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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에 정주영이 창당했던 대한민국의 정당이다. 약칭은 국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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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의 창업주인 정주영이 대통령 출마를 결심함에 따라 1992년 1월 창당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같은 해 2월 김동길이 창당을 추진하던 새한당을 흡수하여 정식으로 창당되었다.
재벌출신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인 공약을 내세우고, 최불암(최영한이라는 본명으로 출마), 강부자, 이주일(구리시 지역구 의원)과 같은 인지도 높은 연예인들을 영입하여 창당 한 달만에 1992년 3월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지역구 24명, 전국구 7명 등 31명의 당선자를 내었으며,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했다. 이는 당시 정치권에선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회의적 시각을 보내던 많은 현대그룹 임원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일이 크게 망할려면 처음엔 대박을 치죠
정주영은 이를 바탕으로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하였다. 1992년 가을, 민주자유당 내에서 반 김영삼 계열이었던 김복동, 박철언 등이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여 통일국민당에 입당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투표 결과 16.3%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김영삼, 김대중에 이어 3위에 그쳤다. 정주영은 울산에서도 현대표가 거의 나오지 않은 것을 보고[1] 가히 당황했다고. 현대 일가(임직원 + 가족)의 표만 받고 중도층 표만 받으면 이길거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착각에 불과했던 것이다. 참고로 이 선거는 언론사와 전문업체의 과학적 여론조사가 없던 마지막 선거이기도 했다.[2][3]
상징동물은 호랑이였고. 재벌 회장 치고는 놀라운 공세적인 통일정책[4]과 반값아파트 등의 파격적인 정책, 여성표 획득을 위한 여성정책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었다. 당시 통일국민당이 내건 정책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반값 아파트, 국가보안법 폐지[5], 대학 입학정원 폐지 및 졸업자격제 도입 및 사학 육성, 경부고속도로 복층화, 국민학교·중학교 전면 무료급식(!!!) 무려 18년을 앞서나갔다 ㅎㄷㄷ[6][7], 재벌 해체(!?!?!?)[8] 등등. 경부고속도로 복층화와 사학 육성을 제외하면 십여년 후의 진보정당들보다도 훨씬 공세적이고 파격적이다.[9][10]
당시 민자당의 상징동물은 곰, 민주당은 토끼였다. 슬로건은 "경제 대통령, 통일 대통령". 결과적으로는 토끼, 호랑이 같은 마누라 정치인이 아닌 곰 정치인이 선택된 꼴이 되었다.
이후 정주영은 잠시 선거조작을 주장했으나 김대중이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이에 동참하지 않아 물건너가고, 정주영의 대통령선거 낙선 후 현대그룹 계열사들이 세무조사를 받고 대통령선거법 위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 등의 혐의로 정주영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자, 정주영은 1993년 2월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자신이 제공하였던 통일국민당 당사마저 폐쇄하였다.하..항복!!
이후 소속 국회의원들이 잇따라 탈당하여 민주자유당에 입당함으로서 (최불암이라든가) 통일국민당은 군소정당으로 전락하였으며, 잔류파는 1994년 박찬종의 신정치개혁당과 합당하여 신민당을 창당하였다가 1995년 6월 1일에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에 흡수되어 소멸되었다.
삼당합당 이후 재편된 한국 정치는 보수적인 영남의 민주자유당과 그 후신, 개혁적인 호남의 민주당과 그 후신의 대결구도로 펼쳐지는데 그 사이의 제3(보수, 충청)정당으로서 이전의 민주공화당 - 한국국민당 - 신민주공화당과 자유민주연합 - (국민중심당) - 자유선진당 사이의 맥을 잇는 공화계 정당이라고 볼 수 있다. 또 그의 아들인 정몽준의 국민통합21도 그 후신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부자 모두 망했어요 [11]
다만 통일국민당이 얻은 지역구 24/237석 가운데 충청도에서 얻은 것이 6석이라는 점(충남 4/14석, 충북 2/9석- 참고로 경기도 5/31석, 강원 4/14석)에서 충청정당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호남과 부산, 대전에서 한 석도 얻지 못했고 서울, 경기, 영남에서의 지지가 저조했다는 점을 볼 때 그나마 표를 받은 쪽이 충청, 강원인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정주영의 지지기반은 강원도였으나, 역시 1위에는 실패했다. 또 부산지역에서는 비DJ민주화 세력들이 다수 합류했다가 모두 낙선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괜히 통일국민당이 관권 선거와 지역 구도를 무너뜨리려고 폭로했다가 역관광을 당했던(영남의 YS 지지표가 결집했다) 우리가 남이가 폭로 사건(초원복집 사건)으로 유명하다. 이 당의 존재 의의는 이 마법의 언어를 발굴한(?) 것에 있다고 봐야 할지도.(...)그리고 차화준 의원의 틀니 움짤도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정당이 직접 나서서 스트립쇼(...)를 개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92년 11월 28일 충청남도 대천시(현 보령시)에서 열린 전당대회 때, 정주영의 대선지지 연설을 하려던 김용환 의원이 나오기 전 유흥업소 여직원을 동원하여 스트립 댄스를 보여주다가, 특정 부위를 남겨 놓고 벗으려 할 때 유세를 듣던 청중이 그것을 제지하였다.(...) 보는 사람에 따라 천하의 개쌍놈 혹은 용자 물론, 통일국민당 측은 선거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았다.
2 역대 선거결과
-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 31/299 17.4%
- - 역대 지역기반이 없는 신생정당으로서는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정당이다.[12]
-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정주영 16.3% 낙선
3 관련항목
- ↑ 울산시 동구에서는 46%를 얻어 1위를 하였으나, 그 외의 지역에서는 모두 김영삼에 뒤진 2위였다. 울산 시가지만을 기준으로 하면 약 30%, 울산군(현 울주군)을 포함하면 약 28%를 득표.
- ↑ 하지만 당시에도 여론조사 개념이 없던건 아니라서 한국갤럽에서 13대 대선 예측결과(다만 당시엔 예측조사 공표 자체가 선거법 위반인 관계로 발표는 일본방송을 통해서 했다. 현재와 같이 예측조사를 발표하기 시작한건 1995년 지방선거때부터의 일) 1988년 총선을 앞두고 여러 언론사에서 공동으로 여론조사를 발표하기도 했으며 그 외에도 전화조사를 통해 여론조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민주화된 지 얼마 안되었던 시기이다 보니 한계점은 있었다.
- ↑ 물론 안기부와 집권당은 1987년 대통령 선거부터 해외 전문가들을 불러서 내부 여론조사를 하고 있었다. 이때 이들로부터 조사기법을 전수받아 초보적 수준에서 독자적인 여론조사를 시작한게 현재 새누리당 산하 여의도연구소의 여론조사팀이다.
- ↑ 물론 1989년에 북한에 방북했던 일이나 90년대말에 금강산 관광사업등의 대북사업을 펼친걸 보면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 ↑ 여담으로 시사저널이 주최한 대통령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정주영 회장이 국가보안법 폐지 공약에 대한 질문을 받고서는 "현 헌법에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만큼 종북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공산당도 합법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가 조중동과 민자당으로부터 매카시즘성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 ↑ 참고로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무상급식은 커녕 급식을 하는 학교가 적었던 시절로, 이때는 보수진영은 물론이고 진보진영에서조차도 무상급식 논의가 나오기 전이었고 100% 급식 시행이나 학교급식에는 국내 농축수산물을 반드시 써야한다라는 논의 정도가 나왔었다. 그 만큼 시대를 앞서나갔던 기발한 공약이었던 것
- ↑ '무상급식'은 '배푼다'는 성격이 강하지만 '무료급식'은 당연한 '권리'라는 성격을 지닌다.
- ↑ 참고로 당수가 한국 재벌의 아이콘인 정주영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파격 그 자체였다
- ↑ 이 때문에 2004년 여름 전당대회에서 NL주사파들이 민주노동당을 장악하고 나서 연방제통일 같은 뻘짓에만 매달리자 당내외에서 재벌회장보다도 못한 무늬만 진보정당이라는 비아냥이 속출했다.
- ↑ 현재의 유일한 진보정당인 정의당 조차도 재벌개혁을 주장하지 재벌해체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 ↑ 참고로 정몽준은 13~17대 의원을 모두 울산광역시 동구(울산)에서 지냈는데, (18대 지역구는 서울 동작구) 14대 의원만 통일국민당으로 출마하고 다른 경우는 대부분 무소속이었다. (13대 때는 민주자유당 창당과 함께 입당,14대 대선 이후 통일국민당이 와해되자 재입당한 뒤 신한국당 창당과 함께 탈당했다.17대 때 자신이 창당한 국민통합21의 의원이었고 말기에 한나라당에 입당했으며 지금의 새누리당 의원.) 반면 현대건설의 어느 사장은 이후 "경제와 정치는 다르다"면서 국민당을 뿌리치고 민자당으로 출마해서 당선이 되었고 이후 서울시장이 되더니... 그렇다. 이후의 가카시다.
- ↑ 열린우리당을 들 수도 있겠으나 제3세력이었던 국민당과 달리 여당이었고 탄핵 사태로 인해 후광을 받은 점도 고려해야 한다. 또한 20대 총선에서
이름만 보면 친척관계인국민의 당이 지지율에서 38석, 26.4%(제2당)으로 앞섰으나 국민당과 달리 지역기반이 확고했다는 차이가 있으며 국민의 당의 전신격인 안철수의 진심캠프나 새정치연합을 고려하면 완전한 신생정당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그리고 같은 20대 총선에서 123석, 25.5%(지역구 1당, 비례 제3당)을 얻은 더불어민주당은 지역기반이 없긴 하지만(사실 지역기반을 국민의당에게 뺏겼다.)신생정당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