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청년당

한국 최초의 근대 정당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은 1918년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된 한국의 독립운동단체이다. 당수는 여운형이며 여운형, 한진교(韓鎭敎), 장덕수, 김철(金澈), 선우혁(鮮于爀), 조동호이었으며, 그 밖에도 서병호, 김구, 이광수 등도 관여하였다.

당의 강령은 '대한독립·사회개량·세계대동' 등 세 가지였다.

1918년 12월 독립청원서를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했으며[1] 1919년 1월에는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해 조선의 독립을 요구했다. 또한 도쿄, 연해주, 미주와도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했다.

많은 사람들이 3.1 운동의 진원지는 '민족대표 33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잘못된 통념을 가지고 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3.1 운동의 진원지는 신한청년당의 당수 여운형이 그 배경에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2] [3]

이러한 신한청년당의 활약으로 일본에서는 유학생들이 2·8 독립 선언을, 한국에서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3·1운동을 일으키는 진원이 되었다. 이 단체의 구성원들은 뒷날 1919년 4월 10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축을 이루었다.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들어서면서 그후에 독립운동가 신규식 명령에 의해 자발적으로 1923년에 해체하게 된다.

신한청년당이라는 이름은 1908년에 혁명성공으로 국제사회에서 이슈가 되었던 청년투르크당(터키청년당)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신한청년당 당수 별명이 터키 청년이었다.

  1. 이부분에 대한 배경은 1918년 11월, 윌슨의 특사 찰스 크레인이 중국 상해에 와서 '민족자결주의'를 강연하는데, 마침 그자리에 있던 여운형이 찰스 크레인을 찾아가서 조선독립에 대한 개인면담을 나눈다. 그리고 여운형은 '이 민족자결주의원칙은 조선독립의 희망이 될 것'이라 판단하고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는등, 장덕수를 국내로, 이광수를 일본으로 파견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다.
  2. 여운형 자신은 중국 길림과 연해주에 가서 김약연, 조완구, 이동녕등등 가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대한 배경과 설명을 해주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역할을 했다.
  3. 이러한 사실은 3.1 운동 이후 일본측이 여운형을 일본본토로 초대한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일본측은 여운형이 3.1 운동의 원인을 제공한 요주인물임을 이미 파악하고 그를 일본에 초대하여 여러 고위급 인사와의 회담을 주선하여 조선식민지화가 정당함을 설득하면서 회유하여 독립의지를 꺾으려 하였다. 하지만 여운형은 끝내 굽히지 않고 제국호텔에서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연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