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한국당

창조한국당
創造韓國黨
Creative Korea Party파일:Ckparty.jpg
창조한국당 로고. '사람 중심'이란 기본 철학을 바탕으로 태극을 품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형상했으며 '태양에서 햇살이 퍼져나가는 모습이자 씨앗을 상징하는 모습'의 시안이었다.
정당색은 C30 M100 Y100. 굳이 따지면 연한 고동색이다. # 로고 시안

구 홈페이지[1]

1 개요

대한민국의 정당. 2007년 제17대 대선에서 대통령 후보로 나선 전 유한킴벌리 사장 문국현을 중심으로 창당한 정당으로, 정치성향은 중도 개혁이었다. 대한민국 정당들을 좌우로 분류하면 딱 중간에 끼어버리는 정당을 지향했다.

2007년 10월 30일 창당 ~ 2012년 4월 26일 정당 해산.

요약하면 통일국민당-국민통합21의 뒤를 잇는 실패한 제3후보 정당. 시작은 창대하진 못해도 무시 못할 수준이었지만 끝은 참담했다.

2 역사

2.1 의석을 확보하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문국현의 깨끗하고 성실한 이미지가 장점이었지만, 사실상 문국현의 1인 정당이고 한국의 지역감정 정치 구도상 특정한 지역 기반이 없기 때문에 기반이 약했다. 대선이 임박하여 급조되었기 때문에 조직력도 좋지 못한 편이었다. 창당 직후 에는 민주당 소속으로 16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정범구 전 의원과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김영춘 의원이 입당하였으나, 문국현의 독선적인 당 운영을 비판하면서 18대 총선을 앞두고 탈당하였다.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국현이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을 거부하고 4위 5.8%(137만 5,498표)의 지지율을 얻은 후 득표력에 의심을 받고 있었다. 특히 대선을 앞두고 문국현 후보 자녀들의 재산문제에 관해서 내로남불식의 태도를 보이면서 이미지가 상당히 실추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문국현 항목 참조.

대선 직후 치뤄진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서울 은평구(을) 지역구에서 친이명박계의 대표 주자중 하나인 이재오를 상대로 문국현 대표가 승리를 거두면서 기사회생했다.[2] 게다가 3.8%의 정당득표를 하여 비례대표 의석도 2석 얻으면서 아슬아슬하게 명맥을 유지했다. 이는 인터넷 상의 높은 지지에 비해 3% 달성에 아슬아슬하게 실패하며 원외 당이 된 진보신당과 비교되었다. 물론 그외 11명의 지역구 출마자는 많아야 5%를 얻으며 낙선함으로서 지지세와 인재가 없음을 증명하였다.

국내 최초로 외국인 국회의원이 나올 뻔한 당인데, 이럴려고 했다가 이렇게 되었다. 비례대표 7번이라뇨 까일만 하네요[3]

2.2 교섭단체 - "선진과 창조연합"과 문국현의 의원 상실

대선 직후 창조한국당을 바라보는 시선은 무시할 수 없는 제3세력의 탄생 정도였으나, [4] 2008년 8월 자유선진당과의 연합으로 선진과 창조의 모임이라는 교섭단체를 출범시킨 후, 이 당에 대한 평가는 자유선진당 주니어 수준(…)으로 격하되었다. 혹자는 문국현의 정치적 자살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 국민일보 만평에서는 유한킴벌리의 광고 문구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를 빗대 "내 몸뚱이 푸르게~ 푸르게~"라면서 문국현을 카멜레온으로 그려 비꼰바 있다.

이 당의 비례대표 1번 이용경 의원은 과거 참여정부시절 KT 사장으로 재직하며 인터넷 종량제 도입을 시도한 적이 있다. 비례대표 2번인 이한정 의원은 당내에서 당선 무효 소송을 건 상황이라[5] 참여하지 않았고, 그가 당선 무효 된 후 비례 3번 유원일 의원[6]이 의원직을 승계해서 활동했으나 그 역시 교섭단체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유원일 의원이 2012년 연초 자진 탈당하면서 선경식 당 대표가 비례대표를 승계하였다.

앞서 말했듯 자유선진당과의 연합으로 교섭단체 자격을 얻어,[7] 짝수년은 자유선진당 의원(권선택 의원 4개월)이, 홀수년은 창조한국당 의원(문국현 의원 7개월)이 교섭단체 대표로 활동할 예정이었다. 결국 가까스로 20석으로 유지되다가 2009년 8월 심대평 의원의 탈당에 이어 교섭단체를 탈퇴하며 공중 분해, 심대평 의원이 탈당 된 다음날 유원일을 가입시키려 애썼으나 요구가 맞지않아 그 다음날 결렬됐다.

더구나 문국현 대표 역시 공천헌금 소송#에 걸려 의원직을 상실하면서 사실상 창조한국당은 사망 단계에 들어갔다. 애초에 문국현당이나 다름없는 정당이어서 세력적으로 미미했기도 했지만. 결국 매번 마다 야5당 야5당[8]이라면서 거론은 되지만 사실상 취급조차 못받게 되었다. 사회당이 다섯번째 당은 아닐까요 그런데 사회당은 진보신당과 합당크리 ㄳ[9]

2.3 2010년의 대 몰락

심지어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자칭 텃밭인 은평구는 대접조차 받지 못했고, 이 선거에서 고양시 일산서구에서 후보로 나와 2등으로 당선된 고은정씨를 제외한 모든 후보가 낙선했다. 다만 야권 단일 후보인 이태곤 후보가 부산광역시 영도구 구청장 선거에서 36%, 광역의원에서 정연규 후보가 대구광역시 달서구 갑에서 17% 표를 받은 것은 죽기 직전의 발악선전으로 쳐 주는 분위기. 여하간 낙선했으니 의미가 없다(...)

2010년 재보궐선거(7월)에서도 공성경이 문국현 전 대표의 지역구였던 은평 을에 출마했으나 민주당,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3당에게 단일화 제의조차 받지 못했다. 결국 1%대로 낙ㅋ선ㅋ 물론 단일화한 장상후보 측도 광탈했다.

이 와중에도 내분마저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 안습(...) 지방선거를 대비해 2010년 5월 전당대회를 열었으나 결과는 더욱 시궁창이었다. 문국현 의원직 상실 이후 힘을 잃었던 공성경 대표 당선자 등의 친문국현 당권파는 전당대회 전까지 비상대책위원장(대표)이었던 송영오와 최고위원이었던 김서진[10] 등 비 문국현 세력들을 대량 제명 조치했고, 이에 유원일 의원이 항의하며 사실상 무소속 독자행보를 벌였다. #

결국 당의 존립까지도 위태로워지면서 2011년 이후에는 아예 공기가 되 버린 상황이 되었다.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서울특별시장무소속 박원순 후보를 중심으로 야권 연대가 이루어졌는데, 공성경 전 대표도 영상에 나온다. 큰 키로 센터에 섰지만 나왔다는 거고 결국 듣보잡... 이걸 작성하고 있는 작성자가 더 신기하다[11]

이렇게 되자 이용경, 유원일 의원 등은 2011년 말 민주당과 혁신과 통합등이 주축이 된 야권 중통합 정당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최후의 연명 그렇게 12월 17일에 통합 전당대회를 치룰 예정이라 창조한국당은 역사속으로 사라질 예정...이었으나, 최종적으로 통합되지 않기로 했다. 이것은 11월 전당대회가 이뤄지지 않고 친문 성향의 한면희 대표 체제가 이어졌기 때문으로, 이번엔 이용경 의원이 지도부 전원 사퇴를 주장했다. 이렇게 안드로메다... #

이 두 차례의 (사실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내분은 창조한국당이 드디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문국현의 측근 사당으로 전락했다는 의미와 다름이 없었다. 소속한 두 의원은 사실상 창조한국당과 관계가 없는 무소속 의원에 가까운 행보를 벌였고, 당권파 측은 의석 하나 나오지 않는 정당을 장악했다고 희희낙락했다. 위처럼 야권 연대에 실속 없는 이름을 올리며 정치놀이나 하는 처지가 되었다(...) 2012년 초 혁신과 통합(시민통합당)에 참여한 유원일 의원이 사퇴하여 선경식이 승계하고 대표가 된 뒤 공성경 등의 일부 남은 인원과 선거를 치렀다.

2.4 정당 등록 취소

2012년 4월 1일, 만우절을 맞아 이명박 대통령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라는 편지를 낭독하며, 해체 전 마지막으로 투혼을 불태우며 이명박 대통령에게 을 묻히고 장렬히 산화한다(...) 존재감이 없 의석을 갖고 있긴 했기 때문에 100분 토론 등에도 일단 등장하긴 했지만 사실상 병풍이나 다름없었다.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지역구 3명, 비례대표 4명의 후보를 등록하는 데 그쳤고, 지역구와 비례대표 모두 1명도 당선시키지 못하고 0.43%의 비례대표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정당법에 의해 자동으로 해산 확정.

등록이 취소된 뒤 얼마되지 않은 4월 18일 선경식 전 대표는 과중한 업무로 뇌출혈로 급서했으며(향년 63세) 장례는 국회장으로 치러졌다.

이후 다른 등록취소 된 당과 달리 재창당활동조차도 하지 않았다. 다만 "안녕 창조한국당!" 정도로 홈페이지 끝마무리는 확실하게 했으며 대다수의 당직자와 당원은 이후 민주통합당에 합류했다. 놀이 시작했다, 놀이 끝났다

  1. 2016년 2월 현재 문국현 전 대표가 참여하고 있는 '문지방 너머 삶의 경제 포럼' 홈페이지로 연결된다. 다만 이 포럼 홈페이지 하단을 보면 대표 URL[1]이라고 기재돼 있긴 한데 정작 이 주소로 들어가면 접속이 되지 않는다.
  2.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서울의 대표적인 야권 성향 강북 서부권에서 (탄핵 등을 이겨내고) 지속적으로 재선한 이재오를 (뉴타운 바람에도 불구하고) 무려 52.0%의 득표로 격침시킨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참패한 재보궐은 물론이고 19대 총선에서도 통합진보당 천호선 후보(현 정의당 대표)가 아슬아슬하게 낙선하면서 문국현 후보 개인의 브랜드 파워는 역사에 남게 되었다(...)
  3. 비슷한 예로 개혁국민정당 출신의 의원이 비례 순번이 5번이었으나 선경식 대표(의원)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정당 해산으로 승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4. 거대 양당과 경북이나 충청의 지역기반 일부 정당을 빼면 대선에서 출마 선언 4개월만에 (사퇴 없이) 지지율 5%를 얻는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민주노동당만 봐도...
  5. 이한정의 선거 등록과정에서 전과가 누락되는 사태가 있었고 당시에는 비리로 형을 받아 퇴직하면 비례대표 승계대상이 아니었다.
  6. 2015년 현재 이 양반은 론스타에서 녹봉을 받아 쳐잡수신 장화식 전 투기자본감시센터 대표를 위해 '해고노동자 장화식을 위한 모임'을 결성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듯 하다(...) 아주 가지가지하고 자빠졌다
  7. 교섭단체 자격은 국회의원 20명을 넘겨야 주어진다. 자유선진당 18명+창조한국당 2명.
  8. 의석 순서로는 민주당,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9. 사회당이 야6당으로 거론 된 경우도 있다. 대구의 경우가 대표적. 다만 후보는 내지 않았다. #
  10. 18대 총선 당시 강북구에서 5%를 조금 넘는 득표로 그나마 창조한국당 출마자 가운데는 관심을 받은 인물이다!
  11. 참고로 분당 직후 진보신당 비대위원장을 맡은 (전 민주노동당 대표) 김혜경 당시 대표도 작은 키에 한복을 입고 나오고, 노회찬, 심상정, 박영선, 이계안 등 각자 사연있는 분들이 다 나온다(...) 지금 다시보면 그야말로 갈라선 집안사람들끼리 선거 상황 상 웃으면서 노래 부르는 나름 섬뜩한 광고다. 총선 때 통합진보당 광고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