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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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東吉
1928년 10월 2일 ~

1 개요

1928년 10월 2일 평안남도 맹산군에서 태어났다. 종교개신교이다. 아호는 산남(山南). 본관은 풍천이며, 연세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인디애나 주에 있는 에반스빌 대학교 사학과에서 수학한 뒤 보스턴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신랄한 사회풍자글을 계속 발표하였다. 유신 이후에는 함석헌이 발행하던 '씨알의 소리'에 노골적인 체제비판글을 게재하면서 민주화운동에 가담하였다. 이런 활동 등으로 학생운동권의 배후조종자로 몰려서 19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얼마뒤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1] 그러나 정권의 압력으로 대학에선 해직되었고, 계훈제 등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나섰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한 이후에 일시 복직했다가, 신군부의 탄압으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면서 또다시 해직되었다.

이후에는 민주화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정치에 냉소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수필이나 신문칼럼만 간간히 쓰면서 칩거하였다. 1984년 6월 정권의 유화조치로 다른 해직교수들과 함께 대학에 복직하였다. 김영삼계김대중계가 손잡고 창당한 신한민주당2.12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면서 단숨에 제1야당으로 올라선 직후인 1985년 4월 난데없이 삼김씨는 정치관두고 고향가서 낚시나 하라는 신문칼럼(일명 낚시론)을 발표하였다. (한국일보 1985년 4월 4일 “나의 때는 이미 지났다”) 양김씨와 민주화세력이 관제야당을 제치고 국민의 지지를 얻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군사정권이 아니라 야당지도자들을 비판하면서 정계은퇴를 요구하는 칼럼은 재야와 지식인들의 큰 반발을 사면서 역풍을 맞았다.

1991년 강경대군 구타 치사사건[2] 때는 수업시간에 그를 열사라고 부르지 말아라. 어린 나이에 뭘 알아서 데모를 나갔겠느냐는 폄하 발언을 하면서 학생들의 큰 반발을 샀다. 연세대생들의 규탄 대자보가 줄지어 교내에 붙자, 교수직을 사퇴하고 학교를 떠났다.

이후 삼김정치 청산과 새정치를 주장하면서 '태평양시대위원회'를 창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한당 창당을 준비하다가, 1992년 현대그룹의 창업주인 정주영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에 최고위원직을 보장받고 합류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강남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정주영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패배하면서 탈당과 함께 정계은퇴를 선언하자, 통일국민당 대표가 되었으나 소속 국회의원이 절반 이상이 탈당하는 등 당이 무너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남은 사람들을 데리고 1994년 5월 박찬종이 이끌던 신정치개혁당과 합당하여 신민당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신민당 내에서 김동길과 박찬종간이 당권싸움이 벌어지자 양쪽다 정치깡패를 동원해서 전당대회에서 각목을 휘두르는 난투극을 벌였다. 박찬종계가 다시 이탈하고 김동길은 신민당을 장악했으나, 이미지는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 김동길과 신민당은 1995년 1월 민주자유당을 탈당한 김종필이 창당한 자유민주연합에 합류하였으나, 이미 정치적인 영향력은 없었다.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전국구 공천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이후로는 극단적인 반공, 반북 성향의 극우 인사가 되었다. 국민행동본부 등이 주최하는 극우행사에 단골 출연자이며, 보수언론과 각종 극우 인터넷매체에 수시로 칼럼을 게재하고 있다. 친일파를 옹호하는 등의 어처구니 없는 칼럼과 정치적 극단주의에 사로잡힌 망언으로 수시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대략 15년 주기로 정치적 스탠스가 변하고 있다. 196~70년대에는 군사독재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던 민주화운동가였다면, 1980년대 이후로는 독재정권이나 집권여당뿐 아니라, 민주화를 주장하는 보수야당과 (진보적)재야까지 구태정치라면서 싸잡아서 비판하는 정치혐오 성향을 보여준다. 이런 관점에서 소위 제3세력을 자처하는 재벌회장(정주영), 기성정치인(박찬종)과 함께 정치에 나섰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채 각목전당대회와 막말로 이미지만 구겼다. 1997년 정권교체 이후에는 반공,반북을 외치는 극단적인 우익으로 치닫아서 자신이 과거에 비판하던 사람들과 함께 온갖 패드립망언을 쏟아내고 있다. [3]

특히 노 전대통령 친족관련 뇌물수수혐의로 검찰조사가 시작되자

노무현 씨는 정말 딜렘마에 빠졌습니다. ~중략~ 국민에게 사과하는 의미에서 자살을 하거나 아니면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서 복역하는 수밖에는 없겠습니다. -출처

라며 자살을 종요하는듯한 글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적어 논란을 빚었다. 또 노 전대통령 국민장 이후엔

자살로 생을 마감한 16대 대한민국 대통령의 국민장은 가히 '세기의 장례식;이라고 할 만큼 역사에 남을 거창한 장례식이었다. -출처

라며 자살자를 비하하고 국민장을 조롱하는 글을 올려 논란을 빚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을 계기로 각종 패드립을 쏟아내다가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이후 종합편성채널이 만들어지면서 그렇고 그런 패널로 종종 나오고 있다. 한 때는 민주화를 이끈 원로로 사회적인 존경을 받았는데 말년이 너무나 서글퍼지는 중.....

2012년 11월에는 사퇴한 안철수 후보를 가리켜서 “만에 하나 18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고 하여도 임기 중에 암살을 당했거나 아니면 견디다 못해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란 글을 자신의 홈페이지 올리면서 또다시 어그로를 끌었다.

평생동안 100권이 넘는 책을 출판했지만, 정작 전공인 역사학 논문이나 저서는 한권도 없다! 모두 수필과 신문칼럼을 모은 산문집들. 문장력 자체는 뛰어나고 사람들에게 술술 읽히는 수필로 한때는 상당히 잘팔리는 베스트셀러 저자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학교수가 전공 논문 한편 없다는건...당시 수업들은 사람들 이야기에 의하면 수업시간도 한학기 내내 전공과 상관없는 엉뚱한 소리만 하다가 넘어갔다고 한다.

1980년대에는 "이게 뭡니까~~"라는 유행어를 전파하기도 했는데, 당시 신인 개그맨이던 최병서가 김동길 코스프레를 하며 저 유행어로 인기를 끈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실제로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김동길이 강남에서 당선될 때 "최병서라는 친구 덕분에 지나가는 어린이들도 나를 알아보더라. 그래서 선거운동에 매우 유리했다."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으며, 1997년에는 SBS에서 동길 대 동길이라는 콩트 프로그램을 진행해서 화제가 되기도. 최병서가 분한 최동길 교수와 진짜 김동길 교수가 서로 대담을 하는 형식이었다.

평생도록 나비넥타이만 맨 것으로 유명하다. 한참 방송에 많이 나올때는 이게 김동길의 상징이었다. 방송에서 밝힌바로는 미국 유학시절 학칙이 엄해서 학생식당에서도 항상 타이를 메라고 해서,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나비넥타이를 하기 시작했다고.

현재는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사단법인 태평양시대위원회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여담으로, 2016년 기준 89세이지만 독신이다.(…) 마법사 네 능력이 거기서 나온 것이었군 사별하거나 이혼해서가 아니라, 생전 결혼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이다! 당연히 자식도 없다.

7세 위의 누나인 김옥길 씨(1921~1990)는 1961년부터 1979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의 제 8대 총장을 역임하였으며, 1979년부터 1980년까지 문교부 장관으로 재임했다. 그리고 이분도 평생 독신이시다

2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92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특별시 강남구 갑)통일국민당-당선
  1. 어차피 민청학련 사건 자체가 반독재민주화세력을 싹쓸이하기 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몽땅 조작한 사건이라서, 계속 잡아두기엔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컸다.
  2. 이 사건은 백골단 항목 참조.
  3. 이런 점에서 조갑제와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