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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2년 2월 박찬종이 창당한 1인중심 정당. 약칭은 신정당.
박찬종은 1990년 1월의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등의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창당되던 당시, 통일민주당 소속이었으면서도 당 총재인 김영삼의 합당노선에 반발하여 민주당에 잔류하였다.
박찬종은 뒤 이어 민주당이 이기택 중심으로 운영되는 데 반발하여 민주당을 탈당한 뒤 무소속으로 활동하였다. 박찬종은 1992년 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1992년 2월 기성정치권과 관계가 없는 정치지망생들을 끌어 모아 신정치개혁당을 창당하였다. 박찬종은 당연히 신정당의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1992년 3월에 실시된 14대 총선에서 신정당은 총 11명의 지역구 후보자를 입후보시켰으나 박찬종 1인을 제외한 모두가 낙선하였다.(이는 박찬종을 제외한 타 인물의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은데다가 당시 돌풍을 일으킨 국민당보다 자금력도 후달렸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당시 국회의원 선거제도가 지금처럼 지역구 의원 /비례대표 의원를 따로 뽑는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이후 박찬종은 1992년 5월부터 신정당의 대통령후보로서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것을 선언하고, 노상토론회와 거리유세 등을 실시하며 20∼30대의 젊은 유권자들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어진 1992년 14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찬종은 김영삼·김대중·정주영 등의 노인정치인들에 혐오감을 가진 젊은 층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어 1백50만 표를 넘는 표(득표율로는 6.4%로 4위)를 획득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때부터 박찬종은 3김시대가 끝나고 나면 가장 유력한 대통령후보가 될 정치인으로 부각되었다. 이러한 성과를 근거로 박찬종은 활발한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신정당은 태생부터가 박찬종 1인에 의존하는 정당이어서 정당으로서의 체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단지 명맥만 유지할 뿐이었다. 이에 박찬종은 14대 대선 이후 김영삼 정부에 의한 정치보복으로 인하여 와해되어가던 통일국민당 대표 김동길과 합당교섭을 전개하여 1994년 5월 두 당을 합당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한 합의에 따라 1994년 7월 신정당과 국민당은 통합전당대회를 개최하고 신민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창당함으로써 신정당은 소멸되었다.
여러모로 2007년 창조한국당과 유사한 점이 많았던 정당.[1]
2 역대 선거결과
1992년 제14회 국회의원 총선거 1/299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박찬종 6.4% 낙선- ↑ 두 정당 모두 1인 중심 정당이었으며 대선에서의 성적도 서로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