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소설가)

李光洙
(1892년 3월 4일 ~ 1950년 10월 25일)

동경삼재東京三才
춘원 이광수육당 최남선벽초 홍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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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기린이 아니다!

1 소개

대일본제국의대한민국소설가, 시인, 친일파[1]. 는 춘원(春園). 일본식 이름은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대표작은 <무정>과 <단종애사>, <>, <마의태자> 등이 있다.

2 생애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으로 부모님을 포함한 모든 가족을 잃고 고아가 되었다. 동학의 농민들에게 발견된 이광수는 곧 동학에 들어가 서기가 되었으나 당국의 탄압으로 동학이 해체되자 1904년에 수도 한성부로 상경하였다. 상경한 직후, 친일파 송병준이 이광수의 문학적인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이 운영하고 있던 친일단체인 일진회에 이광수를 추천, 이광수는 일진회의 후원으로 메이지 학원으로 편입하여 일본 유학 생활을 시작한다. 메이지 학원에서 수학하면서 시와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한 이광수는 1910년 경술국치가 발생한 직후, 일제의 회유로 메이지 학원을 졸업하고 일시 귀국하여 잠시 교편을 잡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1917년 신한청년당에 가입한 이광수는 신한청년당 활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최초의 장편소설인 무정을 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한다. <무정>은 다음해 단행본을 내어 1만부가 팔렸다. 지금이야 1만부가 장난이지 경성부는 1920년대 말에야 25만명의 인구였고, 1926년까지도 전인구의 99%가 문맹이었으며[2], 1930년에 이르러서도 70~80% 이상이 문맹이었다.[3] 즉 글을 읽을 줄 아는 5~8만 명 가운데 1만 부가 팔렸다는 것. 당시의 책은 사면 3~4명이서 번갈아 보고 헌 책방에서 바꿔 보는 것이 예사였다는 걸 감안하면 초초특급 베스트셀러. <무정>의 스토리 전개로 독자들이 젊은층과 노년층으로 나뉘어서 논쟁도 했다고 할 정도다. 무정의 성공으로 당시 문인으로서의 그의 인기는 단연 톱이었고 이광수는 육당 최남선, 벽초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문인[4]으로 꼽히게 된다. 이후 이광수는 여운형의 추천을 받아서 1919년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가, 독립신문의 발행을 맡는다.

그러나 자금난으로 압박받고 과로로 육신이 피폐해진 이광수는 1921년 2월 16일 애인이자 국내 최초의 산부인과의사인 허영숙을 만난 후 안창호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21년 4월, 허영숙을 따라서 귀국을 택하게 된다. 귀국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인물임에도 총독부로부터 체포되지 않은 이광수는 이때부터 상해임정 요인들 사이에서 이광수가 일제의 스파이인 것이 아니냐는 커다란 의혹을 사기 시작하였고[5] 결국 이듬해 1922년 병크민족개조론을 발표함으로써 사실상 친일파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에서 조선은 열악한 민족성으로 인해 "쇠퇴 또 쇠퇴" 라고 하면서 그 구제의 길은 오직 민족개조운동에 있을 뿐임을 거듭 강조했다. 물론 허술 그 자체인 이론이라 동경유학생 최원순[6], 학자 신상우, 조선일보 논설주필 신일용 등에게 가루가 되도록 논파당했다.[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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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적 경륜

민족개조론에 이어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 을 기고했다가 크게 물의를 빚어 동아일보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그 이후 <재생>, <마의태자>, <단종애사>, <흙> 등 많은 작품을 동아일보에 장편연재를 했다. 1926년에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다시 복직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지내다가 1931년에 퇴사하고 조선일보로 옮겼다. 이후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연재하고 글쓰고 다녔다.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직에 취임해 1934년까지 지냈다. 그러던 중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일제가 그를 투옥하였다.[9]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친일행위를 하기 시작하였는데 1939년 친일 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을 맡으며 스스로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향산광랑)'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고[10][11] 전국을 돌며 강연을 하며 일제의 학도병으로 나갈 것을 독려하는 내용의 연설을 하였다. 그러나 위의 친일행위 때문에 아내와 합의이혼을 하였으며 반민특위 체포자 제2호로 연행되나 아들이 혈서를 쓴 덕과 고혈압 증세가 심화되어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유명세로 인하여 조선인민군에게 당시 말하는 소위 "모시기 정책"[12]의 일환으로 끌려가서 병사하였다.[13][14]

2003년에 북한재북인사릉이 조성되었을때 이장되어 현재 무덤은 재북인사릉에 있다.

3 친일행위

그가 변절하기 몇 년 전, 만해 한용운 선생의 집인 심우장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의 행동거지를 살펴본 만해 선사께서 일갈하시길 "네놈은 반드시 배신을 할 놈이니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는 말과 함께 쫒겨난 적이 있었고 그대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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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향산(香山)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어명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香山光浪)이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내선일체를 국가가 조선인에게 허하였다. 이에 내선일체운동을 할 자는 기실 조선인이다. 조선인이 내지인과 차별 없이 될 것밖에 바랄 것이 무엇이 있는가. 따라서 차별을 제거하기 위하여서 온갖 노력을 할 것밖에 더 중대하고 긴급한 일이 어디 또 있는가. 성명 3자를 고치는 것도 그 노력 중의 하나라면 아낄 것이 무엇인가. 기쁘게 할 것 아닌가. 나는 이러한 신념으로 향산이라는 씨를 창설했다.

(1940년 2월 20일자 매일신보 사설란에 이광수가 '창씨와 나' 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 창씨개명을 적극 권장하는 내용의 글이다.

수양동우회 사건 후에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온 뒤 그는 본격적인 친일행위를 하였는데 시나 소설을 통하여 하거나 아니면 강연을 하였다. 시로는 가끔씩 부른 노래(39.2월)를, 소설로는 진정 마음이 만나고서야(心相觸れてこそ)(1940.3월~7월, 녹기)[15]를 기점으로 친일문학을 시작한다. 내선일체와 조선문학(1940.4, 조선), 지원병 훈련소의 하루(1940.11, 국민총력), 대동아 일주년을 맞는 나의 결의(1942.12, 국민문학), 폐하의 성업에(1943.2, 춘추), 모든 것을 바치리(1945.1.18, 매일신보) 등 103편의 시, 소설, 논설 등을 기고하였다.

그 외 이광수의 친일행적에 대한 자료는 너무 많다. 여기 나열된 것들은 극히 일부의 일부... 일반인이 보통 아는 정도를 훨씬 뛰어넘어 생각 이상으로 매우 심각한 정도다.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들 가운데 내용이 가장 많고 길다!(무려 12페이지나 차지한다. ㄷㄷㄷ)

한국현대사 연구 권위자인 서중석 교수는 '이광수가 쓴 친일문학 작품은 108편으로 이 부분은 문학계 친일파 인사들 가운데 가장 압도적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고 말했다.

이런 친일행위로 인하여 반민특위한테 결국 연행되었는데 당시 변명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친일한 것은 표면상 문제이고 나는 나대로 친일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한 것이다. 내가 친일한 것은 부득이 민족을 위해 한 것이다..." 개소리 집어쳐!!

그리고 이 말을 한 후 같은 친일행위를 한 최린한테 "입 닥쳐" 라는 말까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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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광수는 자신의 친일행위를 변호한 <나의 고백>과 <돌배개>라는 글을 썼는데 이 글에서 다음과 같은 논조로 자신의 친일행위를 변호하였다.

"나는 민족을 위하여 살고 민족을 위하다가 죽은 이광수가 되기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개소리 집어쳐!!

3.1 이광수 본인의 친일동기

이광수 본인은 일본이 근대문명이자 개화된 국가라고 생각했으며 조선 민중들을 개화한다고 생각하였다. 더불어 제국주의가 지배하던 20세기 초반에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제국, 국민국가를 이룬 선진적인 나라는 일본 뿐이니 어차피 해방이 안 된다면 조선인들도 일본인과 동일한 국민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게 그의 입장이다.[16] 본격적으로 친일행위를 하게 된 동기는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자신의 스승 격인 도산 안창호 선생이 사망했을 때였다. 당시 이광수는 매우 커다란 실의에 빠졌다고 한다.

물론 해방이 안된다는 전제하에서 백번 양보해서 본다면 그의 행동이 어찌보면 조선인들을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조선인의 민족성과 정체성을 말살하고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 확보를 위한 점이라는 부분에서 그의 친일동기는 어찌되었든 비판을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은 사실이다. 일본인과 조선인이란 두개의 동등한 집단의 상호 공존을 그가 추구했다면 옹호론도 있었을 수 있었지만 그가 추구한 길은 조선인의 권익 증진이 아니라 그냥 조선인을 없애는 길이었다. 억지로 분류를 해봐도 민족개조론과 민족적 경륜을 자치론을 빙자한 일본국 내의 소수민족 권익운동으로 봐도,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로는 그냥 "조선민족이란 것을 없애버리고 일본인이 되는게 낫다"라는 결론 외에는 확인할 수 없다. 조선 민족이 어려운 것은 조선인이라서 그러니까 일본내 소수민족인 조선인들끼리도 뭔가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군(민족적경륜), 아니 조선인이 일본인이 되면 아무 문제 없어지잖아, 이게 과거의 조선인이었던 현재 일본인들을 위한 길이 분명해(창씨와 나)

그리고 적어도 김동환이라든가 채만식, 최린같이 죄를 뉘우치고 진심 어린 반성하는 자세를 보였더라면 적어도 이렇게 까이진 않았을 거다. '친일파 청산' 이라는 것이 무슨 '살생부' 같은 게 아닌 '반성하는 자세' 를 가지는 것을 중요한 의미로 가지는 건데 말이다.(...)

3.2 친일행위에 대한 옹호와 그에 대한 반박

일부 세력들은 이광수의 친일이 어쩔 수 없었으며 동료 지식인을 구출[17]하기 위한 행동이였고 이광수는 사실 거짓 친일, 실제는 독립 염원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면서 '이광수는 민족의 양심수' 라고 옹호한다. 그들은 '학병을 나가지 않으면 학병을 나가서 받는 것 이상의 고생을 할 것 같기에 나가라고 했다' 는 발언을 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일제가 학병에 나가지 않는 학생은 강제 제적하여 징병, 학병보다 전방에 배치하는 식으로 자발지원을 강제한 면은 있지만 그렇다고 정당화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광수는 빽이 없어서 더 뭇매를 맞았다는 의견 또한 있다. 대표적으로 일제강점기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지낸 박마리아[18] 전국적인 친일 강연을 했지만 스리슬쩍 넘어갔다. 그러나 '전국 강연'과 '기사'는 그 파급력 자체가 다르고, 일단 기사는 증거가 남는다 이광수는 이후로도 난 잘못한 거 없다능!이라며 극구 부인하며 스스로 더 어그로를 끌었다.(...) 애초에 빽이고 뭐고 할 상황이 아니었던 셈. 게다가 창씨개명 명령이 오기도 전에 조선 이름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철저히 일본식 이름으로 갈아버렸다. 애초에 거의 모든 식자를 독자로 거느릴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 친일짓을 하면 그 정도에 관계없이 유명한 것은 당연하다. 뭣보다도 전 국민의 지탄을 받으며 자유당 정권에게도 버림받고 일가족이 자살해서 비명에 간 이기붕의 마누라인 박마리아에게 어느 정신머리 없는 인간이 굳이 빽을 봐줘서 친일파로 비난당하는 것을 막아줄까?

또 한편으로는 이광수만 까이는 건 억울하다라는 의견도 있기는 있지만, 이 의견이 왜 말도 안 되는지는 다들 잘 알것이다.

그리고 이광수는 1948년 작성된 '친일파 군상' 에 '광병적(狂炳的) 친일급 열렬 행위자' 로 분명히 규정되어 있다.# 같은 열렬한 친일급 인사인 김동환은 그래도 뒷날 사죄의 뜻을 밝히고 참회하기라도 했지...

하지만 아직도 이광수의 작은딸인 이정화는 잊을 만하면 신문지상에 나와서 "나의 아버지는 민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라고 항변을 하고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을 팔아먹으면서까지도. 지못미 안창호 선생님. 이는 2014년 현재도 다를 바가 없어서, 2014년 10월 13일 조선일보 인터뷰에 등장하여 "아버지를 미워하는 분들께 사과를 드린다"라는 말로 아버지의 친일행적에 대한 변을 남겼다.[19] 한국 좋으라고 한 일인데, 나쁜 나라 취급받아 억울하지만, 일단 사과 한다는 뉘앙스가 딱 일본우익 스타일이다

90년대 후반에 <월간중앙>을 통해서 발표한 재미 의사[20]는 열렬한 이광수 지지자로서 조정래를 제외한 이광수 비판자들을 까는 서적인 <춘원을 위한 변명>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에 의하면 이광수는 일제가 조선인 수십만명을 학살할 계획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한 것이라고 한다. 생체실험 등의 일을 벌인 일본으로서는 연합군의 본토 상륙시 그런 일을 충분히 벌일 개연성은 있다. 사실 보도 연맹도 일본에서 만든 걸 표절 참조한 것을 본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 정도 기밀사항을 춘원 정도가 알 수 있었을까? 아무리 일본군이 막장이라고 해도 일개 소설가에게 군사 기밀을 흘릴 정도의 병신집단은 아니다(...) 게다가 이광수가 친일을 한다고 학살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또한 이 책은 임병직과 임종국도 구분 못하고 동학 혁명이 언제인지도 모를 정도로 오류가 많은 책이라 순순히 믿기엔 여러가지로 무리가 많다.

4 대표작

5 문학사적 위치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개화기~일제강점기 문학가이지만 작품 내적으로는 그다지 평가가 높지 않다. 작가의 최고 대표작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장편소설인 「무정」 역시 작중 인물의 무의지적인 행동에 의한 전개와 계몽이라는 새로운 가치로 내세우는 문명 개화와 신교육이 그저 가능성으로만 제시된다는 점에서 이전의 신소설이 가지는 한계를 개선하긴 했지만 극복하진 못한 과도기적 작품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즉 「무정」으로 인해 근대소설이 확립됐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첨병 정도의 역할이라는 것.

그리고 앞서 서술한 대로 「무정」이 어마어마한 대박을 친 것에 고무되었는지 점점 계몽은 내다버리는 것 통속 작가적인 면모를 띠게 된다. 이는 「무정」이후 발표된「개척자」,「재생」,「유정」,「사랑」등의 작품들이 모두 삼각관계를 도식화한 애정소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나마도 1925년에 발표한 「재생」은 일본 신파소설 「장한몽」을 그대로 베꼈으며 나도향의 장편소설인 「환희」와도 매우 흡사하다. 아니 비슷함의 차원을 넘어 그대로 가져다 썼지만 이광수 본인은 평생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정신승리 주장. [24]. 번안소설은 저것 뿐만이 아니라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일본 작가가 번안하고 그걸 다시 이광수가 번안해서 ' 여자의 일생' 이라는 제목으로 내놓기도 했다. 연애소설과 같은 통속소설말고도 「흙」과 같은 계몽소설을 쓰기는 했지만 이것도 당시 농촌의 현실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농촌계몽의 이념을 그저 지식인의 입장에서 시혜적인 시각으로 떠들고 있기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반면 이광수의 등장을 한국현대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장석주의 "나는 문학이다"에서는 "이광수는 전.근대에 머물러 있던 서사문학의 내적 문법을 바꾸고 현대성을 수혈하면서 비로소 한국어가 자아와 세계를 동시적으로 포획하는 현대소설에 적합한 문자라는 사실을 증명해낸다. 현대를 향한 다양한 줄기들은 이광수에게 와서 하나의 큰 흐름을 이루었고, 그것은 그대로 한국 현대 서사의 장강長江이 되었다. 이 장강에 기대 한국의 서사문학은 꽃을 피웠다. 이광수는 한국 현대 서사문학이 발아發芽하는 기점이자 여명의 외침이고 아울러 무시무시한 빅뱅이다. 이광수라는 빅뱅을 겪지 않았다면 한국 서사문학의 밤하늘을 찬연하게 수놓는 성좌星座는 아직 없었을지도 모른다."라는 평가를 내렸고, 김윤식 또한 그의 저서 "이광수와 그의 시대"에서 이광수의 작품세계를 한국근현대문학사에 큰 비중과 의의를 가진 것으로 접근 및 평가하고 있다. 다만 다른 글에서는 "만질수록 덧나는 아픈 상처와 같다"며 이광수의 애매한 입지를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나 중국의 루쉰 같은 최초의 근대소설가 들을 예료 들면...저 두 사람이 세계문학사에 이름을 남기고도 남을 인물이긴한데... 이쪽이 시원찮은 것도 있고...

추가로 2000년대 초반 진행된 20세기 한국 문학사 10대 사건 및 100대 소설 선정 투표 #에서 이광수는 전 부문에 이름을 올렸으며, 특히 논쟁 사조 분야에서는 "이광수의 등장" 자체가 10대 사건 중 하나로 뽑혔다. 이런 것을 볼때 이광수 평가에 과장이 있었을지언정, 그가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단 것을 부정하긴 힘들다.

6 이야깃거리

얼굴형이 서구적인 미남[25]으로 얼굴이 잘생긴 인물에 꼽혔다. 일제강점기 당시 얼굴 잘 생기고 머리 좋고 글 잘쓰는 그야말로 대스타였던 것. 당시 잡지를 보면 이광수 씨가 최근 집필하는 소설이 무엇이고 이광수 씨 집안 인테리어가 어쩌고 하는 글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걸음은 못나게도 안짱다리 걸음을 걸었다고 한다.[26]

연애사와 가정사가 복잡한 편인데 첫번째 아내인 백계숙과 합의이혼했고 신여성과 자유연애 끝에 당시 엘리트이고 이름난 산부인과 의사허영숙과 재혼했다.[27] 여기까지는 당시 엘리트들 사이에 흔한 일이었지만 허영숙과 사귈 때 당시 신여성이었던 나혜석양다리를 걸쳤다는 것(...)이 화제가 되었다. 말하자면 이광수는 나혜석과 새롭게 연애를 시작했을 때 허영숙과 헤어지지는 않았고 둘 다를 애인으로 두려고 했다. 허영숙에게는 화요일과 목요일에만 오라고 하고 나혜석과는 수요일과 금요일에만 만나는 것으로 날짜까지 정했는데 이광수는 정해진 요일이 아니면 만날 수 없다며 꼭 그 요일에만 만날 것을 요구했다고. 이걸 안 허영숙은 당연히 펄펄 뛰었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강요 때문에 결국 허영숙을 선택했다.[28]

여운형 딸의 회고에 따르면 여운형이 출옥 후에 집에서 요양하고 있는데 변절한 이광수는 뻔뻔하게도 병문안 한다고 여운형을 방문했고 여운형은 소화불량증으로 고생하는 중이었는데도 열 받아서 찬물을 연거푸 들이키며 그를 외면했다고 한다. 이광수는 여운형이 기분 나쁜 걸 알고 나갔고 그가 나간 뒤 여운형은 그를 일컬어 이스카리옷 유다, 배신자라며 신나게 깠다고 한다. 임정시절만 해도 이광수는 "한천에 비를 내리고 고목나무에 꽃을 피울 정도로 탁월하다" 고 여운형을 극찬했으니 배신감이 유난히 컸을 것이다. 참고로 뉴라이트 교과서에서 친일로 규정하였다. 뉴라이트에게마저도 버림 받은 이광수.

이순신을 소재로 소설을 쓴적이 있다. 읽히기는 무정이나 흙같은 대표작들보다 훨씬 잘 읽힌다.[29][30] 그리고 도산 안창호 일대기를 서술하기도 했다. 흠좀무 이유야 어떻건 도산 선생을 가장 존경했으니.

또 충격적인 사실 한 가지는 Y소설을 지었다는 점이다(...) 이광수는 일본 메이지 학원 유학시절 학원 내 발행물 『백금학보』에 「사랑인가」라는 제목의 단편소설 하나를 투고한 적이 있다.[31] 그뿐만이 아니라 1918년에 기고한 「윤광호(尹光浩)」라는 소설은 조선인 유학생 간의 동성애를 다루고 있으며 최초의 현대 한글 Y소설이라는 타이틀을 지니고 있다. 무정에서도 좀 묘한 대목이 나온다. 주인공이 잘나보이는 자기 사촌들하고 같이 자고 싶지만 꾀죄죄해서 따돌림 당한다나... 여러모로 충공깽.

참고로 일제의 식민지배가 1987년까지 계속된다고 가정한 대체역사소설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에서는 창씨개명한 이름인 가야마 미쓰로로 언급된다. 설정상 단종애사, 마의태자, 원효대사 등의 소설을 몽골의 항해왕조라는 가상 왕조의 연작소설로 바꿨다고 한다. 작품에서 주인공인 기노시타 히데요는 이광수가 한 "나는 역사를 믿는다"[32] 는 말을 두고 "역사를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라고 비판하는데... 최근의 작가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의심스럽다.

우스개소리로 "이광수는 뭘 썼을까요?" 란 질문의 답이 "안경을 썼습니다" 라는 옛날 개그가 있다(...)[33]

춘원에 대해서는 나름 극화가 잘 된 편인데 구치소를 섭외해 TV 문학관 사상 최초로 스튜디오 촬영을 한 단편 <무명>의 경우는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김흥기 씨가 이광수 코스프레를 하고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으며 선우휘 원작의 <묵시>에서는 이광수를 연상시키는 인물로 민욱 씨가 열연하고 있다. 대하 드라마 백범 김구에서는 잠깐 故 태민영 씨가 나온다.[34]

아예 춘원 자체를 그린 작품으로는 MBC에서 방영된 2부작 드라마가 있었는데 여기서 문성근이 춘원으로 나오고 이은경이 허영숙으로 나온다. 전반적으로 계몽주의자에 일제에 투항한 후에도 자살 직전까지 갈 정도로 정신이 피폐해진 지식인으로 나온다. 주인공 보정.

반공작가 선우휘는 이광수의 친일행위를 다룬 소설 '묵시' 를 썼는데 주인공의 선생은 이광수의 친일행위가 '희생양'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가족들 가운데 현재 생존자는 둘째딸 이정화 교수가 있다. 이정화 교수는 6.25 전쟁 이후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며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다. 1998년까지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분자생화학 박사로 1980년대에 4차례 한국의 대학에 초빙교수로 오기도 했다고. 아이러니하게도 이정화 교수의 남편은 인도인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매국노의 자제와 독립운동가의 기묘한 결혼(...)
  1. 이에 대해서 '대표적인 타협적 민족주의자로 급진적 독립노선을 포기하고 외적으로는 일본에 협조하며 내적으로는 자신을 계발하여 조선인의 권리를 얻어내어 선진화되자는 것을 주로 주장하였다. 즉, 매국형 친일파는 아니며 친일파 항목의 서술된 개화형 친일파에 가깝다.'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광수는 이중에서도 광신적 친일파로 꼽힌다. 단적으로 개화형 친일파가 매국 소리 안들었던 것은 일본의 목적이 한일병합에 있다는 것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았던 시기 정도이고, 이후에는 이걸 받아들이냐 거부하느냐로 확연히 갈라진다. 애초에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도 추종하면 모를까 정통 역사학계에서는 이광수가 활동했던 시기의 한반도 정말로 독립을 바라면서 자치론을 주장한 인물들이 존재하기는 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이 '타협적 민족주의' 혹은 '민족주의 우파' 혹은 '민족개량주의'라는 이들 치고 친일하지 않은 인물이 없다. 즉 민족개량주의를 단 한마디로 요약하면 어차피 독립이 될 가능성은 없으니까 일본인으로서 잘살아보자로 요약된다. 이걸 안창호와 비교하면 단적으로 드러나는데 안창호는 독립을 포기한 적이 없다.
  2. 물론 일본어 문맹을 기준으로 삼은거지만 사실 한글 문맹을 기준으로 삼아도 여전히 인구의 절대다수가 문맹인건 마찬가지이며, 어차피 당시 신문 등 출간물들은 한자범벅이었기 때문에 한글을 알아도 한자를 모르면 신문과 잡지 같은 당대 출간물을 읽기가 힘든 건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별 다를 건 없었다.
  3. 실제로 남이든 북이든 간에 현대 수준으로 문맹률이 급속도로 줄기 시작한 건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까지의 일이다.
  4. 참고로 말하는데, 이 3대 천재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홍명회, 이광수, 최남선은 같은 시기에 동경유학을 하였고, 양건식과 신형철들이 이들을 동경삼재라고 불렀다.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는 유학생 중에서 유능한 인재들이란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들이 귀국하면서, 잡지 소년에 함께 글을 기고하면서 동경삼재라는 이름은 (일제시대하) 조선삼재로 변했다. 이들은 모두 문인으로, 문학계에서 칭찬삼아서 붙여준 별명이었던 것 같다. 다만, 명칭이 이런 식이고 모두 뒤끝이 좋지 못해서(최남선과 이광수는 친일, 홍명희는 모시기로 입북), 그럼 왜 세종대왕이나 정약용 대신에 이런 인물들이 있느냐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5. <한국 근대사 산책 6권> p298
  6. 최원순은 '열악하다는 조선인의 민족정의 실체가 무엇인가' 하고 반문하였다. 이어 '그리고 설사 이러한 현상이 있더라도 이는 조선인의 고질적이고 유전적인 것이 아니다' 라고 비판을 가했다.
  7. 이병주의 유작에서 친일로 전향하는 주인공의 중 2병 이론이 바로 이 민족개조론을 패러디한다.
  8. 민족개조론은 안창호의 이론에서 출발하긴 하였으나 안창호의 이론은 착실히 대비해서 결정적 순간을 노리고 결과적으로는 독립 전쟁을 준비하자는 내용이다. 이광수의 동족혐오에 가까운 민족개조론과는 다르다.
  9. 감옥 생활을 무대로 한 단편 무명이 바로 이때를 소재로 했다.
  10. 향산이란 성은 일본 나라현 카시라하시에 있는 향구산(香久山: 가구야마)에서 딴 것이다. 이광수는 진무 덴노가 카시하라시에서 처음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카시하라시에 있는 향구산의 이름을 성씨로 택했다고 선씨고심담(1940.01.15, 매일신보)에서 밝혔다. 향구산은 일본 나라 시대에 궁궐 후지와라쿄(藤原京)를 둘러싼 야마토 3산 중 가장 신성한 산으로 숭앙받았으며, 만엽집 등에서도 자주 언급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런 역사적 가치/종교적 가치를 인정하여 향구산을 '역사적풍토보존지구'로 지정하였다. 다만 일본서기 등에 따르면, 진무 덴노가 처음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 곳은 야마토 3산 중 하나인 우네비산(畝傍山 무방산)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름 '광랑'은 미친 개 본명 광수를 일본식으로 고친 것이다.
  11. 사실 상당수 창씨개명한 사람들도 어떻게든 자기 본래의 성을 남기려고 했던 것에 비하면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12.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 진주한 조선인민군은 유명한 사람들을 "모셔가는" 짓을 많이 했다. "전쟁이 났으니 선생님을 안전한 후방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라고 하고 회유하다 말 안들으면 그냥 납북시키는것. 개중에는 끌려간 사람도 있고, 전쟁과 분단을 장기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냥저냥 따라간 사람도 많다고 한다.
  13. 벽초 홍명희가 나름대로 친분을 생각하여 김일성에게 부탁, 강계에서 근처에 있던 인민군 병원으로 옮겨주었으나 사망. 사실 납북된 후 폭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정지용보다는 편하게 갔다.
  14. 80년대만 해도 중국에 끌려가서 사망설, (80년 현재) 나이가 많아서 작품 활동은 안하고 편히 산다는 설, 무뇌봉문예봉 유혹설, 모모 어용단체에서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 숙청설(퀴즈 아카데미에 문제가 나왔다) 등이 있으나 최근에는 이 설이 맞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광수의 아들이 후일 북한을 방문해서 공식적으로 확인.
  15. 제목 자체가 어색한데, 원제 작품 자체가 일본어로 작성된 일본어 소설이라 일본어 제목이 원제라서 한국어로 번역하다보니 그렇다. '마음이 서로 만나고서야'라는 제목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인의 마음과 일본인의 마음이 서로 만날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본격적인 친일의 주제를 담고 있다. 사랑을 위해 고난을 이겨내려 하는 일본인과 조선인 남녀 커플 2쌍(타케오-석란, 충식-후미에 커플이 주인공인데 충식과 석란이 친남매고 충식과 타케오는 친한 친구다.)을 통해 '내선일체'론의 정당성을 호소하는 내용의 멜로 소설이다. 원래 장편소설로 기획되었는데 월간으로 1장씩 5장까지만 연재되다가 중단된 미완의 장편소설이나, 이미 5장 내에 충분히 내선일체에 대한 많은 논리가 서술되어 있어 서사적 완성을 떠나 친일적인 내용의 홍보를 위해서라면 뒷부분이 없어도 무방했을 수 있는 작품이다.
  16. 1차대전영국이 자치권 약속해놓고 인도인들 이용한 다음에 입씻기 전까지만 해도 마하트마 간디도 이런 주장을 했다. 하지만 이용만 실컷 하곤 180도 돌변하질 않나 암리차르에서 비무장시위대를 썰어내지 않나 영국의 병크를 보고 완전 독립을 부르짖게 된다.
  17. 야담이지만 독립운동하는 청년들을 잡아와서 "네가 친일 글을 쓰면 풀어주고 아니면 고문을 하거나 감옥에 집어넣겠다"고 협박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괴로워하다가 글을 썼고 나중엔 마약까지 손을 대었다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광수의 과하다 싶게 많은 친일작품의 수나 해방후의 자기옹호 등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갈 수 있다. 물론 야담이다.
  18. 그 당시 교수의 유명세는 지금과는 달랐다. 막말로 이승만이 박사 학위를 땄다고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이승만의 이칭이 '이 박사'로 불리던 시기다
  19. 그리고 정확히 1주일 뒤에 前 광복회 회장인 김우전 씨가 "(이광수의) 학병 권유 연설을 직접 들었다. 나는 춘원의 고민을 느낄 수 있었다"라 이야기하며 이광수의 딸 이정화 씨를 만나보고 싶다고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20. 춘원의 아들의 친구이다.
  21.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소설이다. 1929년에 발표되었으나 단행본은 사후 한참 뒤에야 발간되었다.
  22. 연재와 동시에 화제가 되어 1918년 연재가 완료된 동시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23. 1933년에 발표되었으나 단행본은 역시 사후에 전집으로 발간되었다.
  24. 「재생」의 간략한 줄거리 : 신여성인 여대생 순영은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된 가난한 청년 봉구와 갑부 백윤희 사이에서 갈등한다. 순영은 봉구와 사랑을 약속했지만 백윤희의 물질적인 구애에 결국 그의 첩실이 되는 길을 택한다. 순영의 배반에 좌절한 봉구는 학업을 때려치우고 미곡상의 점원이 되어 돈 버는 방법만 골몰하고 결국 거부가 된다. 하지만 봉구는 순영을 잊지 못하고 그녀를 그리워한다. 한편 순영은 백윤희 첩실로 살다 그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자살한다. 봉구는 순영의 시체를 껴안고 그녀를 용서하며 장례를 치뤄준다.
  25. 즉, 당시 말로 벽안홍안(碧眼紅顔)
  26. 출처는 별건곤 제 63호의 각계명남명녀(各界名男名女), 뒤로 본 인물학(人物學)
  27. 그런데 이게 상해 임시정부 활동시절에 일어났다. 임정 사람들은 이광수가 독립운동의 의지가 약해져서 허영숙을 사귀더니 임정을 버리고 그녀와 서울로 도망친 것으로 생각했고 따라서 이광수는 배신자라고 인식되었다. 일례로 임정 인사였던 안창호는 일경에 붙잡혀서 서대문형무소에 갇혔을 때 그가 넣어준 사식을 거절했다.
  28. 그런데 허영숙은 '별로 남에게 뒤지지 않게 많이 했다' 며 3명과 나눈 동성연애기를 털어놓을 정도였다. 즉 양성애자였던 것인데 전세계적으로 보더라도 여권이 빠르게 신장하는 시기에는 여성 동성애가 페미니즘의 일환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남성에 의존하지 않는 여성의 형태라고 생각하기 때문). 이는 일본의 메이지 시절에도 비슷하게 나타나며 뛰어난 재능의 여성에게는 레즈비언이라는 의혹이 자주 따라붙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허영숙도 이런 부류였을 가능성이 높다.
  29. 물론 내용은 조선 문관들을 무진장 까고 조선 사람은 이순신 말고는 다 겁쟁이에 쓰레기이며(가끔 용감한 사람이 나오긴 하는데 꾀가 없거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금방 죽는다) 이순신 장군은 일본 장수들과 삼국지연의 식으로 대결하여 명장의 경우엔 후히 장사 지내준다는 식으로 쓰여진 문제가 많은 소설이었다. 다만 글은 좋아서 팔리기는 많이 팔렸다.
  30. 지금 기준으로 보면 고증이 좋지않다. 노량해전에서 조/명 연합군이 2백이 죽고 수십척이 침몰했다는 이야기가 버젓히 나온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지금 기준이고 제대로 된 사료 구하기도 힘들었을 그 당시를 생각하면 상당히 신경을 많이쓴 편이다. 읽어보면 징비록은 참고한 게 확실하고 나름대로 사료를 찾아본 듯 하다. 고증문제나 조선까 기질은 역사학자인 신채호가 쓴 역사소설들도 장난 아니라는 걸 생각하면 작품만 가지고 비난하긴 좀 그렇다.
  31. 문길이라는 한 소년(중학생)이 동급생 미사오를 연모해 러브레터를 보내고 혈서까지 쓰고 난 뒤 귀국 바로 전날에 그를 만나러 시부야에 가서 하숙집을 찾아갔으나 미사오가 보여지지 않자 거절했다고 생각한 나머지 철도자살을 꾀한다는 내용. 조선인 학생이 일본인 학생을 동성애적으로 사모하는 내용을 통해 친일적 시각을 드러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시대를 앞서간 헤타리아...?
  32. 실제로 자신의 친일행위를 비판한 친구에게 한 말이다. 믿긴 뭘 믿어(...) 역사는 그의 생각을 야멸차게(?) 배신했다. 아니, 그가 역사를 배신하곤 헛소리 했다는 시각이 맞을 것이다.
  33. 이 개그는 김동인 버전으로 나오기도 한다.
  34. 여기서는 간도 참변에 가슴 아파해서 일제에 투항하는 걸로 처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