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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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複章) 수훈자
강기동구춘선권동진권병덕김경천
김동삼김병조김붕준김상옥김성수
김완규김익상김지섭김하락나석주
나용환나인협남상덕남자현노백린
린썬문창범문태수민긍호민종식
박동환박열박승환박용만박은식
박준승백용성신규식신돌석신석구
신채호신홍식쑨커쑹자오런안재홍
양기탁양전백양한묵E. 배설언더우드
여운형여지이연기우오세창오화영
유동열유여대유인석윤기섭위빈
이갑성이동녕이동휘이명룡이범석
이범윤이봉창이상설이상재이승희
이위종이은찬이인영이재명이종일
이종훈이필주임예환장건상장인환
전명운전해산정환직조성환조완구
주자화주시경지청천채상덕천청
최석순최성모탕지야오편강렬홍기조
홍범도홍병기황싱


李商在
1850 ~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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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생

엄격해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상당히 개방적이었던 유쾌한 어른이다. 조선의 버나드 쇼. 촌철살인의 귀재.

좌우로부터 인정받는 정말 몇안되는 독립운동가[1]

조선왕조의 온건 개화파 정치가이자 대한민국의 계몽운동가, 독립운동가. 1850년 충청남도 한산군[2] 에서 태어났으며 초명은 계호(季晧), 호는 월남(月南)이다. 베트남의 월남이 아니다1867년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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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시찰단 시절 이상재

이 무렵 개화파의 인물 박정양을 처음으로 만나 식객(食客)으로 지내 왔고 1881년 조사시찰단[3]에 포함되어 일본으로 출국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개화파가 실각하면서 서천으로 낙향했다.[4] 이후 1887년 박정양이 주미공사에 임명되어 미국으로 출국하게 되자 박정양을 따라 미국 생활을 하였으나, 청나라의 압력으로 귀국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 학무국장 겸 학무아문참의가 되어서 조선의 교육을 감독하는 역할을 하여 신 교육령을 반포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에 전현직관료 중심인물로 참여하여 1898년 3월 만민공동회, 10월 관민공동회에 주역으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12월 독립협회가 해산 되는 과정에서 체포되기도 했다. 1902년에는 개혁당 사건으로 구금되었는데 이 때 옥중에서 개신교에 입교하여 신자가 되었다. 관련 에피소드로 수감 당시 20대의 이승만과 같은 방에 있었고 이상재 선생이 그보다 거의 한 세대인 아버지 정도의 연장자였기에 이승만의 개종에 영향을 주었다고 오해할 수 있는데, 도리어 이승만이 이상재 선생에게 개신교를 전도했다(…).

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1921년에는 조선교육협회 회장이 되었고, 1922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결성하여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주도했다.1923년 현재의 보이스카우트 전신(前身)격인 '소년연합척후대' 의 초대 총재가 되었다. 1924년 조선일보의 사장으로 부임하였으며,[5] 1927년에는 신간회 회장에 임명되었으나 그 해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장례는 사회장(社會葬)으로 열렸는데 4남 중 3남이 모두 죽게 되면서 유일하게 막내아들이 상주(喪主)를 맡았으며 유산으로는 미곡 27가마의 을 남겼다고 한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종묘 바로 앞에 있는 한복 입은 동상의 주인공이 바로 월남 이상재다.

2011년 7월에 그의 육성을 녹음한 레코드판이 독립기념관에 기증되기도 했다.#

2 일화

개화파에 속했던 박정양과 가장 유대가 깊었던 사이였다. 고종갑신정변 당시 개화파 숙청에 나선 이후 학문의 우수함을 인정받아 관직에 기용되기도 하였으나, 박정양이 유배되었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가 박정양의 추천으로 관직에 등용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겹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양기탁 선생과는 국내 애국계몽, 실력양성 부분에서 많이 겹친다. 1896년 이상재 선생이 독립협회에 정부측 인사로 참여시 양기탁 선생은 사회초년이었고, 1922년 이상재 선생 말년의 민립대학설립운동 시 양기탁 선생이 국채보상운동에 모인 성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승만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승만은 대통령 재임시절인 1956년 공보처에 '월남 이상재 선생 약전(略典)' 이라는 유고집을 발간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

말솜씨가 뛰어났으며 당대 최고의 독설가라 할 만한 인물이자 언어유희에도 뛰어났다. 특히 개나리 이야기는 대단히 유명하다. 그와 관련한 일화들이 많이 남아 있으며 대인배의 면모가 느껴지는 일화도 많은데, 몇가지 살펴보자면…

  • 그가 박정양의 식객으로 있을 때였다. 밥을 가져다 주는 여종에게 "생일날에 식사 한 끼도 제대로 못 챙겨 먹고 서럽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여종은 박정양의 아내에게 "어떤 식객이 그런 소리를 하더라"라고 보고를 했고 박정양의 아내는 후하게 한상 차려 줄 것을 명했다. 그리고 며칠 후 다른 여종이 들어오자 같은 소릴 해서 다시 한끼 잘 먹고, 다시 며칠 후 다른 여종에게 같은 소릴 해서 또 잘 먹었다. 이 일을 알게된 박정양이 이상재에게 "자넨 1년에 생일이 도대체 몇번이나 되는가?" 라고 묻자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라고 했다.
"과연 대일본제국이 문명한 나라임을 알겠습니다. 다만 성경에서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 했으니 그것이 걱정이올시다......."
  • 역시 일본에 있을 때 한 포병부대에서 일본인 장교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때마침 그 장교는 감기에 걸려 있었다. 그걸 보고 이상재는 이렇게 말했다. "그까짓 감기는 대포로 못 쏘아 잡습니까?"
  • 박정양을 따라 미국에 갔을 때 사모관대를 그대로 착용하고 길거리를 다녔는데, 이를 본 아이들이 너무 신기했는지 몰려들어서 마구 돌을 던졌다(…) 미국 경찰들은 외국 외교관에게 위해를 끼친 죄로 아이들을 모조리 체포했는데, 이상재는 경찰서로 일부러 찾아가 선처를 부탁하여 아이들을 풀어주었고, 이에 미국 정가에서 조선에 대한 호의적인 이야기가 많이 퍼졌다. 한 역사 수필가는 미국에 가서 꼬마였던 시절 직접 이상재를 따라가며 구경했던 노파를 만났었는데, 말총 모자(Horse-tail hat)가 신기했다며 나이가 들어서도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만큼 흥미진진한 구경이었다는 얘길 했다고. 당시 선교사였던 호러스 뉴턴 알렌이 이들의 안내역을 맡았는데, 알렌은 자기 일기에서 이상재를 비롯한 조선 사신단을 더럽고 무례하다고 뒷담화를 실었다. 특히 이상재를 가리켜 더러운 남자라고 호칭할 정도였다. 단, 유일하게 욕을 안 먹은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이완용이다.(…)
  • 미국에 갔을 때 청나라 공사가 "미국 대통령에게 볼일이 있으면 무조건 청나라 공사관에 먼저 와서 보고를 하라"고 억지를 부리자 논리적으로 이를 물리치기도 했다.
  • 역시 미국에 갔을 때 일화인데, 미국인들이 스테이크를 대접하자 썰어달라고 하고는 젓가락을 꺼내서 집어먹었다고 한다.
  • 외국어 학교를 설립할 적에 일본이 "영어든 뭐든 외국어 교사는 무조건 일본인을 기용하라"고 억지를 부렸는데, 이상재는 "윽 자 발음도 못하는 놈들이 어디서 개소리냐?"라고 호통을 쳐서 일축했다.
  • 고종황제에게 올라온 온갖 청탁 서류들과 뇌물들을, 고종의 면전에서 "상감 계신 방이 왜 이리 추우냐!"라고 일갈하며 몽땅 난로에 던져 넣었다고 한다.
  • 3.1 운동 이후 배후 조종 혐의로 투옥되어 서슬 퍼런 일본제국 검사에게 심문받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손바닥을 내밀더니 "손바닥을 붙여 달라"고 말했다. 검사가 긴가민가 하며 손바닥을 붙여 주자 이상재는 냉큼 손을 떼면서 일갈한다. "보시오. 억지로 붙인 건 떨어지는 게 순리라니까. 조선이랑 일본도 그래."
  • 3.1 운동에 연루되어 일본인 고문관에게 취조를 당했을 때도 그는 "옳지, 왜놈들은 제 부모도 마구 친다더라. 이 늙은이도 때려치거든 쳐 보거라" 라며 고문관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는 강인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결국 이 고문관은 자신의 노부(老父)를 생각하여 월남을 더 이상 고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 3.1 운동 이후 어찌어찌해서 출옥하게 되자 사람들이 "그간 옥중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라고 묻자 "그럼 네놈들은 바깥에서 편하게 지냈나 보지?"라고 호통치며 응수하셨다. 참으로 비범하시다.
  • 이상재의 자택을 방문한 일본제국 순사가 문 앞에서 "이리오너라~!"라고 말하자 이상재는 "오냐 나간다!"라고 응수. 황당해한 순사가 "어찌 반말로 답할 수 있는가?"라며 따지자 "당신이 먼저 반말로 말했으니 당연히 나도 반말로 말해야지."라고 말했다고. 참고로 저 "이리 오너라"는 양반집에 들어갈 때 문지기 역할의 하인을 부르기 위해서 쓰는 멘트였다.
  • 잔인한 고문으로 악명높았던 일본 경찰미와 와사부로가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한다(...).[6] 야인시대의 그 미와 맞다. 물론 이상재는 미와 와사부로에게 사람 좀 작작 잡아가라고 호통을 쳤다.
  • 언젠가 이상재가 연설을 하러 갔는데 조선인 순사들과 친일파들이 잔뜩 있는 것을 보고 "여기에 개나리들이 만발하였구나!"하는 말을 했는데 군중들이 웃고 난리가 났다. 어깨에 힘주며 거들먹 거리기에 나리라 불러줬지만 실상은 왜놈의 앞잡이니 개새끼나 다름없어 개나리였던 것이다. 이상재가 이를 이용하여 언어유희를 보인 것이다.
  • 친일파 인사들을 보고는[7] "이제 그만 일본제국 동경(도쿄)에나 가서 사시지요"라고 말했다. 그 사람이 어째서냐고 묻자, "대감이 조선에 살아서 조선이 망했으니, 일본에 가서 살면 일본이 망할 것 아니오?"라고 일침을 날렸다. 근데 이미 있다는 게 함정
  • 문학가 변영로가 젊은 시절에 학교수업을 제끼고(…) 종로에 놀러나갔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변정상 씨라고 불렀다고 한다. 변정상은 변영로의 부친인데 아버지 이름을 불러서 놀란 변영로가 뒤를 돌아보니 이상재가 웃으며 서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 이름을 함부로 불렀던 게 불쾌해진 변영로가 이상재에게 "선생님. 노망이 나셨습니까? 아버지와 아들도 구별 못하시다뇨. 또 아무리 제 아버지와 친하시다고 하지만 길에서 남의 아버지 이름을 함부로 부르십니까?"[8] 라며 따지자 이상재 왈, "이놈아! 네가 변정상의 씨가 아니면 뭐란 말이냐!" 사실 이건 섹드립으로 볼 수도 있는데, 옛말에 정자를 "씨"라고 많이 불렀기 때문.[9]
  • 빚과 가난으로 힘들어 하던 이상재에게 누군가 땔감이나 하라고 두북한 돈봉투를 내밀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에 온 한 학생이 빈곤을 호소하자 냉큼 봉투째 들려 보내고는 "그러시면 어떡하냐"고 힐난하는 사람에게 "내 형편을 아는 놈이 또 갖다 주겠지?" 하며 송아지 눈을 떠서 끝내 주머니를 털게 만들었다고.
  • 말년에 자신을 소개할 때에도 "청년 이상재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으며 청년들과도 허물 없이 담소하는 것을 즐겼다. 이를 두고 주변에서 그렇게 젊은이들에게 허물없이 대하면 선생을 너무 만만하게 보지 않겠냐고 염려하자, 선생은 "내가 청년이 되어야지, 젊은이들에게 노인이 되라고 할 수는 없잖나? 내가 청년이 되어야 청년이 (더) 청년 노릇을 하는 것일세"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사망 하루 전 두 제자가 문병을 오자 그 제자들에 남긴 말도 참 비범하다. "네 이놈들. 너희 나 뒈졌나 안 뒈졌나 보러 왔지?!" 하고 구석으로 돌아 누워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평생 개인적인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 온 그였기에 다들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마지막까지 장난이 아니었을까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일화도 많지만, 이런 후덜덜한 일화들을 보면 근엄하고 권위주의적인 어른이라기보다는 글자 그대로 경험도 많고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큰 어르신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마치 퇴계 이황과 비슷한 면모. 또한 절대 권력 앞에 굴하지 않았으며, 촌철살인의 유머로 서슬푸른 총칼을 가진 일본 경찰들까지 입다물게 할 정도의 달변가였다.

  1. 일제강점기 시기 1920년대 초반, 식민지 조선에서 '민족개량주의','자치론' 떡밥이 나돌면서 주요 독립운동 세력들間 좌우파가 심하게 갈라지고 충돌 때 유일하게 양쪽에서 모두 믿을 수 있다고 제시한 인물이었다. 노구를 이끌고 중재해 하나로 만들었던 인물이었다. 대표적으로 1924년 조선일보를 인수한 이후 사장으로 추대되었던것과 1927년, 말년에 좌우익 연합 단체인 신간회 결성에 큰 역할을 했던것이 대표적.
  2.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 여기가 본관인 한산 이씨 이다
  3. 보수층 반발을 우려해 당시엔 신사유람단이란 명칭 사용
  4. 이렇게 말하면 이상재가 급진개화파에 속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으나, 이상재는 박정양과 마찬가지로 온건개화파로 분류되었다. 애초에 급진개화파에 참여했다면 낙향이 아니라 처형, 아니면 망명길에 올라야 했을 것이다.
  5. 이 때문에 이후 조선일보 측에서는 이 점을 매우 강조하며 자사를 홍보하고 있다. 물론 이후에 친일 언론으로 변질한 건 숨긴다.
  6. 어떻게 보면 이상한 게 아니다. 상대를 적절히 존대해 주면서 인간적으로 친근하게 대하면 수사 대상에게 보다 더 접근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미와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독립운동가를 수사하려던 경찰이란 뜻.
  7. 야사에 따라 이완용이나 송병준으로 바뀌기도 한다.
  8. 당시만 해도 조선시대의 예법이 좀 남아 있어서,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9. 100년이 훌쩍 지난 한참 후의 일이지만 유럽에서 팔고 있는 기아 씨드는 C'eed로 표기하는데, 이거 역시 Seed라고 표기하면 같은 이유로 "정자"로 오해할 소지가 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