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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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 1월 25일 ~ 1958년 12월 ?.

젊은 시절 사진

일제강점기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병희와 함께 천도교측의 중심 인물이었다. 구한말 대한제국의 하급관리로 출발했으나, 1904년 황실 특파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하게 된다. 이후 동경 제일중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한다. 귀국 후 손병희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고, 33세의 나이에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도산 안창호 선생의 신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독립운동가로 영향이 컸지만 3.1 운동때 체포되어 구속, 3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후 1920년대 초에 출소하여 그이후 민족개량주의 노선으로 걸어갔다. 1933년대동방주의를 내세우면서 이후 친일파로 변절한다. 상당히 적극적 친일행위를 함으로써 대표적인 친일파가 되었다. 1934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었고, 1937년에는 총독부 어용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이 되었으며 1939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의 단장이 되었다. 창씨명은 가야마 린(佳山麟)이다.

변절 이후 만해 선사의 어린 딸에게 돈을 쥐어줬는데 그 사실을 안 만해 선사가 더러운 돈이다라는 말과 함께 대노하면서 그 돈을 빼앗아 이 자의 얼굴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해방 이후 미군정으로부터 발표된 포고령에 따라 조선총독부 중추원직을 박탈당했다. 이어 천도교측은 그의 친일행각 죄를 물어 은퇴를 권고하였으나 그는 거부하다가 결국은 영구제명 당하고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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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운동 시기의 사진으로 보인다. 확인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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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 활동기 때 체포된 최린(오른쪽). 맨앞(왼쪽) 사람은 김성수(1891)의 동생 김연수 경성방직 공장 사장. 다른 사진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재판 공판 3차례 받았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친일행위를 시인하고 솔직한 참회를 했다. 당시 남긴 말로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 잠시 민족 독립에 몸담았던 내가 이곳에 와서 반민족 행위를 재판을 받는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소에 사지를 묶고 형을 집행해 달라. 그래서 민족에 본보기로 보여야 한다."[1]고 말했다. 이후 병보석으로 풀려났다.[2]

공판정에 같이있던 이광수가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한 것이다"라고 하자 그가 날린 명대사가 바로 "입 닥쳐"(…). 1949년 4월 병보석으로 석방했다. 그렇지만 김승학의 반민특위 살생부 초안에 사이좋게 실렸다.(...)


6.25 전쟁북한납북되었고 이후 행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게 없다. 다만 1958년에 사망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여류화가 나혜석과 염문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결국 나혜석이 소박을 맞게 만들었는데 당시 나혜석만 욕먹었고 그는 모른 척 하였기에 여성단체들이나 페미니스트들에게 이런 점으로 엄청 씹히기도 한다.[3][4]

여담인데 그가 3.1운동 이전에 일본 형사로 일하던 신철이란 사람을 찾아가 설득시켰다고 한다. 돈을 건네고 회유하려 했는데 신철은 오히려 스스로 마음을 돌려 3.1운동에 대한 허위 정보를 퍼뜨려 일경들을 엉뚱한 곳에 배치하게 만들었고 3.1운동 이후에 구속되자 유치장에서 숨겨둔 청산가리(시안화칼륨)를 먹고 자결했다. 그런데 최린이 친일파로 변했다는 건 아이러니하다.

대중매체에서

야인시대에서는 한태일이 연기했는데, 상당히 최린과 닮은 배역이였다고 한다.

반민특위 조사실로 지팡이를 짚고 부축을 받으며 검거되어 오면서 언론에 자세히 인터뷰 하는것도 거절한 채 죄인이되어 잡혀온 것이니 그리들 알아달라며 반민특위 조사실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최린이 조사실로 가면서 어릴때 자신을 가르친 제자로 인연이 있었던 조사관을 만나고 "내가 조사받을 자리가 어디요?"라고 조사관에게 유일하게 친절과 봉사로 대함을 받는다.[5] 최린이 조사를 받고 이정재는 상관인 노덕술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받고 노덕술을 체포하러 간다.

당시 조사관이 최린에게 한 말은 "용서하십시요 선생님. 지금부터 반민족 주의자로서 피의자로서 심문하겠습니다"라고 했고, 최린은 "그리하시구려 당연한 것이구려."라고 했다. 재판때는 묵묵부답.
  1. 혹은 종로(서울) 한복판에서 민중들에게 돌 맞아 죽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2. 1990년대 나온 고 임종국 선생의 한국의 친일파 99인에선 그래도 이렇게 회개한 점은 좋게 봐야한다고 쓴 바 있다. 당시 공판에 나온 친일파들은 대다수가 내가 뭔 잘못임, 난 살고자 한 것뿐. 되려 나만큼 나라를 생각한 사람이 어디있삼?라고 정당화(본문에 있는 이광수(소설가)와 자열서 쓰고 변명 늘어놓은 최남선이 대표적) 하거나 일본이 전쟁에서 질줄 몰랐다. 아예 적반하장으로 날 재판에 세워두는 건 죄다 빨갱이 새끼임 처럼 큰 소리치고 욕하고 악쓰는 이들까지 있었다..(대표적으로 이종형노덕술 같은 부류들을 들을 수 있겠다.)
  3. 여류화가 나혜석은 한국 여성 최초의 세계일주를 한 사람으로, 당시 변호사이자 일본 외무성 관료로 일했던 남편 김우영을 따라 2년여에 걸쳐 만주, 러시아, 유럽, 미주, 하와이 등을 여행했다. 나혜석의 파리 체류 중 당시 30개국 여행 중이던 최린을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당시 한국인 유학생 사회가 너무 좁으니 파리 한인사회에서 나혜석은 최린의 작은댁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당시 잠시 베를린에 가서 공부하던 김우영은 소문을 듣고 몰래 파리에 돌아와 둘의 불륜을 목격한다. 이후 귀국하여 둘은 이혼한다.그럴만도 하지
  4. 정작 이혼 후 솔로가 된 나혜석을 부담스러워한 최린은 그녀를 버리는데인처모에?, 나혜석은 최린때문에 이혼당했는데 나 몰라라 하니 빡쳐서 최린을 정조유린죄라며파리에서 강제로 정조를 빼았긴 것이라 주장 당시 돈 12,000원의 손해배상(위자료?)과 함께 고소한다. 화간을 강간으로 사기치는 원조 . 최린은 이것에 대한 기사를 막으려고 동아일보 기자를 매수하고, 나혜석에게 2,000원이라는 돈을 주고 소취하를 종용한다.결국 나혜석은 패소..하지만 돈은 챙겼다
  5. 다른 반민족주의자가 반민특위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고함소리도 듣고 했다고 하나 최린은 조사관과의 인연과 고령인 점울 감안한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