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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구 (金九) |
아호 | 백범 (白凡) |
본관 | 안동 김씨 |
초명 | 창암, 창수, 구(龜) |
출생 |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 |
사망 | 1949년 6월 26일 |
출생지 | 조선 황해도 해주부 백운방 텃골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자유시 종로구 평동 경교장 내 |
종교 | 개신교 |
분야 | 정치, 사회 |
가족 | 아버지 김순영, 어머니 곽낙원, 부인 최준례, 장남 김인, 차남 김신 |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파일이 없음 |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重章) 수여자 | |||
강우규 | 김구 | 김규식 | 김좌진 |
김창숙 | 민영환 | 서재필 | 손병희 |
신익희 | 쑨원 | 쑹메이링 | 안중근 |
안창호 | 여운형 | 오동진 | 윤봉길 |
이강년 | 이승만 | 이승훈 | 이시영 |
이준 | 임병직 | 장제스 | 조만식 |
조병세 | 조소앙 | 천궈푸 | 천치메이 |
최익현 | 한용운 | 허위 | 박정희 |
1 소개
파일:양심건국.gif
위의 사진에서는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쓰여있다.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동학농민운동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됐다.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에서 아버지 김순영, 어머니 곽낙원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구안동김씨의 익원공파이나 떵떵거리는 집안은 아니였고 평민 수준의 가정생활을 하였다. 유년시절 이름은 김창암이었으나 1893년 18살에 동학에 입교하면서 이름을 김창수로 바꿨고, 이후 1912년 37세 때 비로소 김구로 개명했다. 구 자도 임시정부 시절 龜에서 九로 바꾸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정치인. 독립유공자로서 그 중에서도 지대한 영향력을 가졌던 인물들 중 한 사람.[2] 각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과 처음을 이끌던 지도자였고 해방정국 당시 우익 진영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했다는 점에서 흔히 이승만[3]의 라이벌으로 회자된다.그리고 최근엔 이념에 더 큰 비중을 두어 여운형 김규식 박헌영 김일성 등과의 경쟁구도도 재조명되고 있다.
여러 여론조사에서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독립운동가에서 꾸준히 1위를 하고 있다. 주류 언론은 물론 뉴라이트 성향의 중소매체 뉴데일리도 '백범 김구 선생'으로 부를 만큼 현 대한민국 국민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정치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김구의 알려지지 않은 행보가 하나 둘 발굴되면서 역사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김구를 성역화하는 분위기에서 벗어나 조금씩 김구라는 인물에 대해 객관적으로 보고자 하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암살사주라든지, 해방이후의 백색테러라든지, 치하포사건 등이 그 예시이다. 이 때문에 군사정권의 손에 과대포장된 인물이라는 시각 또한 존재한다.
2 생애
1876년 8월 29일(음력7월11일)에 태어나 1949년 6월 26일에 사망하였다. 김구의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진행되었다.
2.1 유년 및 청년 시절
2.1.1 유년기부터 동학 운동 이후 무렵
본관은 안동. 조상인 김자점으로 인해 대대로 숨어지내야 했던 불미스러운 과거가 있다.
인조대의 재상이었던 김자점은 효종과의 갈등 끝에 북벌론을 청나라에 알렸고 이때문에 북벌에 실패한 효종은 김자점을 처형했다. 동시에 인조의 후궁이자 김자점과 내통한 조귀인(인조 후궁), 김자점의 손자이자 조귀인의 사위 김세룡 등도 함께 처형됐고, 김구의 11대조 김대충은 이후 개성으로 피신했다가 한성 근처라서 다시 황해도 해주 텃골로 낙향해서 양반 신분을 숨기고 살았던 것이다.
태어날때부터 파란만장한 인생의 징조였는지 산모의 생명이 위험할정도로 난산이였다. 온갖 의술과 미신처방을 써도 소용없었고, 김구의 아버지가 지붕의 올라가 소길마를 쓰고 소의 울음소리를 흉내내자[4] 김구가 태어났다고 한다 어린시절 거의 개구장이었다. 여러 애들이 곰보라고 놀리자 식칼을 들고 와서 위협하고, 빨래하는 개울에 물감을 풀어놓고, 아버지의 곤방대를 팔고 남의 밭에서 서리하고, 장난이 거의 망나니급이었다. 그래서 매일 매를 맞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김구의 아버지는 갓을 썼다는이유로 욕을먹고 얻어맞았다고 한다. 이예 분노한 김구는 반드시 아버지를 갓을 쓰게 해주겠다고 복수를 위해 글공부를 했으며 근처 마을 이씨, 강씨들에게 천대받는 것에 분개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입신양명을 할 생각이 있었으나, 당시 과거 제도의 부패와 폐단을 보고 그만두었으며 이지함의 토정비결을 공부하며 사람들의 관상 사주등을 보며 근근히 먹고 살았다. 서프라이즈에서 자신의 관상이 최악의 관상이라고 했다. 동학에 입문하여 동학군으로 활동했다. 동학군이 패배한 후에는 얼마동안 안중근의 아버지인 안태훈의 집에 몸을 숨겼다. 재밌게도 동학활동 당시 그가 지휘하던 동학군을 때려잡은 사람은 바로 안태훈이었다. 덧붙여 나이가 비슷했는데도 불구하고 안중근과는 별로 친하지 않았다고 한다.
안태훈에게 보호받은 건 약 1년 정도인데, 이 때 이후로도 계속 안태훈의 집안과는 친분을 유지한 듯하다. 일단 안중근의 사촌동생인 안명근과 김구는 아는 사이였고, 나중에 김구의 장남과 결혼한 여성이 안태훈의 차남의 딸이다. 그리고 안태훈의 3남인 안공근은 김구의 측근이었다고 한다.
이 탓인지 1930년대 말,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이 자기 아버지의 죄를 사죄하러 다닌다고 하자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고 했다. 국민당의 경찰력을 동원해 살해하려 했다고. 백범일지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어쨌든 이 때 김구는 안태훈의 식객이던 유학자 고능선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2.1.2 치하포 사건
김구의 첫 흑역사
김구(당시 이름은 김창수)가 무장한 일본 민간인 쓰치다를 살해한 사건. 보통 일반에는, 김구가 명성황후 시해 이후 일본 군인을 죽인 의거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쓰치다는 민간인이었으며, 김구는 심증 만으로 쓰치다를 일본군 또는 간첩으로 오인, 사적제재로 을미사변과 무관한 인물을 살해한 셈이다.
김구는 "국모를 시해한 일본인"을 살해하여 원수를 갚고자 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살해 후 그가 일본군 장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사료 교차검증 과정에서 이 증언 및 기록은 의심스러운 면이 많다. 쓰치다 조스케가 쓰시마 섬의 이즈하라 출신 상인이라는 기록이 있으며, 일본군 장교라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그리고 실제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인물들은 사건직후 일본으로 이감되어 치하포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십수일전까지 구속된 상태였다.
이 사건으로 사형수가 되었으나, 그의 진술 '국모보수'에 주목한 승정원이 고종 황제에게 보고하여 집행 직전 전보[5]로 집행을 막았다고 한다. 목숨을 건진 김구는 인천감영을 탈옥하여 중국으로 향했다.
2.2 해외 독립운동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참여하고 임시정부의 간판을 유지하며 임시의정원 의원, 경무국장(해방이후의 경찰서장과 동급), 임시의정원 의원 재선,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총리 직무대리 등을 거쳐 국무령 및 국무위원, 주석에 취임하기도 했다.
1924년에는 만주 참의부 김명봉, 박희광(朴喜光: 박상만), 김병현 등을 통해 비밀리에 최정규(일진회), 정갑주(여순조선인회) , 배정자(이등박문의 수양녀)등 친일파 암살 계획과 군자금 모집에 깊이 관여하였다.
1930년부터 3년간은 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더 적극적인 항일저항운동을 펼쳤다. 이봉창, 윤봉길등의 독립투사를이 한인애국단출신이라 한다.
이후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하였으며, 1938년 한 차례 암살 위기를 넘긴 후 1940년 기존 임시정부 주석이 병으로 사망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 되었다. 이후 임정에서 축출당한 이승만을 복권시키고 그를 통해 미국과 접촉하여 한반도 본토 해방 계획을 세웠으나 계획이 실행되기 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일본이 항복했으며, 국내진공계획은 무산되었다. 사실 국내 진공했어도 성공 가능성은 거의 0%였다.
2.2.1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 김립 피살 사건
김구의 알려지지 않은 어두운 역사.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2.3 해방 후 정치활동
2.3.1 광복과 귀국, 정치 활동
해방 후에는 임시정부를 견제하기 위한 의도를 가진 미군정의 손에 임시정부 주석자격으로의 귀국이 불허되고, 한참 뒤에야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귀국후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으나 미군정으로부터 임정은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였고, 이미 국내에 여러 정치 세력이 토대를 닦아놓은 상황에서 김구의 입지는 생각보다 좁았다.
민중의 지지를 받긴 했으나, 이미 권력을 다져놓은 이승만과는 사이가 소원했다. 이는 김구가 실질적인 독립운동을 주도한 벌인 임시정부의 중심인물로서 무장 투쟁과도 관련 되었기 때문인데 해방 후의 정치노선으로 갈아탄 대다수의 인사들은 펜과 언변으로 고상한 독립 운동을 한 것을 자랑거리로 여기며 임시정부의 활동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려했다.
또한 김구는 임정 법통성을 지지하였는데 귀국이 늦어짐에 따라 여운형등이 세운 전국구 조직인 인민위원회등이 세력을 잡았다가 이후 미군정을 및 우익세력의 손에 인민위원회가 강제 해산되고 민족진영이 크게 위축된것을 보고는 크게 격분했다고 한다.
2.4 VS 이승만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 된 후 유엔이 남한만에서의 총선거를 실시하려 한민당 세력과 손을 잡고 대세를 탄 이승만은 이를 찬성하고 정읍발언에서 이를 분명히 하였다. 하지만 이후에 김구를 비롯한 민족진영에서는 민족 전체의 총선거를 주장하여 이승만과 서로 다른 견해를 드러내게 된다.
사실 김구가 해방 직후까지도 이승만과 김구의 사이는 매우 두터운 관계였다. 주변인들의 기록이나 증언을 보면 서로 호형호제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로 묘사된다. 해방전까지 김구가 항상 이승만을 '우남이 형'[6]이라고 부르며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임시정부 내에서 발생한 여러 크고 작은 갈등에서 이승만 쪽을 도운 적도 꽤 있다고 한다. 그러나 1946년 장덕수 피살 이후 이승만이 암살의 배후세력으로 김구를 지목하면서, 둘은 사실상 결별하고 만다.
2.4.1 장덕수 피살 후 벌어진 일
한민당 총수 장덕수가 피살되는 일이 벌어지자 미군은 김구를 배후세력으로 지목하며 증언을 확보하려 했다.
이는 김구가 반탁운동을 진행하며 신탁통치의 주체가 될 미군정과 정면으로 충돌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정은 김구를 난폭한 호랑이란 뜻의 'Black Tiger'라고 부르기도 했다.
장덕수가 피살 된 시기, 이승만은 반탁운동을 주도한 비상국민회의를 버리고 한민당과 연합해 독자적 행보를 걷기 시작하였고 정치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한 김구를 배후세력으로 지목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김구는 검찰에게 미군정 재판정에서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이일로 김구는 이승만이 자신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고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는지 사실상 관계를 정리해버렸다.
2.4.2 남북 연석회의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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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19일, 38선에 도착한 김구 일행.
최후의 건곤일척으로서 김규식과 방북하여 김일성과 연석회의를 열어 남북 총선거를 실현하려 했으나 실패, 북한의 프로파간다의 대상이 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7]
김구 본인은 극렬한 반공주의인데다 김일성 암살시도의 배후 [8] 로 지목받아 김일성과는 원수지간 이였으나 이승만과의 사이가 틀어진 김구가 남북협상에 참가하면서 서로를 이용해먹는다.[9] 김구가 이승만의 지지율을 넘기 위해 북행을 결심하게 됐다는 것은 한독당 보고서외에도 여러 인물들의 회고와, 정황에서 드러난다.
장건상이라는 인물에 따르면 김구는 남북협상을 위해 북행하기 직전까지 북한에 가고 싶은 의향이 없다고 밝혔다고 한다. 말년에 이승만과의 사이가 얼마나 소원해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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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보고를 경청하고 있는 해방 직후 북 주석단 모습.[10]
그런데 애초에 남북 연석회의 자체가 북한의 프로파간다를 위한 자리였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왜냐하면 그 때는 이미 남북한 정부 수립은 사실화되었고 애초에 김일성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정부를 수립할 생각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북한영화 위대한 품에서 보면 조롱을 당하는데, 김구가 김일성에게 절을 하면서 자신에게 땅을 몇 마지기 주면 황해도에서 과수원한다면서 반공운동을 한 것에 대해서 죄송하다고 말했다.[11] 이로 인해 김구는 평생 반공주의자로 살았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김일성에게 이용당했다는 오명을 쓰게 된다.
2.5 혁명의용군 사건
1948년에 국회의장 후보로 추천되었지만, 김구가 선거를 포기하여 이승만이 국회의장으로 당선되었다. 7월의 제헌의회에서 대통령 후보에서 지지율 6%대, 2위로 낙선했다. 부통령 후보에서도 역시 2위였다. 이는 김구가 단독선거에 반대하여 한독당소속 정치인들의 국회의원 출마를 금지시키고 출마한 당원들을 쫓아낸 것에 기인한다.[12]
같은 해에 여순사건의 와중에 소위 "혁명의용군 사건"이 일어난다. 이승만은 김구를 이 사건에 엮어서 정치적으로 몰락시키려고 했지만 완벽하게 실패한다.
이승만이 유도하려던 내용은 이승만과 같은 지역구에 출마한 최능진 과 오동기 14연대장이 공모해서 공산혁명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내용인데 막상, 최능진과 김구 사이에 아무런 접점도 없고 제대로 만난 적조차 없던지라 오히려 이승만의 이미지가 악화되고 말았다.
2.5.1 죽음과 장례
효창공원 내부에 자리한 묘역 |
1949년, 사저였던 경교장에서 육군 장교 안두희에게 권총으로 암살당하여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친다. 암살의 배후는 이승만, 김창룡이나 장택상, 심지어 미국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실행범이 안두희란 것뿐이다. 안두희는 50여년 뒤, 버스기사인 박기서의 둔기에 피살당한다.
1949년 6월26일 순국한 그의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치뤄졌으며 해방 이후 최대의 인파가 몰렸는데, 국사편찬위의 연구에 따르면 26일 오후 12시30분께 사망한 후 28일 오후 1시까지 약 75만 명이 종로구 평동의 빈소인 경교장을 다녀갔다고 한다. 유해는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장례가 10일장으로 치러져서 조문객수는 2백만 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사진을 보려면 본 링크를, 국민장 동영상을 보려면 이 링크를 참조하자. 1949년 10대 뉴스 1위였다고 한다.
2.5.2 김구의 복권
김구와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이승만은 역사 속에서 김구의 존재감을 낮추기 위해 노력하였다. 먼저 김구의 백범일지를 금서로 지정하고, 학계에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자신의 업적, 즉 외교독립론을 강조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래서 1950년대 초중고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김구에 대해서 편파적인 인식만 지니고 있을 뿐이다.[13]
김구가 본격적으로 복권된 것은 5.16 군사정변 이후의 일이다. 박정희는 이승만보다 김구를 높게 평가했고, 이승만이 1965년 사망할 때까지 그의 귀국도 거부했다. 특히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에 대해서 격찬을 가했다. 그래서 해방 이후 12년만에 박정희는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였다.[14]
박정희 시절 정권 차원에서 김구를 복권시킨 원인 가운데 가장 큰 이유는, 김구의 차남인 김신이 군사정변의 주요 협력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현재 대중들에게는 김구가 중도적인 스탠스를 가진 독립운동가로 미화됐지만, 사실 김구는 민족주의 색채가 매우 강한 우파 성향이었다. 매카시즘의 등장 이전인 임시정부 시절부터 사회주의 계열을 증오했으며, 특히 해방 이후에는 심하게 배척했다. 즉 김구를 빨갱이로 매도하는거나, 진영에 관계없이 포용력 있었던 사람인 양 미화하는 것 만큼 자신의 무식을 인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김구는 1946년 3월 1일, 북한의 3.1절 기념식에 맞춰서 백의사 요원들을 북한으로 올려보낸 일도 있다. 이들은 먼저 김일성의 외증조부인 강양욱의 집에 폭탄을 투척했다. 강양욱을 노렸으나 강양욱은 살아남았고, 강양욱의 아들 딸 며느리와 강양욱 목사 집에 심방온 다른 목사 및 경비병만 폭사하였다. 김책을 노린 테러는 실패하였으며, 김일성을 직접 겨냥한 폭탄 투척은 김일성의 곁에 있던 소련군 장교 노비첸코가 떨어진 폭탄을 되집어 던져[15]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북한군에 체포된 요원들은 김구, 이승만 명의의 신임장과 고당 조만식에게 보내는 서한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백의사가 김구에게 보고한 김일성, 김책, 강량욱에 대한 암살 계획을 김구가 승인했음을 진술했다. 이는 당시 소군정 문서에 기록되어 남아있다. 도진순[16]의 1997년 저서 <한국 민족주의와 남북관계>에 따르면 김구의 전 약혼자였던 안신호가 김구에게 강양욱 암살에 대해 물으니 김구가 몹시 난처해했다고 한다.
이처럼 1980년대 브루스 커밍스나 리처드 로빈슨 등 한국 현대사 전공자들은 해방정국에서 발생한 각종 암살 사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했다. 이처럼 각종 암살과 백색테러의 배후로 김구를 의심하는 평가는 비단 현대사학자들 뿐만 아니라 미군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김구에 대한 각종 의혹은 김구의 존재 자체를 덮어버리려던 이승만과 의도적으로 미화를 시도한 박정희 때에 쉬쉬되다가 1980년대에 들어 다시 재조명 받기 시작한 것이라 보면 된다.
3 김구의 사상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백범일지 나의 소원 中에서 -
소위 좌익의 일부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 민족주의라면 마치 이미 진리권 외에 떨어진 생각인 것같이 말하고 있다.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어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백범일지 나의 소원 中에서 -
미군정 아래에서 육성된 그들은 경찰을 시켜 선거를 독점하도록 배치하고 인민의 자유를 유린하고 있다.내 나이 73세, 이제 새삼스럽게 재물을 탐낼 것이냐? 더구나 외국 군정 아래에서 정권을 탐낼 것이냐?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1948. 2.) 中 -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이북사람들이 전부 김구를 지지한다. 그래서 내가 대통령이 된다.”“만일 단독정부를 하면 남한에서는 이승만,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되는데 통일적으로 하면 내가 대통령이 된다”
남북협상후 한독당 보고서 내용 中 이철승 박갑동 회고 -
우리가 중국서 뻣뻣한 빵 한 조각으로 며칠씩 끼니 할 때 이승만이 반역자 자금 걷으러 미국 간다 하고선 돈커녕 미국 여자 하나 얻어서 침대서 잠자고 이제 와서 지가 애국자라고 나와?이승만과의 결별이후-
해방 후에 출판된 백범일지의 부록 "나의 소원"에서 이념을 가리지 않는 태도를 피력하여 친좌익적인 인물로 비추어지는 경향이 있는 듯하나, 실제로는 김구는 해방 이전부터 사회주의 계열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임정 시절부터 우파적 태도를 견지한 인물이다. 백범일지에서 공산주의자에 대한 그의 생각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레닌의 방귀구멍을 꿀물 핥듯하는 자들!"[17]. 일단 민족이 있어야 인민 혁명이든 뭐든 한다며 당시 사회주의 계열을 빙 돌려서 깐 부분도 있다. 또한 김립을 비롯하여 자신에게 거슬리는 공산주의자들을 암살하기도 했다. 임정 시절에 김구가 몰두했던 작업이 다름아닌 다른 좌익 운동가들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처음 이 사실을 아는 사학도들을 여러모로 충공깽에 빠뜨리는 부분.
당시에는 공산주의가 세계적으로 대단히 긍정적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조셉 매카시(매카시즘의 선구자)의 등장 이전까지는 공개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는 정치가는 드물었다. 이승만마저도 취임연설에서는 "평화적으로 민주주의 원칙에 따른다면, 공산주의자의 참여를 받아줄 수 있다"고 연설했던 일이 있으며 해방 직후 귀국한 후에는 박헌영을 만나 공산주의 사상을 깊이 존경한다는 립서비스를 해주기도 했다. 물론 폭력에 의한 자본주의 체제 전복과 혁명만이 자본주의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칼 마르크스가 자기 책에 써놨으므로 폭력혁명 노선을 부정하는 것은 어느 정도 노선을 수정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는 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김구는 공산당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소련의 국제공산당에 의지하려드는 것이 친일파와 다름 없는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보았고, 이들의 활동을 임정 주류세력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하고 곱게 보지 않았다. 공산당 활동을 민족해방의 수단으로 받아들였느냐(여운형, 조봉암, 이동휘), 실제 공산주의 이론을 받아들여 민족을 넘어선 사회주의 계급투쟁을 주장했느냐(박헌영) 그런 구분없이 공산당=매국노라고 간주했다.
또한 해방 이후 우익세력(한민당)이 임시정부의 봉대를 주장했던 것에 반해, 당시 조선 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회주의 세력들은 임정봉대를 반대하자 김구는 사회주의 세력을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적으로 보고 우익세력과 합작해 사회주의 세력을 배척하는 데에 앞장서게 된다. 김구가 내세운 임시정부의 정통성에 대해서는 지금도 그렇고 당시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특히 국내 좌익계열은 이러한 주장에 크게 반발했다. 좌익계열은 사실상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한데다, 그나마 한 것도 지하활동으로 구분되는 경우라 일제강점기 임시정부의 활동 앞에선 자연스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단, 지나치게 정통성을 내세우는 김구에 대해 당대에 명성을 날리던 민족변호사 허헌은 김구를 아주 제대로 깠다.[18]
"법통이라는 유행어가 있는데 이는 옳지 못하다. 무엇이 법통이며 법통을 주장하는 자가 누구인가. 김구 일파가 법통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임시정부는 국제사회에서 승인받지 못하였으며, 더구나 임정 간부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이 양반들이 미국으로부터 인정받았다면 미국은 무기대여법을 통해 이들의 무장투쟁을 도왔을 것이다. 임정이 법통을 내세우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일이다."
한편 이승만도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하여, 동시에 민국 연호를 사용했다.[19] 물론 이승만 본인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단 점을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이 민국 연호는 단기와 함께, 이승만의 사퇴 전까지 사용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을 통해 전국(한반도) 인민의 합의를 거쳐 탄생된 정부이므로 그 정통성이 인정된다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3.1운동 참가를 전국 인민의 합의 및 상해 임시정부 찬성으로까지 연관시켜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인 듯하다. 일단 3.1 운동의 참가자 수도 학자에 따라 견해가 다르긴 하되 인구 과반에는 훨씬 모자라는 인원인 데다가, 일제 통치에 대한 반대와 민주주의를 표방한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는 그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3.1 종교
백범 사상의 뿌리는 유가, 도가, 도참가, 무가, 동학, 주자학, 불교 등 동양 사상을 망라한 위에 그리스도교와 계몽주의가 정착한 다원적이요, 중층적이요, 포괄적이라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그렇게 다양한 변화는 전환기를 살았던 젊은이가 보여준 지성적 고민의 단면으로 이해된다. 거기에 평민사상과 행동주의 생활 철학이 마지막 숨질 때까지 백범을 지켰다.-백범 기념관 설명문 '백범 사상의 뿌리'(조동걸)
김구의 종교는 1903년부터는 개신교(감리회)로 봐야 한다. 위키백과에서는 유교 - 동학 - 불교(법명 : 원종) - 개신교 - 천주교(세례명 : 베드로)로 나열하여 개종을 4번이나 한 것으로 나와 있는 혼란이 있고, 일부 문서에도 천주교로 나왔는데 일단 천주교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근거는 1991년 종교신문의 보도로 암살 직전 종부성사를 받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 여러 근거로 나온다... 그러나 김구의 비서 선우진이 당시 안두희에게 방으로 안내한 것이 11시가 조금 지난 시간 이었고 안내 후 미쳐 2~3분뒤에 못 되어 3층에서 총소리가 울리고 총소리에 놀라 당시 비서였던 이풍식, 이국태가 뛰어 올라갔으며 소식을 듣고 달려온 다음 사람이 독립운동가이며 대광고 교장 박동엽과 경비원 2명이 따라 올라갔을때는 12시 40분경이었는데 이미 사망 했다 한다. 그런데 종교신문에서는 10시에 아침 미사를 마친 노기남 대주교가 저격 소식을 듣고 달려가서 도착한 것도 약간 시간상으로 무리인데다가 이것이 사실이라해도 악의는 아니겠으나 임종직전 또는 임종 후 세례하고 병자성사를 한 것이 본인의 본의인지는 매우 의문이다.
2004년 김삼웅의 ≪백범 김구 평전≫에 의하면 사망 전 천주교 개종 내용 자체가 없다... 다만 젊은 시절 개신교 개종 사건은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초기 17세까지는 한학을 배웠으나 황해도 출신에 잔반이라 당연히(?) 과거에 떨어지고 백범의 아버님의 권유로 풍수와 관상학 공부를 공부했는데, 관상학 책≪마의상서≫를 석달정도 볼 정도로 매우 심취 했으나 자신의 관상에 부(富)나 귀(貴)는 하나도 없고, 천(賤)하고 빈(貧), 흉(凶)만 찾아서 실망하고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은게 마음좋은만 못하다는 격언을 떠올리고 마음 좋은 사람만 되자란 결심을 했고, 병서를 보기 시작해서 ≪손자≫,≪오기자≫,≪삼략≫,≪육도≫ 등을 읽으면서 1년여간 마을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마침 19세때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접주가 되어 700여명을 지휘했다고 한다. 동학 운동이후 도피중에 유학자 후조 고능성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년여간 불교에 귀의하여 출가하기도 했다.
김구가 개신교에 귀의한 것은 아버지의 3년상이 끝나고, 약혼자가 급사한 1903년 경인데 1896년 수감생활중에 신문과 도서로 서양문물에 관심이 생긴 영향도 있었다. 1902년경 동학 접주시절 종사였던 우종서를 만나 개신교를 소개 받았고, 1903년 11월 감리회소속 헌트 목사가 황해도 지역을 방문했을때 세례를 받은것으로 추정하는데 1903년말 2주간 평양에서 교리와 성경공부를 했다고 한다. [20]
도산 안창호의 여동생 안신호와 결혼 할뻔하다가 무산되고 11세 연하 최준례와 결혼하는데 미국인 목사 군예빈이 주례하여 개신교식으로 치뤘다고 한다. 그리하여 중반이후부터의 삶은 개신교인이다. 백범 김구의 개신교 개종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가 국권 회복을 위한 본격적 활동을 시작한것도 바로 개신교와 연관되기 때문.[21]
4 외모에 대한 묘사
외모만 봐서는 온화한 학자풍에, 앞으로 대한민국의 길을 군사, 경제적 강국이 아닌 문화적 강국으로 제시하는 등 그냥 지식인스러운 느낌이 들지만 생전의 활동은 투사적인 모습을 더 많이 보였다.[22]
말년에 한복 입은 학자 같은 인상이 강해서 왜소한 체격일것이라 예상하기 쉽다. 그러나 당대는 말할것도 없고 현재 기준으로도 체격이 좋다. 동학 당시 거친 농민군 사이에서 소년이었음에도 접주 역할을 했다는 점, 치하포 사건 당시 성인 남성을 제압하여 살해했을 정도였음을 보면 체격만큼 완력도 좋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구보다 1살 많은 이승만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김구가 머리 반 개는 더 크다. 이승만의 키도 당시 남성 기준으로는 꽤 큰 편인 약 170cm 정도로 알려졌는데, 사진 속 이승만과 비교해 보면 김구는 거의 180cm에 달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는 현재 기준으로도 큰 키인데 당시 체감상으로는 대략 190중반의 장신을 보는 느낌과 흡사했을 것이다.
국내정진군 OSS소속 도노번 소장 옆에 서도 꿀리지 않는 큰 체격을 자랑한다. 젊은 시절의 투쟁 활동은 이러한 큰 체격이 뒷받침해준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왼쪽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노년기의 이미지와, 드라마 등에서 나오는 김구 역의 연기자들이 대부분 굵고 무게감 있는 톤으로 목소리 연기를 하다 보니 실제 김구의 목소리도 이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연설이나 대화할 때의 육성을 들어보면 톤이 높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이다. 느릿느릿 차분하게 정확한 딕션을 구사하면서 논리와 감성에 모두 호소하는 연설 스타일. 1946년 광복 1주년 행사 때의 연설 영상
5 테러리스트 논쟁
김구는 민왕후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 상인을 군인으로 오인하여 살해하였고 복역중 탈출하였다....(중략) 3.1운동후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1928년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다. 이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항일테러 활동을 시작하였다...(후략)- 뉴라이트 대안교과서, 129쪽
2008년 교과서포럼에서 출판된 근현대사 대안교과서[23]에는 일본에 대한 테러 활동을 수행하였다고 나왔는데, 이 내용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자 "백범을 테러리스트로 취급하다니!"라면서 여론이 폭발, 해당 교과서를 집필한 사람들이 비난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이외수와 진중권 등도 이 교과서의 표현에 대해 비판을 가했으며 뉴라이트 계열의 역사 인식이 형편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언론화 하기도 했다.
김구가 독립운동 당시 수행한 일은 단순히 일본 군부에 대한 무장전에 국한되는 것만이 아니라 임시정부 조직, 광복군 조직 등의 체계적인 일이었기에 이 교과서의 설명이 그의 업적 중 일부만을 악의적으로 표현한다고 오해를 살 소지는 충분히 있다. '테러리즘'이라는 용어는 그 사전적 의미와는 달리 '불특정 민간인까지 희생제물로 쓰는 비겁한 행동'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한국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러한 반응이 나온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견해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을 존중하는 입장에서는 테러 대신 의열 투쟁이라는 용어를 써서 폭력을 사용하는 독립운동을 구별하기도 한다. 의열활동과 테러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테러가 다수의 민간인을 목표로 하는 데 비해 의열투쟁은 일제의 주요기관 파괴와 중요인사에 대한 공격이 중심이지 민간인에 대한 공격이 중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한국 내부만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등지에서 일어나는 활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김구의 경우 해방 이후에도 우익 진영에 몸담았으며, 북한의 공산주의 세력을 대상으로 백색테러를 했으며, 남한 내의 민간 좌익 세력 또는 신탁통치 옹호 세력을 대상으로 백색테러를 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 문단에 상술.
"그리하여 침체한 국면을 타개할 목적으로 한편으로는 미국, 하와이 동포들에게 편지하여 금전의 후원을 부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혈남아들을 물색하여 테러(암살, 파괴)운동을 계획하던 때『백범일지』상권을 기술하였다." -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下, 돌베게
"(오사마 빈라덴의)투쟁의 방식이 테러라는 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민족 해방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이해할 부분이 있다. 우리가 존경하는 김구 선생도 테러 부대원이었다." - 오만한 나라 미국, 김승국
"테러 전술이라고 판단한 김구는 특수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를 이끌었고, 이를 계기로 장제스를 만나 한중 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침체된 독립운동을 활성화시켰다." - 교과서에 나오는 한국사 인물이야기, 윤희진
"이 책을 읽는 분에게 -《도왜실기(屠倭實記)》는 원래 김구 선생이 1932년에 주도한 일련의 대(對)일본 폭탄테러 활동의 진상을 중국인에게 알리기 위해 중국어로 쓴 책이다." - 도왜실기 - 범우문고 86, 출판사 서문
"김구의 한인애국단과 함께 테러 활동을 많이 한 남화연맹은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맹렬히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서중석
"윤봉길은 6월 21일, 감옥에서 순국했습니다. 윤봉길의 폭탄 테러로 독립군들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반면, 일본군은 더더욱 불안에 떨었습니다." - (어린이용) 헐레벌떡 어제 오늘 근대 이야기 딱 22장면, 한정영
"김구는 임시정부 활동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의열단에서 벌이는 테러의 방법을 써서라도 침체된 항일의 기세를 높이고자 했다." - 한국사 이야기 21 - 해방 그 날이 오면, 이이화
"목숨을 걸었던 윤봉길의 폭탄 테러는 독립 운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중국 상하이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 초등학생이 가장 궁금해 하는 한국사 100장면, 오주영
"독립운동 선상에서 테러는 무정부주의자나 급진과격파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과거 테러활동의 용사들이 노선전환을 한 이후인 1930년대 초반 백범 김구는 임시정부의 외곽에 애국단을 조직하여 세상을 진동시킨 두 차례의 테러활동을 감행했다." - 대한민국 사(史)2, 한홍구
"이봉창 의사의 개인적 테러는 단지 개인적 행위가 아니라, 임시정부에서 김구가 이끄는 산하조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 중딩고딩을 위한 대중매체 읽고 쓰고 생각하기, 김슬옹
"김구 선생이 해방 이전에 일제에 대해 테러를 쓴 것은 구국의 혈성이 담긴 애국 행위로 높이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테러를 정치활동의 한 방법으로 사용했다면 그것은 문제가고 봅니다." -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 역사문제연구소
위 예문을 보면 알 수 있듯, 김구의 항일활동을 테러활동이라고 기술한 것은 사실 우파들에게 좌익적이라고 한참 욕을 먹었던 금성출판사가 먼저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외수나 진중권이 금성출판사를 옹호한 적이 있을지언정 깐 적은 없다. 이외에도 위의 수많은 인용구에서 알 수 있듯 김구의 독립운동에 '테러'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진보나 자유주의 계열로 분류되는 많은 저자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사항이었으며 오히려 그를 표현하는 일반적인 용어였다.
결국 편싸움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실제로 대안교과서의 기술이 테러리스트라고 한 것처럼 알려진 것은 흑색선전의 영향이 지대하다. 그의 요인 암살 행위는 사전적 의미의 테러 행위가 맞다. 말하자면 해방 이전 일본을 상대로 한 테러와 해방 이후 국내 정치인을 상대로한 테러에 대한 관점의 문제다. 예를 들어 해방 이전에 김산과 같은 인물은 테러리스트라는 의미를 긍정적으로 서술하였다. 하지만 해방 이후 무수히 많은 정치인들이 테러로 죽어가면서 테러리스트라는 용어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조봉암의 경우 김구를 테러리스트라고 싫어했다.
이 논란은 학술적으로 연구된 김구라는 인물과 민족주의와 국부로서 존중받는 이미지의 대중적 김구 사이의 괴리가 컸음을 보여주는 사건으로도 볼 수 있다. 김구에 대한 평전이나 연구자료를 보면 그의 행동을 '테러리즘'으로 표현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대중들에게 각인된 그의 이미지는 이 용어를 용납하지 못할 정도로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그 차이가 커졌던 것이고 이 간극이 이슈화 되면서 용어사용 논쟁으로 비화되었고, 정치권이 이를 적극 이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현대 국제사회에서의 테러행위가 불특정다수의 민간인들을 겨냥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테러'라는 어휘에 이전보다 부정적인 의미가 짙어진 것도 대중들의 인식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의 독립운동 의열투쟁을 포함 근대의 테러행위는 거의 대부분 적국의 국가원수 등 주요인사, 매국노와 반역자, 군인 또는 경찰 등 명백히 적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난 경우가 많다. 이는 20세기 당시의 테러 활동이 부정적인 의미가 강한 현대의 무차별 테러와 구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다만 아래 문단에 서술될 해방 이후의 백색테러의 경우 그 대상이 민간인이었던 데다가, 테러 과정에서 목표로 지정되지 않은 무관한 인물들까지 덩달아 희생되는 경우가 있어서 더욱 문제가 된다.
5.1 백색테러
김구의 본모습 중 하나. 김구는 중도주의자가 아니라 강경한 반공 민족주의자였으며 테러를 통해 거물급 정적들을 제거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사실 현재 한국인이 김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인 평화주의자, 중도적 정치성향, 통일지상주의자, 반이승만 스탠스 등은 어느정도 후대에 덧붙여진 이미지가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김구를 좌파로 보는 시각은 훗날 이승만 지지자들이 말년에 이승만과 부딪쳤던 김구의 행동을 그의 일생에 걸친 것마냥 과장하여 후대에 꾸준히 덧씌운 결과이며, 김구를 중도주의자로 보는 시각은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주장에 반대해 북한과의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한 말년의 행적을 과대 해석한 것이다. 김구는 김일성이 통일정부를 위해 애쓸 거라는 기대가 별로 없었고, 그의 방북은 이승만과의 사이가 틀어지자 감행한 감정적인 측면이 많았다. 다만 말년에 통일 민족정부 수립을 외면하고 분단을 고착화 시키는 단독정부수립으로 자신의 입지를 굳히려 하는 이승만의 반대점에 서게 되다보니 암살된 뒤에 용공주의자 또는 중동주의자라는 왜곡된 이미지가 덧씌워지게 되었다.
또한 알 사람들은 알고 있겠지만 김구는 이승만과 같이, 좌익을 대상으로 백색테러를 펼치기 위한 조직인 백의사를 갖추고 있었고, 테러 활동을 실행에 옮긴 바 있다. 소련 해체 이후 비밀해제된 러시아 국방성 문서를 보면 이는 조금 더 명확해진다.
뿐만 아니라 김구는 김규식, 이승만과 함께 좌익분자들을 억압하고, 우익진영을 강화하기 위한 용도로 미군정청으로부터 3억엔 규모의 차관을 공여받기로 협정을 체결한 바 있다. 훗날 이들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이 비자금의 실체는 밝혀지게 되었다.
비망록에 의하면 이른바 <4金회담>에서 김일성과 김두봉이 김구와 김규식에게 "헌법은 채택하지만 당분간 내각은 구성하지 않고, 김구·김규식 두 선생에게 직위를 부여하고 헌법을 통과한 후 통일정부를 세울 계획"이라고 제의, 두 정치지도자를 회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이 문서의 신빙성이다.김규식은 1946년 정국에서 미군정의 좌우합작 제의 시점까지 자신이 소속되어 있던 민족혁명당 당수직까지 사퇴하면서 해방공간에서 정치적인 활동을 자제하고 있었다.오히려 미군정에서 주목하고 있었던 사람은 해공 신익희였다.신익희는 이미 1946년1월에 북한에 테러공작반을 보낸 의혹을 받고 있었으면서 임시정부의 행동대장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정치자금 문제도 심각하다.미군정청은 김구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적이 없고,오히려 이승만에게 경제보국회등을 동원하여 약1천만원의 자금을 지원하였다.이게 1945년말이고,이승만은 약 2천5백만원의 자금을 확보하였다.정병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해방공간에서 이승만에게 90%의 자금이 지원되었고,나머지 우익인사는 배제되었다.김규식 같은 경우도 10만원이 없어서 생활고를 겪을 정도로 자금난이 심각했고,1946년말에 여운형과 더불어서 좌우합작이 나서면서,미군정의 정치자금이 지원되었다.1947년 남조선입법의장 시절에 극우에 20만원정치자금 수수설에 시달릴 만큼 정치자금이 경색되었다.
해방공간에서 정치자금은 백색테러를 하기위한 극우파단체의 자금원이었다.그러나 해방공간에서 5200만원의 자금을 확보한것으로 추정되는 이승만외에는 김구,김규식측은 자금난에 시달렸다.이승만이 해방공간에서 순조로웠던 이유는 정치자금이 한몫을 차지한다.
5.1.1 독립운동가를 대상으로 한 테러 사주 의혹
신탁통치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백의사라는 테러단체에서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를 암살했는데, 여기에 김구가 관여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만약 김구가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중 적어도 한명에 대한 암살을 지시했다면, 김구를 존경하는 사람 대부분이 김구에 대한 존경을 철회할 것이 확실시될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다. 김구가 직접적으로 지시를 내린것 아니냐고 당시에도 강력히 의심은 되었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은 상태이다.
송진우 암살건 같은 경우에는 미군정이 의심했던 사항이기는 하나,1990년대 김구암살이 재조명될때 다른 점이 발견되었다.송진우같은 경우는 임정 봉대론을 주장했으면 김구 후술하기를 "자신들에게 돈을 되주는 사람을 죽일리가 있냐"고 반문할 정도로 김구 배후론이 의심된다.
송진우는 경교장에 정치자금 900만원을 전달한점과 한민당과 임정을 합당시켜려고 했던 점을 필두로 본다면 김구의 배후설이 설득력이 떨어진다.
김구의 배후론을 주장했던 장택상의 발언의 신빙성의 의문점은 장택상 같은 경우는 임정에 원한이 있었다는 점을 들수 있고,송진우,여운형,암살사건의 배후에 1공화국은 항상 김구배후론을 견지했다는 사실이다.(실제로 1955년 경찰 요시찰요람의 1순위가 한독당이고 2순위가 민전이었다)
이처럼 김구의 암살배후라는 지적의 이면에는 1공화국과 극우진영이 있음을 알수있다.
더구나 미군정의 손에 체범된 한현우가 15년형을 언도받은것과는 달리 1951년 8월에 국회에서 이미 시내를 활보중인것이 확인되었고,이에 법무차관이 체포에 노력중이라고 답변하였다.하지만 한현우는 일본에서 건너가서 살았다.더구나 1994년 다큐에서 한현우는 안두희도 1949년에 방첩대에서 서로 알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다.
이처럼 송진우 암살배후는 장택상이 암살배후는 김구이다라고 말해서 퍼진 경우인데,최근에는 의문이 가는점이 많다.이미 1946년 1월1일의 임정포고령1호라고 부리는 임정쿠데타는 12월29일 계획되었고,한민당에 소속된 서울시내 경찰서장,유력자들은 임정의 포고령이 따르기로 한시점이 12월 29일이다.
송진우는 온건우파지만,임정과 밀착된 관계이다.오히려 이당시 한민당과 긴장관계는 이승만이었다.한현우의 진술중에 김구,이승만이 자신을 의사라고 칭찬해주었다고 하는데,이것은 신뢰하기가 곤란하다.
그러나 김구의 송진우 저격이 확실하다면 1공화국이 김구를 배격하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굳이 숨길필요가 없다.하지만 의혹만이 남아있다.
5.1.2 백의사의 북한 공격 논란
백의사가 1946년 초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간부들을 상대로 암살을 시도했을 때 김구가 이러한 계획을 승인했다는 증거는 많이 나와 있다. 이런 행동이 현재의 시각에서도 테러리즘이라는 문제제기가 있다.
1946년, 북한의 3.1절 기념 행사에서 맞춰 백의사는 요원들을 평양에 침투시켰다. 요원들은 김구와 이승만 명의의 신임장 및, 고당 조만식에게 보내는 서한을 소지하고 있었다. 요원들의 목표는 김일성, 김책과 김일성의 외증조부인 목사 강양욱이었다. 이들은 먼저 강양욱의 집에 폭탄을 던졌으나 강양욱은 제거하지 못한 채 그 가족과 심방 온 목사, 그리고 경비병만 폭사했다. 김책을 노린 테러는 실패했으며, 최종적으로 김일성을 겨냥한 폭탄 투척 역시 실패로 끝났다. 요원들이 던진 폭탄을 소련군 장교가 되집어 던지는 중에 폭발하여, 해당 장교는 한 쪽 팔이 날아갔다.
만약 이 김일성, 김책, 강양욱만 피해를 입고 다른 민간인이 피해를 입지 않았다면 대한민국 입장에선 38선 이북을 불법점거하고 대한민국 정부를 부정하는 반역세력을 공격한 것이고, 정당하지 못한 살인이 되더라도 민간인은 아니니까 테러가 아니라는 주장도 가능해진다. 그런데, 김책에 대한 공격과 강양욱에 대한 공격은 성공했다면 죄 없는 가족도 다칠 위험이 높았고, 실제로도 강양욱의 아들, 며느리, 딸과 강양욱의 지인인 목사가 사망했다.
김구가 계획을 승인한 이상, 민간인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승인한 것이니 테러리즘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김구 옹호세력에서는 어떠한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김일성 김책 강양욱은 못잡았지만 빨갱이 놈들 가족이라도 때려잡았으니 참 고소하단 식의 생각을 사람들이 많이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김구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세력들도 김구의 북폭 승인에 대해선 문제삼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연좌제가 잘못된 것이니, 어떤 사람이 죽어 마땅하다고 해도 가족을 해치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확고해진 현재 김구의 행동은 큰 논란이 될 소지를 안고 있다. 김구 옹호 세력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을 꺼리고 있다.
6 평가
6.1 vs 이승만
라이벌로 비추어지는 이승만을 아주 높게 평가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김구의 평가가 압도적으로 높다. 하지만 이 압도적인 평가는 자료와 실증에 입각한 것 보다는 이미지적인 것에 가깝기 때문에 그다지 객관적이지는 않다. 해방정국 시절 김구의 맹동적인 행보나(송진우 암살설이며...) 임시정부 시절의 좌익 사냥에 대해선 대중들은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김구가 맹렬한 반공주의자였다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다만 미국 안에서만 안전하게 있으면서 외교독립운동을 펼친 이승만과 달리 중국에서 임시정부의 초기와 암흑기, 말기를 모두 겪으며 여러 활동을 펼친 김구에 대한 대중의 평가가 더 낫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뒤에도 나와있지만 이승만의 대통령 이후의 행적이 너무나도 막장이어서 김구가 상대적으로 더 고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이승만의 경우 지나칠 정도로 외교론에 의존한 독립운동을 주장하여 자주성이 없다는 평을 듣는 데 반해[24], 김구는 자주적이다 소리를 듣는데 당장 김구가 줄을 대었던 것이 중화민국의 장제스 총통과 그의 처남인 쑹즈원 등이다. 이승만이 미국에 지원을 요청한 것은 자주성이 없고 김구가 중국에 지원을 요청한 것은 자주성이 있다고 평가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의문이다.[25] 이승만도 국내진공작전에서 OSS의 협조를 얻어 조선인 무장세력을 한반도에 잠입시키는 일을 추진하는 등 무장독립에도 지원을 했으며 항일단파방송 사건 때 광복군의 활약상을 선전하는 방송을 하기도 했다. 김구가 임시정부 말엽에 마련한 한국광복군 역시 그리 자주적 군대는 아니었다. 한국광복군은 장제스의 입김이 굉장히 강해 장제스의 허가 없이는 교전을 할 수도 병력을 늘릴 수도 없었다. 서방 연합국은 장제스가 김구를 지원하는 것을 중일전쟁 종전 이후 장제스가 한국을 괴뢰국화하려는 술책의 일환으로 보았기 때문에 장제스가 광복군을 키우지 못하게 압박했고 이에 장제스는 광복군을 강하게 통제하며 규모를 제한했다. 그래도 장제스가 한국에서 꽤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결과적으로 봤을 때 퍼주기만 하고 마오쩌둥의 손에 대만으로 쫓겨나게 되어 한국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해서인 탓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독립 지원만 거나하게 해주고 그걸로 얻어내려던 건 모두 날린 셈.
그럼에도 이승만의 독립운동이 더 크게 비판받는 것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독립운동단체를 두고 권력싸움을 한 것[26]과 더불어 위임통치 청원 사건이 결정적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사건이 조선을 미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으로 해석되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분노했으며 특히 강경파인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는데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았다."고 분노했으며 이외의 독립운동가들도 이승만의 행동을 단순히 외국에 도움을 받는 것을 넘어서 매국노의 행위로 보아 "우리가 다른 나라에 위임통치 받으려고 죽어라고 독립운동 한거냐?" 분노하기도 했다. 하지만 위임통치 청원 사건에 대한 비판 여론은, 당시의 국제 정세와 국제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일본 식민지에서 미국 식민지로 떨어지는 것이라 오해했기 때문에 나온 비판이다. 연세대 연구 등에선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이 비판받을 이유가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현재야 국제연맹이 공기취급을 받지만 이승만이 인식한 그때의 국제연맹의 위상은 지금과 달랐으며 김규식도 같은 내용을 파리에서 청원한 바가 있다. 자세한 것은 위임통치 청원 사건 문서 참조.
이외에도 김구에 비해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박한 이유는 대통령 재임 시절의 삽질인 반민특위 문제, 6.25 사변 때의 추태, 부정부패, 독재, 3.15 부정선거로 인한 하야로 현대에 그 평가가 최악으로 떨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백범 김구 VS 우남 이승만”
두 사람의 노선들 자체는 모두 독립운동에 필요한 것이었으니 어느 한쪽 노선만을 지나치게 깎아내리는 것은 지양하도록 하자.[27] 외교독립론, 무장투쟁론, 실력양성론이 조화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와 별개로, 해방 직후 김구의 정치력에 관련한 비판도 못지 않다. 김대중 대통령은 사후 발간된 자신의 자서전에서 김구의 생각에 어느 정도 동조하는 부분도 있었음을 밝히고 이승만을 굉장히 강하게 비판하는 편이지만 김구에 대해서 썩 호의적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정치인으로서의 김구는 빵점이었다는 것. 38선이 그어지고 미 군정 치하의 현실적 상황을 타개해 낼 정치력이 부재했고 그래서 결국 뜻을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이철희 소장도 한 인터뷰에서 진보진영이 대체로 높게 평가하는 김구를 본받을 것이 아니라 정치력 만큼은 이승만을 좀 닮을 줄 알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이승만은 무능한 대통령이었지만 적어도 정치력 기술에 있어서만큼은 김구의 몇 수 위였고, 그래서 혼란한 해방정국에서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자신이 이루려 한 소기의 목적을 모두 달성했다는 것.
6.2 진보와 보수진영의 평가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에서 김구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편이다. 양 진영 내부에서도 고평가, 저평가가 갈린다고 하겠다.
진보 쪽 중에서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는 NL이나 민주당 지지층에서는 일평생 민족의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싸웠다는 점과 해방후에도 적극적으로 친일 인사를 등용해 이들을 인력 풀로 활용한 이승만과 달리 그들을 배척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이들의 공유된 '믿음'에 가까우며 사실 김구 또한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친일파를 등용했다. 말년에는 남북협상이라는 타협적 노선으로 선회해 그들의 입장인 평화통일에 부합했다는 점에서 다른 우익인사들과 달리 상당히 고평가하는 편이다. 애초에 김구가 극우란 인식 자체를 별로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 진보란 것이 민족주의와 관련 깊은 것도 있고...
반면 진보 쪽에서도 박노자를 비롯한 진보신당 및 PD 계열이나 강정구같은 인물들은 임시정부 법통론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며 김구에 대해서도 과격민족주의 등 오점을 거론하며 김구를 백색테러범이라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쪽에선 <김구 청문회>라는 책까지 내놓으면서 김구를 "친일파가 만든 민족 영웅"이라며 매우 강하게 비판했다. 사학자들 사이에서도 김구의 임정 시절이나 해방정국의 과격한 행동이 어느 정도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대중들의 기대만큼 우호적이지는 않다.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대놓고 첩과 총잡이를 거느리며 반대파들을 암살했다고 깠다.
보수 쪽에서도 민족주의, 반일을 내세우는 쪽은 김구를 매우 고평가하며 박정희 시절에는 박정희가 이승만을 싫어했던 것도 있어서 대대적인 푸쉬를 받았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자유경제원 등을 비롯한 뉴라이트 계열의 이승만 옹호파는 김구의 단일선거운동이 김일성등의 정치선전에 이용당했다며 비난하고 남북협상에 참여한 것은 과로 보며 최근까지도 김구를 폄하하고 상대적으로 이승만을 추켜올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를 두고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까니 알고보면 중도라는 사람도 있으나 양쪽에서 까는 것과 까이는 인물의 정치 성향은 아무 상관도 없다. 이게 중도인 이유면 히틀러는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이 사이좋게 깠으니 중도인 좋은 사람인가? 또한 이용당했으니 자신을 이용한 사람과 같은 정치성향이었던 것이 아니냐면서 김구를 공산주의자들에게 이용당한 공산주의자라고 까는 쪽도 있는데[28] 역시나 상관없다. 나치에게 이용당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프로이센 귀족과 우익 지도층은 히틀러의 나치당과는 성향이 아주 먼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이 역시나 잘 모르지만 나치는 극좌적인 성격도 강했으며 노동자 권익 운동에도 동참해서 총선에서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사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한국은 좌우 대립이 한국 전쟁으로 이어지며, 거기에 주변에는 4개 강대국, 북한이라는 해괴한 지리적 위치로 인해 좌파와 우파가 다소 특이하게 자리잡았다. 타 국가에선 우파는 민족주의, 좌파는 사회민주주의 계열을 띌 때, 한국에선 우파는 국가주의+신자유주의, 좌파는 사회민주주의+민족주의 등으로 다소 복잡하다. 때문에 같은 진보 진영이라 해도, 같은 보수 진영이라 해도 김구, 여운형, 김규식 등 현대사에서 활약한 인물들에 대한 평이 상당히 극명하게 갈릴 수밖에 없다.
6.3 미국의 평가
해방 정국 당시 38선 이남을 장악하던 미군정에서는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이었던 김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우리는 이러한 정명강간(精明强幹)한 중심인물을 영수로 하고 그의 영도에 절대복종하여 정성단결 되는데서만 우리의 독립은 완성될 것이다. 다른 나라 사람에게서도 얼마던지 그 예를 찾을 수 있으니 의대리(意大利)의 무소리니, 독일(獨逸)의 히틀러, 토이기(土耳基)의 게말파샤, 중국의 장개석, 아라사(俄羅斯)의 스타린 등이 이 각기(各其) 유일무이한 영수가 되여 그의 지도하에 당세는 발전되고 국가운명을 보장하고 있다. 강적을 상대로 하여 일장혈전(一場血戰)을 경(經)하고 우리의 자유를 획득할 중임을 자부하는 우리는 일개 강유력(强有力)한 당과 정명강간(精明强幹)한 영수의 영도가 없어서는 될 수 없다."엄항섭(김구의 최측근, 임정 및 한독당의 선전부장), <한민> 창간호(1936년 3월 1일자), '아독립운동(我獨立運動)의 동향(動向)
특히 미군정은 김구를 무자비(ruthless)하고, 부도덕한(unscrupulous) 인물이이며 이해하기 힘든 인물로 묘사하였다.[29] 별명도 난폭하다는 의미의 "블랙 타이거(Black Tiger)"로 붙였을 정도. 여기에 더해 미군정은 1945년 송진우 암살 당시 그를 송진우의 암살배후로 봤고, 미군정 외에도 미국에서는 그를 송진우의 암살 용의자로 봤다. 대표적으로 브루스 커밍스가 집필한 《한국전쟁의 기원》에 이러한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 1947년 12월 8일 장덕수가 암살당했을 때 현장에서 검거된 박광옥과 배희범은 각각 현직 군정청 경찰관과 현직 초등학교 교사였지만, 한독당의 당원이기도 했다.
미국 제1군사령부 정보장교인 조지 실리 소령의 보고서에 따르면 염동진은 김구에 대해 격렬한 비난을 가하며 동시에 군사적 견지에서 김구의 장점과 가능성을 격찬한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 민간인(염동진)은 김구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의 한국군을 갖게될 것이며, 필요한 경우 이 한국 군인들은 그를 따라 38선을 넘을 것이라고 했다.
6.4 가장 무난하여 존경을 받게 된 인물?
정파를 막론하여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의 위치에 있다. 10만원권 지폐 후보 1순위라는 여론조사도 있었다.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사실에 따르면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나온 바와 같이 3.1운동으로 세워진 임시정부의 법통, 불의에 항거한 민주주의 이념, 평화통일 이념에 가장 부합하는, 쉽게 말해 '대한민국 헌법적 가치'에 부합하는 인물 중 하나로 김구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해방정국에서 배후로 의심받은 수많은 백색테러(대표적으로 장덕수, 송진우 암살) 혐의에서 자유롭다고 할 때의 얘기다. 특히 그중 독립운동가였던 일부 피해자에 대해 '죽어서 기쁘다'는 취지로 발언했다는 의혹, 1946년 3월 당시에는 북한의 분리를 준비하기 위해 활동한 조직도 아니었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간부에 대한 암살을 시도한 사실, 그 간부의 가족들이 피살당한 사실 등에서 볼 수 있듯 김구는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폭력의 사용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평화통일의 상징이 된 김구와 실제의 김구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다. 평화통일은 물론이고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의 상호 존중과 공존을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원칙과 김구의 해방정국 행보는 양립할 수 없다.
게다가 극우적인 입장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죽이려한 걸 쉴드 친다고 할지라도 그 가족까지 희생될 개연성이 높은 방법으로 공격을 하여 무고한 가족을 죽게만든 것은 옳지 못한 것임에 틀림 없다. 가족까지 몰살될 가능성이 높은 방식으로 공격한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원칙인 '자기책임의 원리'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6.5 군사정권이 만들어낸 민족 영웅?
김구에게 민족적 영웅이란 이미지를 만든 것은 박정희의 군사정권 작품이란 주장이 있다. 실제로 김구의 차남 김신은 군사정변 당시 공군참모총장으로, 5.16 군사정변을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후 박정희 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하며 승승장구했다. 박정희는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백범 김구를 적극적으로 민족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남산에는 백범광장을 조성하고, 1962년에는 김구에게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대한민국장, 건국훈장 1등급)을 수여했다.[30]
김신은 1962년 예비역 공군 중장으로 예편하고[31], 주 중화민국(대만) 대사로 부임해 무려 8년 동안 이례적으로 장기간 재임했다. 당시 중화민국은 신생 대한민국 정부에겐 미국 다음 가는 맹방이었다. 1971년 귀국한 김신은 대통령의 권유로 공화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했으나 낙선한다. 하지만 그후 교통부 장관을 거쳐, 대통령 추천으로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이 된다. 그리고 독립기념관 초대 이사장을 거쳐 백범김구기념관 관장 및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을 지냈다. #
거기에 이승만 정부의 잔재를 지워내고 북한과의 대립상황을 이용해 정통성 쌓기에 몰두하던 군사정권에게 이승만의 최대 라이벌이자 (북한과의 대립상황에 한민족 한개의 정부라는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극렬한 민족주의자이며 반공주의자에 임정의 법통성도 갖춘 김구만큼 띄워주기에 적합한 인물이 없다는것.
다만 박정희 정권이 김구를 띄우기 이전인 194~50년대에도 이미 김구는 많은 존경을 받는 인사였기 때문에 군사정권이 띄운 존재라는 주장에 어느 정도 과장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6.6 친일 인사 등용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본인은 친일행위를 한 바 없으나, 해방 후 친일세력을 등용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대표적으로 백범일지를 윤문한 이광수[32] 경교장을 제공한 최창학, 한독당과 김구의 자금원이였던 방응모등이 있다.
7 자녀들
생전 부인 최준례와의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지만 두 딸 김화경, 김은경은 둘 다 유년기에 급사했다. 나중에 태어난 아들 둘은 딸에 비해 오래 살았는데, 장남 김인은 1945년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급사했다. 그리고 자녀들 중 그의 만년까지 생존한 유일한 차남 김신은 김구 생전에 아버지를 도와 크게 활약했고 이후로도 6대 공군참모총장으로 대한민국 공군의 창건에 막대한 기여를 하였으며, 5.16 군사정변에 협조하는 등 대한민국 현대사에 상당한 발자취를 남겼다[33]
이 때문에 현재 김구의 자손은 장남 김인이 남긴 유일한 딸이자 김구의 장손녀인 김효자 쪽을 제외하면 전부 김신의 가계다.
8 대중매체
- 60년대부터[34] 여러 번 영화나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는데 초대에는 영화 감독이 손수 김구를 맡은 적도 있을 정도였다.
- 70년대까지만 해도 백범 전문 배우는 원로 배우 박암이 주로 맡았다. 대표작이 백범 김구와 상해 임정[35].
(박암이 김구역으로 출연한 영화 광복이십년)
- 그후 반민특위등의 MBC 특집극에서는 대조영에서 연개소문, 불멸의 이순신에서 어영담을 맡은 김진태가 맡았다. 김진태는 바로 이영후 본인이 '좋은 후배에게 물려주었다'고 할 정도로 '후계자'로 낙점되었지만 그리 자주 맡진 못했다. 결국 KBS의 여명의 그날에서는 이영후가 복귀했다.
- 윤봉길 의사를 다룬 단막극에서는 정욱이 맡기도 했다. 그때까지의 덩칫발 있는 김구역과는 달리 호리호리한 느낌이었다는 점이 주목받았다.
- 1995년 여름 그의 생애를 다룬 내용을 KBS에서 16부작 드라마로 제작돼 방영했었는데 청년시절의 김구 역을 배우 김상중이 맡았고[37] 장년, 노년의 김구 역은 연극계에서 백범 전문배우로 유명한 조상건이 맡았다.[38][39]
- 국가의 사생활에선 너무 순수해서 이승만에게 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암살에서는 김홍파가 맡았다.
9 이모저모
- 오사마 빈 라덴 이전 세계 최고액 현상범이라고 알려져 있는 경우가 있는데, 거짓이다. 빈 라덴 이전 최고액 현상범은 김원봉이다. 김원봉의 현상금은 당시 돈으로 100만원이었으며, 이는 현재의 200~300억에 해당하는 액수다. 그렇다고 일제가 김구에게 적게 건 것은 아니라서, 김구에게 걸린 현상금도 60만원에 달했으며, 이는 현재의 120~180억에 해당하는 액수다. 참고로 빈 라덴에게 걸렸던 현상금은 약 540억원이었다. 출처
- 우리가 접하는 백범일지는 전부 김구가 작성한 100% 원본은 아니고 김신에 의하면 이광수의 손에 윤문되어 발간되었다고 한다.[40] 우리가 아는 그 변절자 이광수 맞다.
- 인터넷상에서 나라 잃은 김구 표정이라는 말이 있다. 어원(?)은 디씨인사이드에 올라온 "어제 소개팅했는데 여자가 내 얼굴보고 나라잃은김구표정짓더라 X발 ㅋㅋㅋㅋㅋ"(...)이라는 글.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 ↑ 안두희를 살해한 박기서에 따르면 최후에 이르러 당시 이승만의 최측근이였던 경찰청장 장택상으로부터 사주받았음을 자복하였다고 한다. 여담으로 수전증이 매우 심하여 글씨에서 떨린 흔적이 보인다고한다. 1938년 이운환에게 저격당해 총알이 몸속을 비집고 들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사람들은 이 글씨체를 '떨림체'라고 말했으나, 본인은 '총알체'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 ↑ 그러나 해방 후의 활동도 그렇고 광복 전의 활동도 그리 두드러진 것은 많지 않으므로 과장된 면이 크다.
- ↑ 김구는 40년대 임시정부의 주석직을 지냈고,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임기 대부분을 미주에서 보냈으며, 독립운동 자금 횡령, 위임통치 청원 사건과 관련해서 1925년 대통령직에서 탄핵되었다.
- ↑ 평안, 해서지방에서 볼 수 있는 의식으로, 산모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함이라고 한다.
- ↑ 전화를 걸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당시엔 전화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 ↑ 우남은 이승만의 호다.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당시 예법과, 그리고 형이라고 부를만큼 친근한 사이였음을 암시한다.
- ↑ 김규식은 북한을 방문한 것까지는 맞지만, 북한의 계략에 이용당할 것을 눈치채고 병을 핑계로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 ↑ 김일성은 죽지않고 한 소련장교의 팔이 절단되었다
- ↑ 미군정 관리이자 교수인 리차드 로빈슨은 김구의 방북이 이승만에 대한 개인적 혐오감 때문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 ↑ 앞줄 왼쪽부터 김일성, 백남운, 박헌영, 김두봉 뒷줄 왼쪽부터 김구, 네번째 김원봉
- ↑ 한국에서는 당연히 개봉하지 못했는데 이 영화를 모 교양프로에서 일부 편집으로 틀어준 적이 있었다. 영화를 본 김구의 차남 김신 장군은 말도 안되는 헛소리라며 어처구니없어 했다. 왜냐면 김신 장군 본인이 바로 부친을 수행하여,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던 산증인이기 때문(...)
- ↑ 초대 대통령선거는 국회의원에 의한 간접선거로 치뤄졌기 때문
- ↑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대한민국 공군의 창설멤버이자 한국전쟁에 참전한 차남 김신은 이승만 정권 하에서도 별다른 불이익 없이 군생활을 지속했다.
- ↑ 박정희 본인은 해방이후 임시정부 계열과 접점이 있었다. 해방직후 임시정부가 광복군의 세를 키울 목적으로 군경력자들을 모집할 때, 박정희는 김학규 장군이 지휘하는 광복군 평진지대의 중대장을 맡은 바 있었다. 이때 인연으로 훗날 군부 대숙군 속에 박정희가 체포됐을 때, 박정희의 구명에 나선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김학규 장군이었다. 박정희는 5.16 성공 이후, 정치범으로 수감되어 있던 김학규 장군을 즉시 석방했다.
- ↑ 되집어 던지는 순간 폭발하여, 노비첸코의 한 쪽 팔이 날아갔다.
- ↑ 백범일지의 주해를 담당한 사람이다.
- ↑ 다만 이런 부분은 비서의 가필이라는 증언도 있다
- ↑ 그런데 사실 이 어른은 사회주의쪽과도 가까워서..... 이 말을 한 시점을 잠시 곱씹어 보면 해방 후에 한 말이었다.
- ↑ 중화민국 정부는 이른바 민국 연호를 사용했다. 중화민국의 수립년을 원년으로 삼은 연호였다. 중화민국 정부의 지원을 받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똑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원년으로 잡아 민국 연호를 썼다. 따라서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민국 30년'이란 연호를 썼다.
- ↑ 최기영 "백범 김구의 애국 계몽운동" ≪백범과 민족운동연구≫ 제1집, 백범학술원
- ↑ 조동걸,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1집, 백범학술원
- ↑ 한국 영화 아나키스트에서 이런 이미지가 돋보인다. 실제로도 그랬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급진적인 무장투쟁에 반대하던 안창호가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황동하는 의열단의 주인공들을 후원하던 김구와 의견대립이 있는 장면이 한 장면 나온다.
- ↑ 이 교과서(?)는 교육부의 인가를 받은 정식 교과서가 아니다
- ↑ 하지만 김규식 등도 외교론을 주장했음에도 이승만만 그런 것처럼 비판하는 것은 형평성에 위배되는 일이다. 미국에 있는 동안 미주 독립운동단체 안에서 권력싸움을 벌이고 대통령 시절의 행보가 막장이었기 때문에 자초한 것이겠지만... 결국 미국이 일본에 핵을 떨어뜨려서 결과적으로 외교독립론이 옳았다는 입장도 있지만 그것은 진주만 공습 이전의 미일 관계를 몰라서 하는 소리며 외교독립론만이 옳았다고 할 수는 없다. 적절히 국제 정세를 이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장투쟁이 국제 사회에 독립의 의지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표현수단이기 때문.
- ↑ 이점은 당시 임시정부가 중국 영내에 있었기에 중국의 지원이 필수였음을 감안해야 한다. 국민당 정부의 지원이 아니었더라면 임시정부는 역사에 알려진 것보다 더 활동이 적었거나 최악의 결과로 일본에 체포되어 끝장났을 수도 있었다. 임시정부의 위치가 자꾸 국민당 정부를 따라 중국 내륙으로 이동한 것 역시 중일전쟁으로 일본이 중국 영내를 점령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 ↑ 이승만/평가 항목 참고.
- ↑ 인도 독립 운동의 양대 지도자인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는 파키스탄과의 분리 여부를 두고 갈라서서 네루가 인도 수상이 되었던 반면, 간디는 파키스탄과의 분리 비판과 인도 내 이슬람교도 차별 반대를 주장하가다 과격 힌두교도에게 피살당했다. 그러나 인도에서 이러한 차이를 이유로 간디, 네루 가운데 한명의 공로만을 인정하고, 다른 한쪽은 격하하는 일은 없다.
- ↑ 실제로 북괴에선 비슷한 내용의 선전물을 만들기도 했다. 김일성을 보고 굽신거리는 김구를 영화에 출연시키면서(...)
- ↑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2:1948~1950 민주주의·민족주의 그리고 반공주의》 (역사비평사,1996)
- ↑ 정부수립 이후 최초로 독립운동가에 대한 대규모 심사 및 건국훈장 수여에서도, 김구 뿐 아니라 박정희 본인의 상관이었던 광복군 평진지대장 김학규 장군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핵심 수훈자들이었다.
- ↑ 당시 각군 참모총장은 중장이 맡는 경우가 흔했다.
- ↑ ' “춘원은 자신이 그 일을 하겠다고 했답니다. 아버님은 그의 행실 때문에 망설였는데, 누군가가 글솜씨도 있는 사람이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맡겠다니 시켜보라고 했대요. 그가 윤문을 한 것은 사실이나, 아버님이 그걸 알고 맡기셨는지 의문입니다.” (‘최일남이 만난 사람’ <신동아> 1986년 8월호) 김구의 차남 김신씨와의 인터뷰 中
- ↑ 빨간 마후라로 유명한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의 주역
- ↑ 이승만의 자유당 시절인 1950년대에는 공개적인 찬양은 금기시되었다
- ↑ 김구의 맞수인 공산당 간부역을 이덕화의 아버지 이예춘이 맡았다.
- ↑ 모 토크쇼에서 회고한 바에 의하면 80년대 제 1공화국에서 처음으로 백범 역을 맡았을 때 박암선생의 아성 때문에 많이 고민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영후는 MBC에 처음 갔을 때 고위 임원과 마주친 순간 '김구로구먼!'소리를 들었다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로 적역이었다
- ↑ 아이러니컬하게도 첫 TV 출연이 앞서 말한 작품에서 윤봉길 역이였다.
- ↑ 영화 타짜에서 너구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사실 원로 연극배우인 조상건의 최초의 외도가 바로 김구 전기드라마.
- ↑ 정확하게는 105인 사건으로 수감되면서 수감 말엽부터 배우가 바뀐다.
- ↑ ' “춘원은 자신이 그 일을 하겠다고 했답니다. 아버님은 그의 행실 때문에 망설였는데, 누군가가 글솜씨도 있는 사람이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맡겠다니 시켜보라고 했대요. 그가 윤문을 한 것은 사실이나, 아버님이 그걸 알고 맡기셨는지 의문입니다.” (‘최일남이 만난 사람’ <신동아> 1986년 8월호) 김구의 차남 김신씨와의 인터뷰 中