가인 김병로, 애산 이인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해 세간에서는 이들을 '3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1] 그러나 해방 이후 옛 동료들[2][3]과는 정반대되는 노선을 취해 갈라졌다.

2 일생

2.1 해방 전

1884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한학자 허추(許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1세 때인 1894년에 궁내부 경무관으로 부임한 부친을 따라 서울로 이주했다. 부친이 동향인 이용익과 가까워서 어렸을 때부터 이용익의 손자 이종호와 가깝게 지냈다.[4] 서울에서 재동학교와 한성외국어학교를 다녔다.

1903년 덕어학교[5]에서 공부했고, 1905년 이용익에 의해 보성전문학교가 개교했을 때[6] 제1회로 입학했다.[7] 1907년 보성전문 법과를 제1기로 졸업하고[8]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1908년 일본 메이지 대학 법학부 법과를 졸업한 후 조선에 귀국했다. 그리고 1908년 7월에 시행된 제1회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다음[9], 보전 법과 동기인 옥동규와 함께 합동법률사무소를 개소하고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1909년 평리원 판사에 맞서서 소송을 진행하다가 상관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변호사 제명처분을 받았다. 한국법조사 최초의 변호사 징계제명사건이었다.[10] 그 후 1910년 경술국치를 맞이하자 '변호사 따위 일해봤자 아무런 의미없다'면서 시국을 개탄, 고향에 은둔 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 운동에 참여한 민족지도자들을 무료로 변호하기 위해 다시 변호사일을 시작했고, 해박한 법지식으로 일제를 당황하게 만들었기 때문. 그리고 이 무렵에 사회활동이나 문화활동 등 광범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변호사 협회 단체를 조직해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20년 10월 경성조선인변호사회 회장으로 재직 중에 북경에서 개최된 국제변호사대회에 참석했다. 노동자, 빈민층을 위한 변호활동에 관심을 두고 나섰으며, 노동자들의 단체행위에 대한 부당해고문제나 임금투쟁에 대한 문제, 그리고 그 밖의 사회문제로 인한 재판에 변호사로 활동하여 이 분야에서 상당한 신망을 얻었다.

1920년 11월 동아일보 주주로서 감사가 되었고 1921년 3월 함흥 영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1923년 3월 민립대학기성회 결성에 참여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 11월 보성전문 제7대 교장에 취임했으며, 1924년 4월 동아일보사 사장 직무대행,[11] 1925년 조선변호사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면서부터 중도좌파적인 사회주의 성향을 띠게 됐다. 그리고 이때 제3인터내셔널조선공산당의 승인을 얻으러 간 조동호, 조봉암상하이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자 이들을 위해 무료 변론을 해주었다.

1926년, 뭔가 새로운 돌파구 찾고싶다면서 딸 허정숙과 함께 세계일주를 하였다. 딸 허정숙은 부친 허헌하고 미국까지 같이 여행갔었으나, 허정숙은 미국에 그대로 남아 1년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하였다. 허헌은 미국->유럽 여행을 떠났고... 당시 세계일주 하는 사람이 손에 꼽힐 정도로 흔치 않아서(다른 세계일주 여행자는 김성수, 최린, 그리고 여류화가 나혜석이 있었다.[12])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의 여행기는 삼천리 잡지에 3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때 미주지역을 여행하면서 캘빈 쿨리지 대통령을 만나보기도 했다.참고자료

6개월 가량 세계일주를 갔다온 뒤에 1927년 신간회 창립에도 관여했다. 좌우합작의 독립운동단체였던 신간회의 조직에 좌파를 대표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결과 1927년 2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후에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기 위해 안국동 네거리에서 민중대회를 계획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된 뒤[13] 4년간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 부인이 사망하였다. 출소 후 일제에 의해 변호사 자격을 박탈 당했다. 이후 잠시 사업계에 몸 담았다가 모든 일을 그만두고 칩거생활에 들어갔다.

일제 말기 1943년 단파방송 밀청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연행되었다. 당시 허헌은 58세 나이로 심한 고문을 받았고 딸 허정숙이 망명한 혐의도 죄명에 포함되었다. 그는 2년 정도 옥고를 치르다가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1945년 4월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그 뒤 허헌은 재취 아내의 처가가 있는 황해도 신천의 달천온천에서 휴양을 하면서 해방을 맞이했다.

일각에서는 "허헌은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으로 지내면서 친일단체에 협력했다."고 친일의혹 떡밥을 제기하고 있으나, 실제 허헌은 철저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 1943년 단파방송 밀청사건때 연루되어 2년간 옥고를 치루고 1945년 일제패망 직전에 풀려난 것 등을 감안하면 논리상 맞지 않는다. 더구나, 일제 말기에는 사회적으로 유명한 인사들을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각종 친일 단체에 무단 명의도용해서 넣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2.2 해방 후

1945년 8.15 광복여운형이 주도하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여 부위원장을 맡았다.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국무총리에 선임되었고,[14] 이때 여운형과 손을 잡고 진보적 정권을 수립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으며,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파와는 연계하지 않았다. 그러나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여운형이 수 차례 테러를 당했고, 미군정청이 조선인민공화국의 존재를 부인 한 데다, 그와 친분이 있던 한민당 등 우파세력들의 공격 등으로 난항을 겪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가 조선인민공화국에서 아랫자리인 내무부장을 배정 받은 것에 대해 이의가 제기되자, 김구가 주장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비판하였다. "법통이라는 유행어가 있는데 이는 옳지 못하다. 무엇이 법통이며 법통을 주장하는 자가 누구인가? 김구 일파가 법통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임시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승인받지 못하였으며, 더구나 임정 간부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이들이 국제사회 승인을 받았다면 미국이 무기를 제공했을 것이다. 임정이 법통을 내세우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일이다."라고 하였다.[15]

1946년 2월에는 조선공산당과 그 밖의 중요한 좌익단체들이 모두 참여하여 조직된 이른바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의 수석의장이 되었다. 그리고 1946년 11월 남조선로동당이 결성되자 남로당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이 공산당 활동을 불법으로 선언하고 허헌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면서 활동이 어려워졌다. 결국 1948년에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1947년 이승엽(동명이인)과 함께 북한으로 가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북한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6.25 전쟁 중에 대학 행사 참여차 청천강을 건너다 급류에 휩쓸려 익사하였다. 김일성은 병사들을 시켜 허헌의 시신을 찾으라고 지시하였고, 시신을 찾은 뒤 국장을 치르게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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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직접 관도 들었다.(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5061783)

2.3 가족사항

본처 정경자(鄭競慈)와의 사이에 딸이 둘이었으나 첫째는 어려서 죽고 둘째딸 허정숙(본명 허정자)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 유학 중 사회주의를 공부하고 조선에서 박헌영 주세죽 부부, 조봉암 김조이 부부와 함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그녀는 해방 후에 소군정 지역에서 활동하였고, 연안파 간부 활동을 하다가 김일성계열로 넘어가 북한 고위정치인이 되었다. 1956년 그의 남편 최창익이 '8월 종파사건'으로 숙청되었으나 이혼하고 계속 김일성 권력의 중심에 머무르다가 1991년 83세로 사망. 주로 문화, 선전 쪽의 업무를 맡았는데 문화선전상으로 재임하던 시절 최승희와 마찰이 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최승희를 없애버리는데 성공했다. 물론 최승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최승희는 허정숙 뿐만 아니라 다른 당 간부들, 심지어 김일성 하고도 툭하면 싸워댔고, 많은 사람들의 공적이 되었기 때문에 최승희의 숙청이 허정숙의 공로(?) 만은 아니다.

허정숙은 여성해방을 부르짖으며 몸소 자유연애를 실천했는데, 첫남편 임원근이 투옥되자, 송봉우와 동거하며 아이를 낳았고 1929년 그가 사회주의에서 사상전향하자, 또 다른 남자 신일룡과도 외도, 출산한다. 이후 최창익과 3번째 결혼 및 출산, 최창익이 숙청되자 이혼....허헌은 첫 사위 임원근이 투옥 중에 그 변호를 맡고 있었는데, 딸이 송봉우와 동거하며 아이까지 출산하자 정신적 충격이 아주 컸다고 한다.

본처 이외에 재혼을 하기 전까지 오(吳)씨.최(崔)씨 등과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으며, 재혼한 후처 유문식(柳文植)과의 사이에서 4남 2녀가 더 있다. 그 중 맏딸이자 (허정숙에 이은) 둘째 딸인 허근욱은 한국전쟁 중 월남하여 KBS 라디오 방송작가이자 소설가가 되었다. 현재 생존 중으로 지금도 소설가로 활동 하고 있다. 허근욱 부부는 이복언니 등 가족이 북한에서 고위직에 있다는 이유로 종종 간첩혐의로 수감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역시 후처 출생이자 총 6남 4녀 중 7번째인 허종욱(許琮旭)은 훗날 허종(許鍾) 으로 개명했으며 북한의 UN차석대사 및 외교부 순회대사를 역임했다고 허근욱이 밝힌 바 있다.
  1. 김병로, 긍 허헌, 애산 이으로 호나 이름에 모두 '인'이 들어가기 때문에.
  2. 특히 이인은 광복 이후 미군정 하에서 검찰총장으로서 좌익 척결에 앞장 섰다.
  3. 가인 김병로는 초대 대법원장으로 9년간 재임하였다. 당시 이승만 독재정권의 외압을 모두 뿌리치고 사법부의 독립성, 중립성을 지키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러나 김병로가 퇴임하고 얼마뒤 5.16으로 군부독재가 시작되자 사법부의 중립성,독립성은 개나 줘버리는 상황이 된다...
  4. 이용익은 당시에 벌써 대감이었고, 이용익의 손자 이종호는 허헌과 동갑이었다.
  5. 1898년에 설립된 근대식의 외국어학교로서, 독일어를 전문적으로 가르친 곳이다. 1906년 2월 11일 훈련원 터에서 YMCA팀과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경기를 벌인 학교로도 유명하다. 개화기에 설립된 근대식 외국어학교로는 덕어학교 외에 일어학교, 영어학교, 한어(중국어)학교, 법어(프랑스어)학교와 아어(러시아어)학교 등을 들 수 있다.
  6. 이용익은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설립자다. 많은 사람들이 고려대의 설립자를 김성수로 알고 있는데 김성수는 인수자일 뿐이다.
  7. 궁내부 관리였던 허헌의 아버지 허추가 건강이 나빠져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면서, 아들 허헌을 이용익에게 의탁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허헌은 이용익 집의 사랑채에 기거하며 학교를 다녔다.
  8. 보성전문학교를 다닐 때 허헌은 대한제국 규장각 등에서 말단관리로 일하면서 야간에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9. 1908년 광무변호사법에 의해 치러진 대한제국 1회 변호사시험에 합격, 대한제국 11호 변호사. 이후 일본 변호사 시험에도 합격.
  10. 이에 대해 한인섭 서울대 교수는 '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을 변론하다'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허헌이 징계 받은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던가. 전혀 그렇지 않다. (중략) 이 사건은 전근대적 관헌횡포에 맞선, 근대적 법지식을 갖춘 변호사의 기념비적 쟁투의 한 장면이라 할 만한 것이다."
  11. 당시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가 정치깡패 박춘금한테 테러당해 송진우가 사임했을 때 대행으로 맡은 것이다.
  12. 허정숙이 미국에 머룰렀기에 한국여성 최초의 세계일주는 나혜석이라고 할 수 있다.
  13. 당시 허헌은 광주항일학생운동을 독려하는 강연을 나설려다가 사전에 일제 경찰에 의해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14. 대한민국의 초대 대법원장인 김병로가 이 내각에서 법무부 장관이었던 것을 보면, 해방 당시 허헌의 위상이 김병로의 위상보다 더 높았음을 알 수 있다.
  15. 허헌이 김구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던 것은 1922년의 김립 피살 사건 때부터라고 볼 수 있다. 허헌과 친분이 깊던 김립이 이때 김구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암살을 당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